유력 용의자 법정에… 진범 밝히나진범 지목된 패터슨 16년 만에 국내 송환… 8일 첫 재판법무부 패터슨의 실수 놓치지 않고 국내송환'직접증거' 없어 '정황증거'로 혐의 입증이 관건

9월 23일 국내로 소환된 존 패터슨.
미제로 남을 뻔했던 '이태원 살인사건'이 새 국면을 맞게 됐다. 미국으로 도주한 피고인 아더 존 패터슨(36)이 16년 만에 국내로 송환돼 법의 심판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패터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 지난 9월 23일 오전 4시 26분께 우리나라에 입국했다. 그는 미국 현지에서 체포된 뒤에도 각종 법률적 수단을 동원해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송환을 피했다. 법무부는 "패터슨 송환은 한ㆍ미 당국의 사법공조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고 평했다. 18년 만에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던'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지 주목되고 있다.

"재미로 죽여"…법정서 상반된 주장

1997년 4월 3일 밤 10시 대학생 조중필(당시 22세) 씨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 들렀다. 조씨가 들어갔던 햄버거 가게 안에는 주한미군 자녀인 패터슨(당시 18세)과 그와 동행한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당시 18세)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 중이었다. 두 사람은 조씨가 들어간 화장실을 뒤따라 들어갔고 조씨는 흉기에 아홉 군데를 찔려 살해됐다. 패터슨이 평소 소지하던 9.5cm짜리 휴대용 칼이 범행해 쓰였다. 사건 직후 패터슨과 리는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 웃으며 "우리가 어떤 남자를 칼로 찔렀다. 재미로 그랬다"라고 말했다. 범인이 둘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두 사람은 살인사건 목격자인 동시에 용의자로 함께 법정에 섰고 상대방을 범인이라고 지목했다. 두 사람의 진술은 법정에서 엇갈리는 모습을 보였다. 패터슨은 "리가 조씨를 찌르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고 주장했고 리는 "패터슨이 조씨를 찌르는 것을 (화장실) 거울과 뒤에서 봤다"고 진술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것은 부검결과였다. 조씨보다 덩치가 큰 사람이 공격했으리라는 부검의 진술은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됐고 조씨보다 키가 컸던 리가 살인죄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살인 사건을 밝힐 중요한 증거를 없앤 패터슨은 증거인멸죄가 적용돼 장기 1년 6월, 단기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리에 몸에 묻은 핏자국이 옷에 스프레이 뿌린 듯 묻어있지만 패터슨은 머리와 상의, 바지와 양손 등 리보다 훨씬 많은 피가 묻어있던 점에 주목했다. 또한 리가 사건 발생 후 여자친구를 찾아가 "패터슨이 한국 남성을 칼로 찔렀다"고 말하는 등의 정황을 근거로 리는 대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파기환송돼 무죄가 확정됐다.

검찰은 뒤늦게 패터슨을 진범으로 판단해 수사를 재개했다. 하지만 패터슨은 검찰이 출국금지 연장을 하지 않은 틈을 타 1999년 8월 출국했다. 패터슨의 해외 도피는 '이태원 살인사건'이라는 영화로 제작될 정도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패터슨, '시간 끌기'로 송환 늦어져

패터슨이 석방된 시기는 우리 사법부가 아직 '이태원 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판단하지 못하던 때였다. 법무부는 패터슨의 소재를 확인한 2009년 10월 이후 미국 당국과의 공조를 통해 패터슨 송환을 위한 미국 재판에 대응해왔다. 패터슨은 2011년 5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체포돼 재판에 넘겨졌고 그해 12월 서울중앙지검은 공소시효 논란을 피하기 위해 그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미국 법원은 2012년 10월 범죄인인도 허가를 결정했으나 패터슨은 이와는 별개로 인신보호청원을 제기했다. 범죄인인도 결정이 적절한지 다시 한 번 판단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패터슨의 청원은 지난해 6월 1심과 올 5월 항소심에서 모두 기각됐다. 7월에는 재심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패터슨은 3월 내 상고를 제기해 마지막 판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 과정에서 패터슨은 범죄인인도 결정의 집행 정지 신청을 하지 않는 실수를 했다고 전해졌다. 미국 관련법에 따라 인신보호청원을 제기하려면 범죄인인도 집행 정지 신청을 해야 하는데 그 기한이 만료될 때까지 신청하지 않은 것이다. 법무부는 이런 상황을 노려 미국당국을 설득해 4년 만에 패터슨을 국내에 송환하게 됐다.

피해자 조씨의 어머니 이복수(73) 씨는 패터슨의 송환 소식에 "내가 이날 오기를 기다려 살아온 것 같다"고 했다. 이씨는 "사람을 죽인 만큼 와서 벌을 받아야 한다"며 "당시 시비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물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검찰 보완수사…18년 만에 사건 해결될까

검찰은 그동안 패터슨의 신병이 확보될 때를 대비해 보완수사를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혈흔 형태분석과 진술분석기법을 적용한 수사를 거친 검찰은 사건 당시 현장에 남아있던 혈흔과 패터슨의 유전자 감식 결과를 대조하면 혐의를 입증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2011년 검찰은 그동안 확보한 증거들을 검증하기 위해 당시 사건이 벌어졌던 햄버거 가게 화장실을 세트로 만들어 직접 현장 재연을 해보기도 했다. 검찰은 재수사 과정에서 사건 발생 당시 에드워드와 달리 패터슨의 전신에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었던 점, 화장실 벽면에 묻은 혈흔을 분석한 결과에 따라 두 사람의 흉기 사용 동작을 재연했는데 패터슨의 동작이 이와 맞아떨어진 점 등에 주목했다.

그러나 20여 년 가까이 지난 살인 혐의를 입증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패터슨을 살인혐의로 기소하지 않은 것은 현장에서 확보한 직접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검찰은 패터슨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주변인들을 통해 진술을 확보하는 수사를 병행했다. 검찰에 따르면 패터슨이 출국 직후 자신의 범행을 몇몇 사람에게 자랑삼아 얘기했다는 제보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을 확보했더라도, 재판 과정에서 혐의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서울중앙지검은 2011년 12월 패터슨을 재수사해 살인죄로 기소한 박철완 부장검사를 재판에 투입하기로 했다. 패터슨은 변호인 3명을 선임했다. 한국 경찰에 패터슨의 신병을 넘겼던 미군 범죄수사대(CID)의 협조를 구하고, 리를 증인으로 신청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향후 재판은 패터슨이 진범으로 지목된 배경을 하나하나 짚어보는 방식으로 진행될 전망이라고 알려졌다. 패터슨의 첫 재판은 8일에 열린다고 전해졌다.



김민정 인턴기자 mj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