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현실로, 인턴이 된 시니어들… 풍부한 경험ㆍ연륜으로 회사에 기여
영화 ‘인턴’ 로버트 드 니로 우리 곁으로… 책임감·친근함·성실함 갖춰

지난 1일 찾아간 서울시 용산구의 청년창업플러스센터 한 사무실 내에는 스타트업 기업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열정으로 가득 찬 젊은이들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창업 2년차 사회적기업 ‘더꿈’의 인턴 정용진(61) 씨는 새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최종 촬영까지 담당하며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었다. 박시진(34) 대표는 정씨를 “인턴 선생님”이라 부르며 젊은 CEO에게 필요한 비즈니스 조언을 얻고 있었다.

약 151만 명의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후 뚜렷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시니어 일자리’가 각광받고 있다. 60세가 넘어 새로운 직장에 취업해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노년층은 더 이상 영화 속의 일이 아니다. 현장에서 경험과 지혜를 살려 인생 후반전을 ‘행복한 내일’로 만들고 있는 시니어들을 만나 봤다.

영화가 현실로, 인턴이 된 시니어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인턴’은 노년의 재취업과 세대 갈등을 풀어냈다. 퇴직 후 마땅히 하는 일 없이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70세의 벤은 정부의 시니어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30세 여성 CEO 줄스의 온라인 쇼핑몰에 인턴으로 취업한다. 줄스는 벤에 대한 기대나 관심은커녕 항상 정장 차림인 벤을 불편하게 여겼다. 하지만 40년 경력의 직장 생활 베테랑이자 줄스의 인생 멘토가 된 벤은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조언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며 벤은 그녀의 부하 직원인 동시에 조력자 그리고 ‘베스트 파트너’가 돼 손수건을 건넨다.

영화 인턴에서 “사랑하고 일하라. 일하고 사랑하라. 그게 삶의 전부다”라는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해 일이 인간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줄스와 벤을 통해 에둘러 설명한다. 회사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어른’이지만 나서려고도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풍부한 경험과 연륜을 바탕으로 회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도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창업 2년차 스타트업인 사회적기업 ‘더꿈’의 대표이사와 인턴이 고용노동부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해 다른 기업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60대 신사에게 기업을 소개하며 명함을 먼저 건네자 웃음이 터졌다. “저는 인턴이고, 이 분이 대표이사입니다.” 옆에 선 30대 여성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더꿈 대표이사입니다.”

스타트업 기업으로 사업을 키워나가는 젊은 CEO 박시진(34) 대표는 “내가 내 아이디어나 이야기를 다 해도 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다. 이때 옆에서 든든히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사업에 대한 조언과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시니어 인턴 정용진(61) 씨가 사업의 큰 성장동력이라고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 은퇴 후 고민 높아져

퇴직한 사람들은 “막상 닥치면 막막합니다”라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갈수록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퇴직한 사람들의 고민이 높아지며 정부나 직장, 사회에서 퇴직 후의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재취업으로 제2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내 재능이 사회를 멋지게 바꾸는 모습을 보며 돈으로 살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다. 나이 든 사람이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 ‘경험 많고 숙련된 베테랑’으로 인식되며 기업에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추세이다. 정부가 인구 고령화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도 일자리 창출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경제활동 인구는 모두 2714만 명으로, 이 중 50세 이상은 5만5000명으로 나타났다. 50세 이상 경제활동 인구는 지난 2000년 498만 명에서 2010년 772만 명, 지난해 995만 명으로 급속히 늘었다.

50세 이상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일을 하는 취업자는 980만9000명으로, 15세에서 39세까지 청년층 취업자 수 959만8000명을 앞질렀다. 고령화와 저출산 그리고 베이비붐 세대의 노동시장 진입으로 인해 50세 이상의 고령자 취업자가 청년층 취업자 수를 처음으로 역전했다.

한국은 OECD 주요국가 중 가장 빠른 고령화 속도를 보인다. 고령사회의 시니어들은 건강하고 활동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적합한 양질의 일자리가 필요하다. 시니어 일자리는 시니어가 생산가능 인구로 편입되면서 소득과 소비의 주체가 되어 경제 파이를 늘리고, 심지어 국가 경제 전체의 파이를 늘림으로써 청년 일자리까지 늘릴 기회가 된다. 또한 우리나라의 고령화를 이끄는 베이비붐 세대는 산업발전의 경험과 자산을 갖고 있는 새로운 경제 주체이기도 하다.

기업에서도 ‘시니어 인턴십’에 적극 동참해

고령화 사회에서 일자리를 원하는 시니어들이 많아지며 ‘시니어 일자리 창출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CJ대한통운은 시니어 인력을 택배 배송에 활용하는 실버택배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서울·부산 등 전국 31개 시·구에서 60개의 실버택배 거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470여 명의 시니어 인력들이 배송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1개 실버택배 거점에는 신체적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루 4시간 정도 교대로 7~8명의 시니어 인력들이 근무한다. 배송 거점 인근 근거리 지역에서 하루 1인당 50~60여 개의 택배를 배송하는데, 배송수단으로 온실가스를 발생시키지 않는 친환경 전동 자전거와 스마트 카트 및 전동 손수레 등을 이용한다. 시니어 인력들은 택배 물량에 따라 월 50만~150만 원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CJ대한통운은 지난해 10월 서울 은평구청·한국노인인력개발원과 어르신 일자리 아파트택배사업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 백련산 힐스테이트 아파트 단지 내 ‘실버택배 서울 1호점’을 개장했다.

지난달 25일 실버택배 서울 1호점에서 근무하는 실버 택배 기사 김정일(75) 씨를 만났다. “정부 지원금만 받는 것보다 내 손으로 일하고 용돈도 벌 수 있어 좋다”는 김씨는 75세가 넘은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떠는 것 보다 날짜를 정해 정해진 시간에 일할 수 있어 노인 일자리로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무거운 짐을 들거나 아파트 동이나 호수를 잘못 적어 실수할까 걱정되긴 했지만 그만큼 주의하며 일하고 있다”는 김씨는 몇십 개의 택배 상자를 전동 손수레에 실었다. “노는 친구가 있으면 일을 같이하자고 말한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유한킴벌리는 2012년부터 제품개발과 판로 개척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기업, 소셜벤처 등을 발굴, 육성하고 이를 통해 시니어 일자리 창출과 시니어 산업 육성에 기여하고 있다. 현재까지 총 26개의 소기업을 육성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204개의 시니어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유한킴벌리는 시니어 용품을 유통하는 과정에서 시니어 인력을 적극적으로 모집했다. 유한킴벌리와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사단법인 50플러스코리안이 함께하는 공익유통기업으로 시니어허브를 설립해 2015년 2월에 타임브리지 을지로점을 개점했다.

지난달 30일 타임브리지 을지로점에서 시니어용품을 판매하는 시니어 사원 천민수(60) 씨를 만났다. 천씨는 동대문에서 의류 제품을 만들고 판매하던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5년 정도 쉬다가 경력을 살려 판매직으로 재취업했다. 시니어허브 이옥재 점장은 “젊은 분들이 부모님이나 주변 분들을 위해 제품을 사러 올 때 시니어 사원분들이 경험을 살려 연령별로 제품을 추천해 매출이 올랐다”고 말했다.

천씨는 시니어 사원으로 재취업을 할 때 고려했던 점에 대해 “시간을 유동적으로 쓸 수 있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며 “오후에 출근하는 것으로 조율해 오전엔 집안일과 운동도 하고 오후엔 일할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다. 5년간 쉴 때는 매일같이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일을 시작한 뒤로는 “내가 갈 곳이 있고 일할 곳이 있어 즐겁다”며 웃었다.

그 밖에도 홈플러스는 점포 매장 관리원으로 실버 채용을 하고 있고 LH(한국토지주택공사)는 시니어 사원 제도를 통해 고령자 일자리를 창출했다. CGV는 도움지기 제도를 통해 시니어 인력이 다양한 극장 서비스의 지원 업무를 담당했으며 BGF리테일은 편의점 CU(씨유)에서 근무하는 시니어 스태프를 고용해 매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BGF리테일 관계자는 “시니어 인력은 상대적으로 다른 연령층에 비해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할 뿐 아니라 고객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때문에 고용점주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며 “지속적으로 지자체와의 제휴를 확대하여 채용 규모를 더욱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니어 인턴의 ‘경험 자본’ 활용하는 스타트업 기업

사회복지 법인 신나는조합은 한화생명과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의 후원으로 은퇴한 시니어들이 사회적기업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을 하고 있다. 신나는 조합 측에서 시니어 인턴을 채용할 기업을 공고해 ‘더꿈’의 박시진 대표가 지원했고 사회적기업에 취업을 희망한 정용진씨가 매칭됐다.

‘더꿈’은 시니어들의 ‘경험자산’을 순환시켜 청장년층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는 일을 한다. 박 대표는 시니어가 퇴직 후의 여가, 일, 사회공헌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웹진 기자로 정씨를 3개월 전 인턴으로 채용했다. 정씨는 대기업 근무와 IT 회사를 경영했던 경험이 있어 컴퓨터 활용 능력도 뛰어났다. 정씨는 웹진 발행뿐만 아니라 연륜이 있는 시니어가 창업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답변해 주는 ‘200초의 비밀’이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기획부터 촬영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시니어를 재원으로 활용하는 서비스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시니어 인턴의 의욕적인 자세와 풍부한 경험은 창업 2년 차의 CEO에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박 대표는 “인턴 선생님께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사업적으로 어떻게 풀어나가면 될지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면 옆에서 한 마디 건네주시는 것이 행동을 구체화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더꿈은 회사의 모토인 ‘경험 자본’의 활용이 가장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회적기업에 관심이 생겨 사회적기업과 기업가 교육을 받고 취직하게 됐다”는 정씨는 자신의 노하우나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됐다. 일주일에 이틀, 3시간 정도 근무하는 정씨는 영업과 기획, IT분야의 일을 하며 쌓았던 경험들을 토대로 활용해 스타트업 기업에 도움을 주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영화 ‘인턴’의 한 장면처럼 불이 꺼진 사무실에서 컴퓨터 한 대를 앞에 두고 사업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박 대표는 사업을 진행하다 발생한 애로사항을 마음 터놓고 말할 수 있고 오히려 도움이 되는 조언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정씨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박 대표는 시니어 인턴에 대해 “일선에서 퇴직 후에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아이디어를 활용할 생각보다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시는 분들”이라며 “앞으로도 시니어 인턴을 채용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삶과 일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시니어, 경험이 자산이다

영화 인턴에 나오는 70세의 벤은 과거와 현재의 가교역할을 했다. 시니어 인턴은 과거에 쌓아둔 경력을 바탕으로 현재에도 발전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베이비붐 세대는 퇴직 후 과거의 고인 물이 아닌 계속해서 흐르는 샘물이 돼야 한다.

정용진씨는 더꿈의 인턴으로 경영자문과 200초의 비밀 프로젝트의 디렉터를 맡으며 산업체 우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창업과 취업에 대한 상담사로 활동하며 사업 컨설턴트로도 활동 중이다. 프리랜서 상태로 여러 일을 하는 정씨는 “한 직장에서 정직원으로 근무하는 것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하는 시니어’들은 공통으로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천민수씨는 지인 중 “자영업자 외에는 경제활동을 하는 친구들이 많이 없다”며 천씨가 일하는 모습을 보며 일자리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노후에 일과 삶이 어우러지는 삶이 만족스럽다는 천씨는 “지금이 제일 즐거운 시기인 것 같다.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용돈도 벌어 행복한 시기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시니어 전문가들은 “인턴 영화 속 벤의 모습은 노년의 재취업과 세대갈등을 직면한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나갈 해법을 제시한다”며 “시니어 인턴에게 우리 사회가 특히 바라는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노인상담센터 이호선 센터장은 “노인 재취업은 사회적 제도 개선과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며“시니어 인턴으로 재취업을 하는 베이비붐 세대는 본인 과거의 경력만을 내세워선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시니어 인턴은 직장을 구할 때 눈을 낮추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빠르게 적응하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 센터장은 “재취업 후 인간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며 “젊은 사람들과 어우러져 일할 때는 인간관계도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삶의 지혜를 보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민정 인턴기자 mj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