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당해도 ‘침묵’…남자니까?

여성 상사ㆍ강사에게 성희롱… 불이익 당할까 ‘쉬쉬’

학교 내 남학생 간 성희롱, 성범죄 인지 못하기도

남성 성폭행 피해자도 증가세… 부끄러워 신고 안 해

지난해 8월 고등학생 A(16)군을 성추행한 혐의로 B(26ㆍ여)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B씨는 A군의 팔과 어깨, 엉덩이를 주물렀고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난 다음날에도 근무 중이던 한 의경(23)에게 다가가 엉덩이를 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서부지법은 지난 18일 B씨에게 벌금 500만원 형과 함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을 이수할 것을 명령했다.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형이 너무 약한 것 아니냐”면서 “만약 B씨가 남성이고 A군이 여학생이었다면 더 엄한 처벌을 내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성 위세에 눌려 입 닫아

서울에서 디자인 회사를 다니고 있는 김모(28)씨도 이같은 누리꾼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전 직장에서 여성 상사들과 동료들에게 수시로 성추행을 당했었다는 김씨는 “어차피 신고해도 벌금 얼마 내면 해결될 것을 무엇하러 고소를 하겠냐”고 했다. 김씨의 전 직장은 디자인 회사 중에서도 유난히 여성직원이 많은 ‘여초(女超)’ 회사였다. 그곳에서도 가장 어렸던 김씨는 짓궂은 여자 선배들이 장난치기 딱 좋은 상대였다.

김씨에게 성적(性的)인 농담을 하거나 엉덩이를 툭툭 치는 등의 성희롱이 이어졌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회식자리에서 허벅지를 만지는 40대 여성 상사 C씨였다. C씨는 평소에도 김씨에게 “우리 OO(김씨의 이름)는 막냇동생 같아 귀엽다”며 볼을 꼬집거나 엉덩이를 툭툭 때리는 등 상습적으로 추행했다. 유난히 또래보다 어려 보여 예쁘장한 김씨에게 “OO 남자 아닌 거 아니냐. XX(남성 성기 은어) 있는지 확인해보자”며 바지를 벗기는 시늉까지 했다.

김씨는 왜 직장에조차 알리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직장에 알린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고 나만 ‘유별난 사람’으로 찍힐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어 그는 “남성들이 성희롱 피해에 대해 털어놨을 때 ‘남자가 돼서 겨우 그런 걸로 징징거리나’라는 인식이 직장이나 사회에 팽배해 있다”고 꼬집었다. 성추행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와 달리 남성인 경우에는 사안의 심각성이 낮아진다는 말이다. 김씨는 “주위 사람들 중에서 여성 직장동료들로부터 상습적인 성희롱을 당하는 사람이 몇 있지만 직장에 알리거나 고소를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면서 “사회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권위를 이용한 남성대상 성범죄는 직장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지성의 요람이라는 대학교에서도 공공연하게 발생했다. 대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한 20대 중반의 D씨는 레슨 강사들로부터 끊임없는 성추행에 시달려야 했다고 했다.

무용 특성상 강사들과 신체적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도를 지나칠 때가 많았다고 D씨는 말했다. 그는 “자세를 교정해 준다며 엉덩이를 쥐거나 사타구니를 손으로 쓸어 내리는 등의 일이 잦았다”면서 “물론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한 행동은 아니겠지만 남자들은 타인이 몸을 만져도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울분을 토했다. D씨는 그러면서 “남자 강사가 여제자의 무용 자세를 고쳐준다며 몸을 만졌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라고 했다.

D씨는 당시 해당 강사들에게 일언반구의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자칫 까다로운 학생으로 소문이 나 실력 좋은 선생들에게 레슨을 받지 못하거나 하는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서였다.

앞서 언급한 김씨와 마찬가지로 D씨도 자신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여성의 기세에 눌려, 성추행을 당하면서도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다는 말이다. 신고된 남성 대상 성범죄보다 실제 발생 건수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남성 간 성범죄도 심각

남성들은 동성에 의한 성범죄에 시달리기도 한다. 같은 남성이다 보니 성추행과 성희롱을 하면서도 그것이 범죄라는 인식은 더 약하다. 이같은 성범죄는 보통 군대나 남자고등학교 등 남성들만으로 구성된 집단에서 일어난다. 포항에서 남중ㆍ남고를 나온 김모(24)씨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신체접촉을 동반한 성희롱은 빈번하다고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남학생들은 그것을 장난으로 넘기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분이 나쁘니 하지 말라’고 말하기가 힘든 분위기라고 했다. 김씨는 “성희롱을 하는 학생들은 ‘장난 가지고 사내 자식이 뭘 그리 예민하게 구느냐’는 식으로 오히려 성희롱을 당하는 학생을 ‘사회부적응자’로 만든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학교 내에서 일진 등 힘이 센 학생들이 힘이 약한 왕따 학생을 괴롭히는 과정에서 성희롱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김씨는 “여러 명의 남학생들이 특정 학생에게 성행위를 하는 듯한 동작을 하며 괴롭히는 걸 봐왔다”면서 “보복이 두려워 선생님께 말도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 힘 없는 학생들이 많았다. 아마 지금 고등학생들도 상황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씨의 이런 예상이 영 틀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소재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오모(18)군도 김씨와 비슷한 말을 했다. 오군은 “학교 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성희롱도 줄어들었다”면서도 “여전히 몰지각한 학생들이 몇몇 있다”고 했다. 학교 내에서 세(勢)가 있는 남학생들이 약한 학생의 유두를 비틀어 꼬집거나 특정 부위를 때리는 등의 추행은 아직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오군은 말했다. 이 외에도 여학생들 앞에서 바지를 벗기거나, 동정(童貞)인 남학생을 놀리면서 수치심을 주는 등 언어적 폭력도 잦다고 했다. 오군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을 가해 폭행하는 것만 감시하지 말고 남학생 간 성희롱에도 관심을 갖고 근절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남성들은 성희롱ㆍ성추행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성폭행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가해자도 대부분 남성들이다. 실제 대검찰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발생한 남성 대상 성폭행은 1375건이었다. 2011년 816건, 2012년 831건, 2013년 1060건에 이어 또 증가한 수치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P(26)씨도 어린 시절 몇 살 위 형에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했다. P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20대 중반의 E씨를 알게 됐고 E씨가 “술을 사주겠다”며 회유하자 서울까지 그를 만나러 갔다. E씨는 P씨가 술에 취하자 숙박업소로 데려가 그곳에서 P씨를 성폭행했다.

P씨는 경찰에 신고하려다 생각을 접었다. 남성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이다”면서 “성폭행을 당했어도 나처럼 침묵을 지키는 남자들이 분명히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오보람 인턴기자 boram3428@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