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최후의 보루’ 안종범 수첩의 무력화… 이재용, 승기 잡나

삼성 측 “안종범 업무수첩, 재전문증거로 형소법 상 증거능력 인정 못해”

재판부, 안종범 수첩 ‘정황증거’로 채택… 특검 측 혐의 입증 난관

법조계 일각 “안종범 수첩에 대한 재판부 판단, 법적으로 지극히 ‘상식적’” 주장

한민철 기자

이재용(50ㆍ구속기소)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전ㆍ현직 임원들의 재판에서 특검 측의 결정적 증거였던 ‘안종범 업무수첩’이 정황증거로 결정되며 재판의 향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검 측은 이 업무수첩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박근혜(65ㆍ구속기소)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죄 혐의를 입증해 나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안종범 수첩이 공소사실을 증명하는 진술증거로서 인정되지 않는다며, 사실상 증거능력을 무력화시켰다.이에 ‘재판부가 삼성 편을 들고 있다’며 비난이 일고 있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재판부의 판단이 당연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동시에 특검 측이 사실상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증거에 큰 의미가 없게 된 만큼, 재판의 승기가 삼성 쪽으로 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지난 4일과 5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김진동) 심리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에 대한 뇌물공여 사건의 공판에는 안종범(57ㆍ구속기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틀에 걸쳐 펼쳐진 박영수(65ㆍ사법연수원 10기) 특별검사팀과 삼성 측 변호인단 간의 치열했던 법정공방의 핵심 쟁점은 바로 안 전 수석의 청와대 재직 시절 업무수첩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였다.

이와 관련돼 상반된 주장을 가지고 있는 양 측은 4일 35차 공판의 시작부터 팽팽하게 맞섰다.

우선 삼성 측 변호인단은 안종범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삼성 측은 안종범 업무수첩에 기본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2015년 7월 25일과 2016년 2월 15일 두 차례 독대 때 나눈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특히 여기에는 특검 주장의 핵심인 ‘비선실세’ 최순실(61ㆍ구속기소)씨의 딸 정유라(21)씨의 승마지원과 동계스포츠영재센터 및 미르재단 등에 자금을 출현하는 대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 삼성의 현안에 대해 신경써줄 것을 요구하는 부정한 청탁에 관한 내용으로도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이 적시돼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삼성 측 변호인은 이 업무수첩이 형사소송법상 ‘재전문증거’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실’일 뿐 ‘진실’을 밝히기 위한 증거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삼성 측 변호인은 “안종범 수첩은 대통령 독대 자리에 있지 않았던 안종범이 사후에 대통령 진술에 의존해 작성된 것”이라며 “무엇보다 피고인(이재용)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다시 안종범에게 전달한 재전문진술에 의해 기재된 증거이므로 형사소송법 310조 2항에 의해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삼성 측은 안종범 수첩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수집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안종범 전 수석도 지난 5월 1일 열린 본인의 재판에서 검찰 측의 증거수집 절차에 대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당시 안 전 수석은 검찰이 39권의 업무수첩을 복사한 뒤 돌려준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제출을 했지만, 이를 압수했고 자신에게 이에 대한 임의제출에 동의할 것을 무리하게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삼성 측 역시 안 전 수석과 같은 입장으로 검찰의 업무수첩의 압수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은 이미 상실된 상태라고 꼬집었다.

반면, 특검 측은 안종범 업무수첩이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라며 반박했다. 양재식(51ㆍ사법연수원 21기) 특검보는 “안종범 업무수첩의 신빙성은 증인신문 과정을 통해 충분히 나올 것”이라며 “대통령과 피고인과의 독대 때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안종범 수첩 기재 내용이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만이 아닌 피고인의 진술과 대통령 말씀자료, 앞 뒤 정황 등을 비춰봤을 때 수첩 내 기재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라고 말했다.

이날 재판에서 안종범 전 수석은 검찰 측의 수첩에 대한 증거수집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했지만, 이를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5일 재판에서 안종범 업무수첩의 증거능력 부여에 대한 결론이 나왔다.

재판부, 안종범 업무수첩의 직접증거 효력 인정 못해

재판부는 안종범 업무수첩이 박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 독대에서의 뇌물공여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증거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재판부는 이 수첩의 기재 내용의 진정성과 관계없이 수첩 기재가 존재한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이를 간접증거에 해당하는 ‘정황증거’ 로 참고할 자료로 활용할 뿐, 공소사실을 증명하는 진술증거로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아 큰 비중을 둘 수 없다는 의미였다.

재판부가 안종범 업무수첩에 대한 증거능력을 제한하자 ‘법원이 삼성의 편을 들고 있다’며 비난이 일고 있지만, 법조계 일각에서는 재판부의 판단이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본지의 취재에 응해준 법률단체 관계자는 “삼성 변호사들의 말대로 타인의 말을 듣고 남긴 전문증거는 판례에서도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안종범 수첩의 경우에는 자신이 독대 자리에 배석해 두 사람 간 오고간 내용을 직접 듣고 기재한 것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 나중에 전해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라며 “만약 재판의 피고인이 박근혜 대통령이라면 그가 직접 말한 내용을 적어 넣었기 때문에 증거로 효력이 있을지 몰라도 피고인이 이재용이라면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라고 설명했다.

해당 업무수첩이 직접증거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수첩에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아닌’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말한 내용을 기재하거나, 이 부회장이 수첩에 자신이 해당 발언을 한 뒤 서명 등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표식을 남겼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법률단체 관계자는 “최근 최순실 재판에서 박헌영 과장의 업무수첩이 증거로 채택된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그 업무수첩에는 최순실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 적혀있거나 심지어 최순실이 자필로 적은 내용도 나와 있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결정적 증거로 활용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의 내용 기재 방식 대부분이 ‘문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 단어가 분리돼 나열된 반면, 박헌영 전 K스포츠재단 과장의 업무수첩이 문장 형식으로 구체적으로 기재돼 있기 때문에 재판부가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안종범 전 수석은 이틀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 자신이 남긴 업무수첩의 내용을 보며 특검 및 변호인 측의 신문에 자신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지시를 받고 해당 내용을 수첩에 기재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식별 불가능한 글씨에 대해서도 모른다고 답했다.

특히 ‘안종범 업무수첩의 신빙성은 증인신문 과정을 통해 충분히 나올 것’이라는 특검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정황이 다수 발견됐다.

이는 2015년 7월 25일 소위 3차 독대 시기 수첩에 적힌 ‘재단’이라는 단어에서도 볼 수 있었다. 특검 측은 이를 통해 이재용 부회장이 독대 때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미르재단 자금 출연을 요구를 받았다고 보고 있다.

안 전 수석은 당시에 실제로 대통령이 독대가 끝난 뒤 자신에게 재단이라는 말을 해서 수첩에 적은 것이 분명하고, 독대 시 말씀참고자료에도 재단관련 내용을 넣었기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이 재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삼성 측 변호인은 “피고인은 독대 당시 문화체육 융성을 위해 삼성에서 적극 지원해 달라고 했을 뿐 구체적으로 재단이나 재단설립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반박했다.

심지어 박근혜 전 대통령도 검찰에서 독대 당시 이재용 부회장에게 재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날 법정에서 공개된 박 전 대통령의 검찰 진술조서 내용에 따르면, “2015년 7월 총수들에게 재단을 언급한 기억은 없고 다만 문화 체육 분야 지원에 대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한 기억은 있습니다. 이는 이재용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시 개별면담을 한 기업 총수들에게 공통적으로 말했던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같은 시기 박 전 대통령을 독대한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구본무 LG 회장 등 7명의 대기업 총수 모두 검찰 조사 등에서 재단 관련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 독대 관련자 중 안 전 수석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물들의 진술이 일관되고 있었다. 때문에 설령 안 전 수석이 기억과 판단이 맞고 이재용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이 말을 맞춰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라도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면 업무수첩에 기재된 ‘재단’이라는 글자와 안 전 수석의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또 안 전 수석이 수첩에 기재된 내용에 대해 특검에서 ‘유추’해 진술한 부분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업무수첩 2016년 2월 15일자 대통령 지시사항 중 ‘빙상’과 ‘승마’라고 적힌 내용의 의미에 대해 안 전 수석은 특검에서 “대통령께서 이재용 부회장에게 빙상과 승마 지원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날 재판에서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해당 지시를 하면서 동계스포츠영재센터나 최순실, 장시호, 정유라 등의 이름을 언급한 적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안 전 수석은 단지 이를 “특검 조사에서 유추해서 한 말”이라고 선을 그었다.

무력화된 안종범 수첩… 이재용 승리로 기우나

특검 측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삼성 측으로 기울어져만 가는 재판의 흐름을 뒤집을 ‘최후의 보루’를 안종범 업무수첩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이 공소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것이 두 차례의 독대 외에는 없었고, 둘만이 알 수 있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가 안종범 업무수첩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재판에서 재판부가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간접증거로 제한하며, 향후 특검의 삼성 측 피고인들에 대한 혐의 입증이 더욱 난관에 부딪힐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물론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에 나온 내용이 사실을 토대로 작성된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성 측에서 수첩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고, 만약 실제로 안종범 수첩에서 핵심 쟁점으로 다뤄질 내용이 안 전 수석의 착오 등으로 오류가 포함됐다면 이 역시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때문에 안종범 수첩을 직접증거로 채택하지 않은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 비난을 할 수 있겠지만, 향후 재판부가 이 수첩의 내용으로 인해 잘못된 판결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남아있는 이상 이번 결정에 문제가 없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삼성 측은 안종범 수첩의 직접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으며 한 시름 놓은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특검 측의 혐의입증을 위한 증거와 주장을 반박해 나가는 동시에 안종범 수첩마저 사실상 ‘무력화’시키며 재판의 승기를 잡았다는 설명이다.

증인신문이 끝난 뒤 이뤄진 증거조사에서 삼성 측 변호인은 “수첩에 나온 삼성 관련 내용은 대통령이 피고인 이재용과 뇌물수수에 합의했거나 부정 청탁을 받았다는 흔적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특검은 “뇌물 수수자와 공여자가 동시에 혐의를 부인할 경우, 간접증거가 활용될 수 있는 것처럼 이번 사건도 간접증거를 통해 공소사실이 확인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한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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