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모르게 수년간 ‘껍데기’ 노사협의회 운영…근참법 위반 의혹

진정 접수 후 노동부 조사 들어가자 부랴부랴 새 노사협의회 구성 착수

법적 효력 없는 ‘복종 서약서’ 작성 요구 논란

국가인권위 관계자 “인권 침해 소지 있다”

매표 창구 폐쇄, 무인주차장 확대 등 일방적인 인력 감축 시도로 논란을 빚은 코레일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본지 취재 결과, 코레일네트웍스는 수년간 비정상적으로 노사협의회를 진행하면서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이하 근참법)을 위반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코레일네트웍스 측은 근로자가 참여해야 하는 노사협의회를 근로자 측에 알리지 않고 임의로 진행해왔으며 근로자가 선출해야 하는 근로자대표를 사측이 선출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코레일네트웍스는 노동부에 이 같은 내용이 진정 접수되자 새로운 노사협의회 구성에 착수한 상태다. 사실상 근참법 위반을 인정한 셈이다. 코레일네트웍스는 이른바 ‘복종 서약서’ 작성 논란에도 휩싸였다. 회사의 지시에 불평 없이 순응해야 하고 회사에 손해를 끼칠 경우 손해액을 전액 배상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서약서를 입사 대상자들에게 작성할 것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서약서가 법적 효력이 없다는 점에서 사용자의 과도한 갑질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본지 취재 결과, 서약서의 내용에 인권 침해 요소가 있다는 해석도 나와 논란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진정인 측 “근참법 다수 조항 위반” 

진정을 제기한 민주노총 전국철도노동조합 서재유 코레일네트웍스지부장은 “사측에서 근참법을 전반적으로 위반했다”며 지난 6월 노동부에 조사와 시정조치를 요청했다. 서 지부장이 제기한 사측의 근참법 위반 사항은 ▲근로자와 사용자 쌍방이 참여와 협력을 통해 노사 공동의 이익을 증진한다는 목적 위반(제1조) ▲근로자를 대표하는 위원을 근로자가 선출하지 않음(제6조) ▲사측에서 근로자위원으로 관리자를 선발(제10조) 등 총 3가지다.

서 지부장은 “그동안 노사협의회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사측도 알리지 않았다. 사측은 이를 악용해 노동자들이 근참법에 따라 근로자위원을 선출한 적이 없음에도 노사협의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며 “근로자들이 선거를 통해 뽑아야 할 근로자위원에 관리자를 참여시킨 정황이 있다. 사측은 노사협의회 구성원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사측이 근참법을 준수하지 않고 노사협의회를 구성해 사측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도모했다”며 “이는 근참법의 취지를 무력화하고 노동권을 제한한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노조와는 다른 노사협의회

노사협의회는 근참법에 의해 근로조건 결정권이 있는 상시 30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 단위로 설치해야 한다. 사측과 단체협상을 하는 노동조합과는 제도적 취지와 활동 목적이 다르다. 노조는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근로조건 유지·개선과 근로자의 사회적·경제적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반면 노사협의회는 근로자와 사용자 쌍방이 이해와 협조를 통해 노사공동의 이익을 증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다만 노조가 사측과 진행하는 단체협상에 비해 노사협의회를 통해 의결할 수 있는 사항의 범위가 좁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노사협의회를 통해 근로자는 사측의 경영계획이나 실적, 인력계획 등을 보고받을 수 있다. 또한 근로자위원을 통해 사측의 경영 상황 등의 자료 제출을 요구하거나 근로자의 요구사항을 설명할 수 있다.

노사협의회 구성은 근로자와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들을 3명~10명 사이에서 동수로 선출한다. 근로자위원은 근로자들이 선거를 통한 선출을 기본으로 하고 사용자위원은 사측에서 위촉한다.

회사가 근로자위원 구성 의혹

코레일네트웍스는 2015년 7월 이후 공공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 알리오에 분기마다 노사협의회 의결사항을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단체협약정보 항목에는 현재 가입돼 있는 한국철도산업노동조합 코레일네트웍스지부 및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의 ‘노사협의회 합의사항’란이 비어 있다. 공개한 노사협의회 회의록에는 합의내용과 합의일만 나와 있을 뿐 회의 장소, 출석 위원 등의 정보는 없다. 근참법 제19조에는 협의회 개최일시 및 장소, 출석 위원, 협의 내용 및 의결 사항 등을 기록한 회의록을 작성하도록 되어 있다. 사측에 의해 노사협의회가 임의로 진행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진정을 제기한 측에 따르면 노동부 서울서부지청에서 조사가 들어가자 사측은 “근로자위원 일부는 사측에서 지명하고 일부는 선출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는 사측이 근참법에 대해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근로자위원은 사측이 아닌 근로자가 선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측이 주장한 근로자위원 ‘선출’ 과정도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출은 선거를 통해 이뤄지지만 선거를 실시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진정인 측도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근로자위원 선거가 이뤄진 적 없다”고 주장한다.

소모품 구입 합의에 쓰인 노사협의회

코레일네트웍스는 최근 여러 논란을 야기시켰다. 지난 5월 서울역을 비롯한 경부선 10개 역과 청량리역 등 11개 역에 “내년 3월까지 현재 총 64개인 매표 창구를 역별로 하나씩 11곳으로 축소한다”는 문서를 각 역의 관리자에게만 보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들 매표 창구에는 약 200여명의 무기계약직·기간제 직원이 근무 중이다. 코레일네트웍스 측은 “검토 수준”이라며 “역내 안내 업무 등으로 전환 배치 등을 고려 중”이라고 해명했지만 전환배치에 따르면 재교육 계획은 준비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지난해 초부터 ‘철도주차장 무인화 주차시스템 구축’ 사업을 진행하면서 비정규직 정산원들의 일자리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기준 259명에 달하는 주차사업처 인력은 올해 안으로 109명까지 대폭 줄어들 예정이다.

이러한 사측의 일방통행식 사업 진행에는 비정상적인 노사협의회 운영이 큰 몫을 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근참법 제20조 협의사항에는 ‘경영상 또는 기술상의 사정으로 인한 인력의 배치전환·재훈련·해고 등 고용조정의 일반원칙’, ‘근로자의 채용·배치 및 교육훈련’ 등을 의제로 협의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공개된 노사협의회 합의사항에서 최근 불거진 인력감축 등과 관련된 의제는 확인할 수 없다. 대신 블라인드 설치, 체육행사 정례화, 소모품 구입 요청, 외투 지급 건의 등 근로자 복지증진과 관련된 사항들을 합의했다고 나와 있다.

서 지부장은 “사측과 가까운 위원들로 구성되어 있는 노사협의회에서 사측에 부담스러운 구조조정과 같은 의제를 논의했겠나”라며 “노사협의회가 실제 개최됐는지도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뒤늦게 새 노사협의회 구성에 들어간 코레일네트웍스

노동부 서울서부지청의 조사가 시작되자 코레일네트웍스는 새 노사협의회를 꾸리기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근로자위원 선출을 위한 선거관리위원회 구성에 나섰기 때문이다. 서 지부장은 “기존의 노사협의회 구성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진정을 접수한 고용노동부 서울서부지청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검토해서 조사 중”이라면서 “조사가 마무리되면 시정 명령 등의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법적 효력 없는 복종 서약서 강요해

한편, 코레일네트웍스가 사실상 복종에 가까운 서약서를 요구해왔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본지가 입수한 ‘선서(서약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신의성실의무를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작성자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서약서에는 ‘회사의 인사 명령에 대해 불평함 없이 순응하겠다’, ‘수습기간 중 … 회사에서 퇴사를 권고할 경우 즉시 퇴사하겠다’,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경우 … 해당 손해액을 지체 없이 전액 배상하겠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서약서에 대해 전문가들은 “법적 효력이 없는 서약서”라고 지적했다. 노무법인 노사의 최미숙 노무사는 “사용자의 권한을 인정하라는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이라고 밝혔다. 최 노무사는 “‘순응한다’는 전근대적인 표현을 써서 입사예정자들을 정신적으로 위축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회 초년생의 경우 더 큰 압박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의 인사 명령에 불평함 없이 순응하겠다’는 조항에 대해서 최 노무사는 “인사권은 사용자의 상당한 재량으로 인정한다”면서도 “정당한 인사권 행사 여부는 회사의 업무상 필요성, 인사 이동에 따른 근로자의 생활상 불이익과 비교형량, 근로자의 협조 등 신의칙상 요구되는 절차를 거쳤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노무사는 특히 ‘전액 손해 배상’에 대해 “근로자가 일하는 범위 내에서는 사용자의 관리 책임이 전제되어 있다”며 “업무상 회사에 장애와 손해를 끼친 경우에도 근로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노동법 전문가는 기자와 통화에서 “법적인 효력이 인정될 수 없는 조항”이라며 “업무 지시가 불합리하면 순응하지 않을 수 있고, 인사 이동 등 회사의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항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손해배상에 대해서는 이 전문가는 “근로계약상 손해 배상 비율을 정해 계약을 맺는다면 그 자체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한 “실제로 이런 서약서를 빌미로 사측이 근로자에게 지시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면서 “그러나 이 문서에 서명을 했다고 해도 사측은 지시를 강요할 수 없다. 또한 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불이익을 준다고 하면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 “인권 침해 요소 있다”

국가인권위도 비슷한 의견이다. 국가인권위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심의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수습기간 중 회사에서 퇴사를 권고할 경우 즉시 퇴사’라든지 ‘손해배상 전액 배상’ 등의 문구는 문제의 소지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헌법상 행복추구권, 양심상의 자유 등의 침해 소지도 덧붙였다. 국가인권위는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검찰, 경찰 등 공공기관의 업무 수행과 관련해 인권을 침해당한 경우 조사·구제하는 기관이다. 코레일네트웍스는 국토교통부 산하 기타공공기관이다.

국가인권위 관계자는 “해당 기업이 조사 대상에 속하고 관련 내용도 조사 범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서약서 작성을 요구받은 근로자가 국가인권위에 민원·진정 신청을 하게 되면 조사에 들어갈 수 있다“고 답했다. 국가인권위는 인권 침해나 차별행위가 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그 내용이 중대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진정이 제기되지 않더라도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최근에 논란이 된 적 있다. 올 1월 전주 LG유플러스 고객센터 상담원으로 일하던 특성화고의 한 현장실습생이 실적 압박과 실적 부진에 따른 페널티, 성희롱, 언어폭력 등 업무 부담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진상을 파헤치자 서약서 문제도 불거졌다. 산업체 파견 현장실습을 나가는 모든 특성화고·마이스터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실습 전 반드시 서약서를 작성해 학교 측에 제출해야 한다. 이에 대한 비판이 지속되자 시도교육청은 기존 서약서를 개정했지만 ‘파견 근무 회사 사규 엄수’, ‘근무 장소 무단이탈 금지’, ‘현장실습에 성실히 임할 것’ 등의 내용은 그대로 포함됐다.

이에 서울시교육청 학생인권위원회(학생인권위)는 지난 22일 “서약서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16조가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와 제28조에서 보장하는 근로 학생의 특성에 따라 요청되는 권리를 적정하게 보장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며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특성화고·마이스터고 현장실습 서약서 작성 중단 권고안’을 권고했다.

학생인권위는 서약서 작성을 강제하는 행위 자체가 행복추구권을 명시한 헌법 10조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19조를 침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앞서 LG유플러스 고객센터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사망사건 대책회의(현장실습대책회의)는 지난 5월23일 현장실습 서약서 작성 중단 관련 진정 서류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했다.

코레일네트웍스가 근로자들에게 요구한 서약서는 특성화고·마이스터고 현장실습 서약서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이다. 최미숙 노무사는 “고교실습생과 성인이라는 차이점만 있을 뿐 사측의 지시에 일방적으로 따르라는 측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며 “무의미한 서약서를 통해 직원들의 근로 의욕을 저해시키고 일종의 군기를 잡으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본지는 근참법 위반 의혹과 서약서 관련 코레일네트웍스의 입장을 듣고자 접촉했으나 "관련 부서에서 답변을 작성하고 있다"고만 밝혀왔다.

허인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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