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상과대학 58학번 ‘60년 발자취’ 기념문집 발간

●유년시절엔 일제강점기, 광복, 한국전쟁 겪고 ●대학·청년시절에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유신독재 맞서 ●중년엔 산업 발전의 역군으로 활약··· 외환위기 겪기도

●이규성 ·사공일 ·서영택 등 장관만 5명 · · · 박찬종 정치인도 ●민창기 ·신동혁 ·위성복 등 금융계 핵심 인물 60여 명 배출 ●김병주, 류동길 등 학계로 진출한 교수도 14명이나 돼

서울대 상과대학 58학번(상대 16회)의 동창 모임 ‘58회’가 기념문집을 냈다. 1958년 입학부터 60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들이 걸어온 길은 한국 근현대사 그 자체였다. 그들은 광복 후 학교에 입학한 세대 중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최초의 학생들이었고, 12살의 나이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대학3년 땐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4.19 혁명을 겪었으며 군 입대 및 전역, 졸업을 앞둘 시기 즈음엔 5.16 군사혁명을 겪은 세대다. 기념문집을 편집하고 출판한 총책임자 백기덕 총무는 “60년 간 우리가 살아온 발자취를 모았다”며 “우리가 산 세월이 바로 역사가 되었기에 기록을 남겨 작은 동네 도서관에 비치되어 후손들이 꿈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대 상대 58회_입학60주년 기념문집 '함께 한 60년 삶의 발자취'. '58회' 제공

동창회에 쌓여 있던 신문

기념문집을 위해 ‘58회’ 동창실에 방문한 백 총무는 한쪽에 쌓여있는 신문을 발견했다. 그는 58회 동기들이 담긴 기사들을 수두룩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백 총무는 “동기들이 신문에 나면 모아뒀던 것이 문집을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줬다”며 “신문을 뒤져보니 죽은 친구들이 열댓 명은 더 있었는데 얼마나 짠하던지 그분들도 다 실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58회’ 동기들은 어린 시절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경험했다. 젊은 시절엔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몸소 겪었다. 백 총무는 한국전쟁 당시 일화를 떠올렸다. 그는 광복직전 이남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려던 때 38선에 막혀 돌아가지 못했다. 백 총무는 “그렇게 지방에 정착해 살다가 한국전쟁이 터졌다.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인민군이 찾아왔다. 내 삼촌이었다. 이북에서 내려올 때 00에 형이 살고 있으니 가서 찾아보라고 했다는 거다. 그렇게 삼촌은 우리 아버지를 붙잡고 우셨다”며 “그 후엔 소식이 끊겼고, 그 후엔 반공포로로 2명이 풀려나 친척으로서는 그렇게 3명을 본 것 외엔 없다. 외가 쪽은 본 사람도 없다”고 회상했다.

조국 근대화와 한국경제발전을 이끈 '58회' 동기회

대학시절 겪은 ‘4.19’, ‘5.16’

58회 동기들은 3학년 때 4.19, 4학년 때 5.16을 겪으며 격동의 60년대를 보냈다. 4.19를 맞은 그날 상과대 시위대는 3학년이던 58동기들이 주축이 됐다. 모두 가방은 도서관에 두고 정릉천을 따라 용두동에 있던 서울사대를 지나 광화문까지 내달렸다. 당시 청와대가 아닌 창경원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에서 격렬한 민주화 시위를 한 이들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희생자 중엔 58동기인 안승준 학생도 있었다. 당시 문학모 학생은 지프차에 올라타 태극기를 흔들며 데모에 유난히 앞장선 사람이었다.

백 총무는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안승준은 청와대 쪽으로 가서 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4월 20일에 그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서울대 병원을 가니까 시체들이 쫙 있었다”며 “안승준을 찾아 돌아다니는데 하얀 여자 다리가 나와 있는 것을 봤다. 그 아가씨가 서울미술대학의 고미순이라는 학생이었다. 총에 맞아 죽은 시체를 처음 본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돌이켰다. 백 총무는 나중에 찾아보니 안승준의 묘가 고미순 묘와 나란히 있었다고 돌이켰다.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

유신독재·군사정권에 맞선 민주화 열망

백 총무는 5.16 군사쿠데타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는 군대에 입소하게 됐는데,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논산에 도착하고 나니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민주화 열기가 굉장했다. 전부다 데모하고. 군대 다녀와서는 졸업반이어서 취직 시험도 공부도 해야지, 데모도 해야지, 그런 상황이었다”며 “서로 고발한다고 하니 친구들끼리 말도 조심해야 했다. 민주화 운동 때문에 대학 4년 간 그런 생활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1950-60년대 한국사회는 한국전쟁이후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정신과 사회체제의 정착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한 격동의 시대였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열기가 끝없이 분출되던 시기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자유민주주의의 바람이 불어오나 했지만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 12.12사태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의 찬바람도 견뎌내야 했다.

박찬종 변호사

경제산업 분야 부흥 이끈 58회

‘58회’는 산업의 역군으로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세대라고 자부한다. 실제로 ‘58회’는 금융계 핵심 인물로만 60여 명을 배출했다. 금융계의 중요한 간부 자리에서 산업과 금융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자부하는 이유다. 은행의 임원은 20여 명을 배출했는데 은행장에 오른 동문은 4명(민창기, 신동혁, 위성복, 홍성주)이다. 또한 제2금융권회사의 사장만도 16명에 이른다. 백 총무도 이중에 한 명이다. 그 외에도 증권계에 진출한 박창배는 증권거래소 이사장을 지냈고 이진우, 정인직, 하진오 등 3명은 증권회사 사장을 역임했다.

백 총무는 “장관급도 5명이나 나왔는데 금융계, 실업계 임원과 사장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우리 58회가 산업역군으로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58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이규성 전 장관이다. 그는 1988~1990년엔 제33대 재무부 장관을 지냈고, 1998~1999년엔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다. 사공일 전 장관은 이규성에 앞서 재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대통령실 경제특별보좌관, 제27대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보내는 등 굵직굵직한 이력을 보냈다.

서영택은 국세청장을 거쳐 건설부장관, 최수병은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냈다. 검사로 활동한 박찬종은 국회에 진출해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밖에도 서강대 교수로 활동하는 김병주, 4.19에 앞장섰던 문학모, 경제수석 출신 박영철은 금융통화위원을 지냈다. 특히 박영철은 청와대 경제수석을 맡기도 했다.

백 총무는 “당시 정부 요직이나 금융계 임원은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 차지했는데 이규성은 대전출신인데도 명석해서 장관급 직을 두 번이나 수행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재계에서도 대우건설, 대우실업 등에서 회장, 부회장을 맡는 등 실업계, 금융계에서 영향력을 크게 발휘했다”고 말했다. 기업의 CEO로 활약한 동문은 15명이며 언론계에서는 손광식이 문화일보 사장을 지냈다.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

학계에도 ‘58회’ 김병주, 류동길 교수

학계로 진출한 교수는 14명이다. 백 총무는 “아직까지 학계에서도 류동길, 김병주, 박영철 등은 학계의 큰 별로 대접받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의 토대로 한국전쟁을 꼽는다. 그는 한국전쟁 휴전 이후인 50년 대를 생략하고 곧바로 60년대로 넘어갔다면 그 이후의 경제성장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광복 후 민생의 안정, 전쟁피해의 복구, 고도성장의 준비가 ‘50년대의 공헌’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 언론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날린 인물이다. 그는 ‘펜과 칼이 서로 견제해 제법 잘 어울리는 대립을 보이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라고 봤다. 이를 위해선 권력기관의 도량은 물론 언론기관의 자질도 전제돼야 한다는 분석이다. 권력자가 권력에 취해 좋은 말을 거부하는 독선에 빠진다면 언론의 펜은 부러질 수 있다는 뜻이며, 언론기관은 권력자의 하수인이 되기를 자청한다면 비뚤어지고 무딘 펜으로 정론을 펴기 어렵게 된다는 뜻이다.

외환은행 명예은행장을 지낸 류동길 숭실대 교수는 문집에서 ‘돈, 돈...’ 하는 세상에서 행복 찾기라는 에세이를 남겼다. 에세이에서 류 교수는 “돈, 돈 하는 세상이지만 돈을 자랑할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가난을 미화할 일도 아니다. 약간 쪼들리며 살더라도 그 속에 행복은 깃든다”며 “나의 행복이 남의 눈과 남의 평가를 통해 결정될 일인가.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우리의 행복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라고 썼다.

그는 은퇴고별강의에서 ‘내가 밥은 살 수 있다’라는 뜻으로 “나 돈 좀 있다”는 말을 내뱉었다며 후회했다. 실제론 그렇지 않은데 그 일이 있은 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상당한 재산가로 짐작했다는 일화다. 그는 ‘빚지지 않고 버티며 자식들 키웠으면 큰돈 번 셈 아닌가’라는 생각에 내뱉은 말이었다. 에세이에서 “돈 없는 사람은 돈만 있으면 아쉬운 것도 부러운 것도 없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돈 많은 사람도 그렇고 그렇게 살고 또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

역사 속에서 ‘정의’를 배워

백기덕 총무는 얼마 전 자신이 몸담았던 외환은행의 은퇴자들과 함께 한탄강 쪽의 노동청사를 방문했다. 노동당청사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아직 나라가 통일도 안됐다는 사실 때문에 나라를 잃은 상실감을 느꼈다”며 “내가 몸담았던 외환은행도 나라가 어려워지면서 사라졌고, 인생을 돌아보니 한 평생 그런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그에겐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정의롭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외환위기 후 지역 저축은행 사장에 오른 그는 지역 조폭들의 부당한 횡포와 맞선 일화를 꺼냈다. 조폭 세력은 지역 저축은행을 손에 넣기 위해 부당한 거래와 로비를 펼치려 했던 사건이다. 백 총무는 “온갖 공갈위협에도 법대로 처리했고 결국 20여 명이 형무소로 갔다”며 “정의감에 대한 강한 집념이 있었다”고 말했다.

아직도 그는 5.16 군사쿠데타, 유신독재, 군사정권에 등에 대해 ‘정의롭지 못한 역사’라고 강조한다. 그는 기자에게 “역사엔 무엇이든 공, 과가 있겠지만 무력으로 권력을 잡고 민주주의를 탄압한 역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격동의 역사를 몸소 겪은 세대의 강렬한 물음이었다. ‘근현대사의 발자취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 달라’는 깊은 울림이 아닐까. 776페이지에 달하는 ‘58회’의 기록문집이 가치 있는 까닭이다.

천현빈 기자



천현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