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공무원 합격 급증한 반면 일반수험생은 대거 과락…우연일까?

지난 8일 서울 여의도에서 제58회 세무사 전문자격시험의 불합격 불복 의사를 밝힌 트럭 시위가 열리고 있다. (사진=이재형 기자)
[주간한국 이재형 기자] 지난 9월 4일 치러진 제58회 세무사 전문자격시험이 공정성 시비에 걸려 유례없는 ‘수험생 불합격 집단 불복’ 사태로 번지고 있다. 세무사 시험에 앞서 공무원들만 보는 시험에서 똑같은 문제가 출제돼 ‘유출 논란’이 제기된 데다 정작 고연차 세무공무원들은 면제받는 과목은 일반 수험생들이 80% 이상 과락률을 기록하면서 대거 낙방한 탓이다.
결국 일반 수험생의 자리를 공무원들이 대거 꿰찬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런 상황에서 <주간한국> 취재결과 올해 시험의 수석합격자 역시 면제 혜택을 받은 공무원 출신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세무사 시험이 공무원 노후 시험이냐”며 반발하는 등 분노하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결국 정치권까지 가세해 시험을 주관한 한국산업인력공단(산인공) 측에 모범답안, 채점 근거 등 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공단은 ‘시험제도의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며 공개를 거부했다. 결국 수험생들이 집단적으로 세무사 시험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공단과의 소송전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2차 시험 앞둔 공무원 내부 시험서 동일 문제 출제…유출 의혹 커져
<주간한국>은 올해 치러진 세무공무원 대상 자격시험과 세무사 2차 시험의 시험지를 대조해본 결과 1개 문항이 서로 ‘판박이’ 수준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8월 15일 시행한 ‘회계실무능력 검정시험 2급’(이하 ‘검정시험’)의 ‘재무회계’ 과목 중 ‘문제 2번-사례2’ 문항과 지난 9월 4일 세무사 2차 시험의 ‘회계학 1부’ 과목 중 ‘1번’ 문항 일부가 일치했던 것이다.
두 문제 모두 주식회사끼리 동일한 유형의 자산을 교환할 경우 취득원가와 처분손익이 얼마인지 구하는 주관식 계산형 문제다. 자산의 가격은 표에 금액을 기입해 표시했다.(사진 참조)
제42회 회계실무능력 검정시험 2급 재무회계 과목 ‘문제 2번-사례2’ 문항. (사진=기출 문제 화면 캡처)
제58회 세무사 2차 시험 회계학 1부 과목 ‘1번’ 문항. (사진=기출 문제 화면 캡처)
(제42회 회계실무능력 검정시험 2급 재무회계 과목 ‘문제 2번-사례2’ 문항) ▲㈜국세와 ㈜제주는 각각 소유하고 있던 기계장치를 교환하는 거래를 했다. ▲해당 교환거래는 상업적 실질이 있다. ▲㈜국세가 소유한 기계장치의 공정가치가 ㈜제주의 기계장치 공정가치보다 더 명백하며 신뢰성 있게 추정된다. ▲상기한 교환거래와 관련해 ㈜제주는 ㈜국세에 50만 원을 현금으로 지급했다. ▲㈜국세의 기계장치 취득원가와 ㈜제주의 기계장치 처분손익을 구하라.
(제58회 세무사 2차 시험 회계학 1부 과목 ‘1번’ 문항 中) ▲㈜세무는 자사 소유 건물을 ㈜국세의 건물과 교환했다. ▲동 교환거래는 상업적 실질이 있다. ▲㈜세무의 건물 공정가치가 ㈜국세의 건물공정가치보다 더 명백하다. ▲㈜세무는 ㈜국세로부터 공정가치 차이 40만 원을 현금수취했다. ▲㈜세무의 취득원가와 처분손익, ㈜국세의 취득원가와 처분손익을 구하라.
두 문제 지문을 뜯어보면 자산이 ‘기계’와 ‘건물’인 점과 각 자산가격의 숫자 정도가 다를 뿐 자료가 주어진 형태와 출제내용(현금지급이 있는 교환거래), 문제의 물음(취득원가와 처분손익) 등 내용은 일치했다. 이처럼 일부 일치한 문항에는 총 30점(100점 만점)이 배정됐다. 세무사 시험은 과목당 과락 기준이 40점인 점을 감안하면 이 문제만 온전히 맞춰도 회계학1부 과락은 거의 면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높다.
검정시험은 세무사 2차에 불과 20일 전에 치러졌다. 검정시험에 응시한 공무원은 세무사 시험의 똑같은 문제를 미리 풀어볼 수 있었던 셈이다. 검정시험은 국세공무원교육원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현직 공무원만 응시하거나 기출문제를 조회할 수 있어 일반 수험생은 접근이 불가능한 자료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수험생 일각에서 세무사 시험의 ‘문제 유출’ 의혹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물론 공무원 응시자들이 사전에 언질받지 않았다면 문제 내용이 일치했다는 사실만으로 ‘유출’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유출 의혹이 힘을 받는 것은 불과 2년 전에도 똑같은 문제 유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세무사 2차 시험에선 회계학1부 ‘1번’, ‘2번’ 문제가 그해 검정시험 ‘3번’, ‘4번’ 문제와 겹친다는 사실이 언론보도 등을 통해 지적됐다. 논란이 불거지자 국세청이 직접 해온 세무사 시험 감독 업무를 산인공으로 위탁하는 등 조치했지만 올해 폐단이 재발한 것이다.
회계학1부는 시험범위에 원가회계와 재무회계가 포함돼 공직 업무와 수험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공무원 응시자에게 가장 까다로운 영역 중 하나였다. 그런데 올해 응시자 대다수가 고득점을 받으면서 지난해 39.49점 이었던 평균점수가 65.36점으로 껑충 뛰어올라갔다. 회계학1부의 과락률 역시 지난해 51.41%에서 올해 14.60%로 뚝 떨어졌다.
세무공무원 출신 합격자 비중 평균 3%에서 21%로 급증
이처럼 문제 유출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공무원 출신 응시생들은 면제받는 과목에서 열에 여덟은 과락을 당할 정도로 난도가 높아 일반 수험생들이 대거 탈락하면서 불공정 논란이 불거졌다.
세무사 2차 시험은 회계학 1·2부와 세법학 1·2부의 총 4개 과목으로 구성된다. 일반 수험생은 4개 과목을 모두 응시해야 하지만 20년 이상 경력의 세무공무원 출신 응시자는 세법학 1·2부 시험을 면제받아 회계학 1·2부만 잘 보면 세무사가 될 수 있다. 특혜지만 그동안 세무공무원 출신이 전체 합격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 3.05%에 불과해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런데 올해 시험에서 ‘세법학 1부’ 과목의 난도가 크게 높아지면서 일반 수험생은 낙방하고 면제자들이 대거 합격하면서 일반 수험생에게 지나치게 불리하게 출제됐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지난 2016~2020년 5년간 세법학 1부의 과락률은 평균 38.66%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과목 응시자 4597명 중 3254명이 과락(과락률 82.13%)했기 때문이다.
반면 면제자는 회계학 두 과목에서 총 91점 이상 점수를 획득하면 올해 합격자 커트라인인 평균 45.5점을 넘길 수 있었다. 결국 올해 시험은 최종합격자 706명 중 면제자는 151명(21.39%)으로 역대 최고 비중을 차지했다. 산인공은 10일 "수석합격자의 2차 시험 응시과목 수"를 묻는 <주간한국>의 질의에 "최고득점자 2차 시험 응시 과목수는 2과목"이라고 밝혔다. 세법학 1·2부를 면제 받은 공무원이 수석합격자였던 것이다.
일반 수험생 과락률 평균 38%인데 82%로 늘어 의혹 가중
수험생들은 정보공개청구와 민원 등 수단을 동원해 문제가 된 세법학 1부의 출제와 채점 기준, 모범답안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세무사 시험 응시자들로 구성된 세무사시험제도개선연대(세시연)가 2차 시험 점수를 자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성적을 밝힌 254명 중 116명이 20점 배점인 상속증여세 문제에서 0점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저조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세법학은 서술형 주관식 문제라 부분점수가 있을 법한데 단체로 백지를 냈거나 애초 엉뚱한 법조문을 적지 않은 이상 이 같은 점수는 비정상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세무사가 되기 위해 수년간 시간을 투자해온 청년들은 이처럼 드러난 총체적 졸속 채점에 배반감을 토로한다. 5년간 공부해온 수험생 A씨는 “면제자와 일반 수험생 간의 유불리가 이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쯤 되면 내가 ‘세무공무원 노후대비시험’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는 생각에 허탈감을 감출 수 없다”며 “세무공무원을 합격시키기 위해 고의로 세법학에서 수험생들을 대거 떨어트린 건 아닌지 의심이 된다”고 했다.
정치권에서도 반향을 일으키면서 국회도 팔을 걷어붙였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은 산인공에 올해 세무사 시험의 과목별 정답지, 모범답안, 채점기준표, 출제자 명단 등 자료 공개를 요청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세무사 2차 시험결과의 공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제보가 다수 들어와 관련 기관의 보고를 받아 확인해봤는데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는 이번 세무사 2차 시험 전 과정에 대한 특별감사를 실시하고 청년수험생들이 요구하는 모범답안 및 채점기준표는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치권까지 호응해 모범답안 등 출제·채점 근거를 공개하라는 요구가 쇄도하고 있지만 산인공은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 산인공은 지난 6일 김 의원의 관련 자료 제출 요구에 “일절 공개할 수 없다”며 거부 통보를 전했다. 채점기준이 공개될 경우 공정한 시험제도 운영에 지장이 있다는 취지다.
수험생 민원에도 “재검토 결과 많은 시간 준비하였을 수험자의 심정으로 모범답안과 수험자의 답안을 다시 한 번 전반적으로 재검토(채점이상유무, 배점, 합산, 전산처리 등)를 하였으나 특이사항은 없었다”고 밝혔다.
수험생 이어 국회도 자료 공개 요구...산업인력공단은 ‘버티기’ 일관
세무사 시험은 과거 국세청 산하 국세공무원교육원에서 주관할 때부터 세무공무원 출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산인공으로 운영주체가 넘어온 이후에도 문제 유출 등 논란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시험 결과를 통해 세무공무원 출신이 대거 이득을 보고 수험생들이 집단 행동에 나선 사례는 극히 이례적이다.
이번 세무사 시험 집단 불복 사태는 국가고시의 기강이 흔들리면서 ‘공정’의 가치에 민감한 청년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사례다.
결국 수험생들이 직접 법적 대응에 나섰다. 지난 9일 세시연은 불합격 취소 소송과 헌법소원 청구, 수험생들이 개별적으로 넣은 정보공개 청구가 비공개될 경우 불복 소송 등 송사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기로 결정하고 소송인단 모집을 개시했다.
관세사 시험의 경우 응시자 A씨 등 5명이 산인공을 상대로 “불합격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법원의 승소 판결을 받아낸 바 있다. 지난 2019년 열린 제36회 2차 관세사 시험에서 특정 학원의 문제가 오탈자마저 동일하게 출제됐다고 응시생들이 주장했는데 2년여 만인 지난 8월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부장판사 이종환)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번 송사가 수험생 구제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불합격 취소’ 처분을 다투는 소송이므로 승소하더라도 합격처리될 가능성도 알 수 없고 소송을 길게 끌 경우 승소하더라도 자격증 취득이 지나치게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
결국 수험생들은 거리에 나섰다. 세시연은 지난 8일 서울 여의도에서 산인공을 규탄하는 트럭 시위를 한 데 이어 오는 11일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세무사 시험 불공정채점 규탄 및 채점기준표 공개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 계획이다.
이재형 기자



이재형 기자 silentroc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