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드서커 대리인' '레인메이커' '금발이 너무해', 사회 초년병들의 성공기

[설날특집·비디오] "그대, 성공을 꿈 꾸는가"
'허드서커 대리인' '레인메이커' '금발이 너무해', 사회 초년병들의 성공기

섧고(서럽고), 설고(낯설고), 사리는(삼가는) 날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설. 설의 어원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말이 많지만 한해를 또다시 힘겹게 견뎌내야 한다는 마음에 서럽고, 처음 맞이하는 새해라 낯설고,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라 조심스럽다는 점에서 설에 대한 다양한 뜻풀이 모두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새해의 첫 날 갖게 되는 이러한 마음가짐처럼 인생에서 중차대한 첫 발을 내디딜 때도 보통 서럽고 설고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생소한 환경에 내던져져 서럽고 앞으로 닥쳐올 불안한 미래가 낯설고 몸과 마음이 바짝 긴장돼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운 신출내기, 이른바 ‘초짜’들. 유난히도 근신할 일이 많은 갑신년 새해에 유달리 근심이 많을 법한 신출내기들의 고난 역경기를 엿보는 건 어떨까?

훌라후프로 연 대박인생

우선 시간을 되돌려 1958년 미국으로 가보자. 영화 ‘허드서커 대리인’은 지방대를 졸업하고 청운의 꿈을 안고 뉴욕으로 온 주인공 노빌 번츠(팀 로빈스)의 고진감래 성공기를 다루고 있다. 취업을 하려고 해도 번번이 ‘경력자 우대’란 말에 낙담한 노빌은 허드서커사의 일용직 잡부로 취직을 한다. 오늘날로 치자면 만성적인 구직난을 견디다 못해 3D 편견을 깬 대졸자가 된 셈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60년대 미국은 2차대전 이후 출생률이 폭증한 베이비붐 시대로 대량생산-대랑소비가 본격화해 풍족한 삶을 누리던 때였다. 하지만 어느 시대고 제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인재는 있는 법. 노빌은 허드서커사의 지하 창고에서 우편물을 나르며 절치부심,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 44층의 허드서커 회의실에서 허드서커 사장이 자살을 하고 고약한 이사회 임원들은 이 기회에 주가를 폭락시켜 회사를 헐값에 사들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어리숙해 보이는 노빌이 이들의 음모에 휘말려 꼭두각시 사장으로 추대되면서 영화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사회의 바람대로 회사의 주가를 떨어뜨려야 하는 노빌 번츠.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장의 아이디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20세기 최고, 최대의 유행이라고 불리는 훌라후프였다. 노빌이 훌라후프를 발명하면서 회사의 주식은 폭등하게 되고 이사진들은 노빌을 끌어내릴 새로운 계획을 세우면서 영화는 반전을 맞는다.

이 영화의 한 가지 재미는 과장적으로 그려진 훌라후프 열풍이다. 작은 변화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전염성을 유발해냄으로써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나가는 지점을 이른바 ‘티핑 포인트’라 일컫는데, 영화는 60년대 대박상품인 훌라후푸의 ‘티핑 포인트’를 경쾌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티핑 포인트를 지날 수 있도록 소비자의 구매심리를 예측한 주인공의 범상치 않은 능력이다. 60년대 베이비 붐 시대에 아이들을 타깃으로 한 장난감이 잘 팔릴 것으로 예상했다고 하니 신출내기가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고의 자질은 무엇보다 시장을 읽는 예리한 안목이 아닐까?

사회정의를 위한 순수와 열정

하지만 돈의 흐름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 정의를 잊지 않는 순수와 열정이다. 영화 ‘레인 메이커’의 주인공 루디 베일러가 바로 구태와 악습이 팽배한 사회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신념을 지키는 초년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변호사가 의뢰인보다 많은 도시 멤피스. 변호사 시험을 앞둔 주인공 루디는 당장 일자리가 급한 탓에 지인의 소개로 한 로펌에 취직한다. 하지만 회사의 사장으로 있는 자는 배심원 매수에 탈세, 소득 은닉 혐의를 받고 있는 악덕 변호사. 또한 그가 변호사가 되어 하는 일이라고는 의뢰인이 될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소송을 강권하는 일뿐이다. 흰 것을 검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변호사와 화가뿐이라더니 정의를 상실한 변호사의 현실에 주인공은 차츰 눈을 뜨게 된다.

그러는 사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험증권을 팔고 현금을 챙긴 거대 보험회사를 상대로 한 최초의 사건을 맡게 된다. 의뢰인은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둔 어머니. 악덕한 보험회사가 보험금 지불을 거부하자 의뢰인의 아들은 제 때의 병원치료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소가 진행되는 중에 의뢰인의 아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부도덕한 보험회사는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합의금을 제시한다.

아직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하지 못한 완전 초보 변호사 루디는 의뢰인의 아들이 남긴 유언에 따라 끝까지 사건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 결국 상대 보험회사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며 피보험자의 돈을 갈취해 왔다는 사실이 점점 밝혀진다. 하지만 애써 찾은 결정적 증인의 증언이 무효화되면서 루디의 힘겨운 법정공방은 계속되는데….

영화의 제목인 ‘레인 메이커’는 인디언 전설에서 유래한 말로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늘에 제사를 올려 단비를 청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기업에서는 조직에 단비를 내리는 사람, 즉 탁월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세일즈 맨을 일컫는다. 하지만 영화 속 ‘레인 메이커’는 주인공 루디가 힘겹게 싸워나가던 부도덕한 로펌 변호사들다. 부유한 의뢰인의 소송만을 맡아하며 회사에 더러운 돈을 많이 벌어주는 변호사들이 바로 영화가 비꼬고 있는 레인 메이커인 셈이다.

못난이에서 최고 법대생으로

신출내기가 겪는 고충을 생각 없이 가볍게 풀어낸 영화도 한 편 있다. 리즈 위더스푼의 대책없는 푼수 연기가 돋보인 영화 ‘금발이 너무해’. 영화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지적 능력이 떨어질 것으로 평가받는 금발의 미녀가 자신을 차버린 남자친구를 되찾기 위해 하버드 법대에 진학해 적응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누구나 예상하듯이 의상에서부터 언행, 지적능력이 모두 하버드 법대생과는 사뭇 다른 주인공은 ‘못 생기고 지루한 사람들’만 모인다는 법대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예의 그 대책없는 성미로 꿋꿋하게 버텨나가게 되고 결국 최고의 법대생으로 재평가받게 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서론에서 결말까지 너무나 뻔한 이야기지만 이 영화에는 분명 관객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물론 대부분은 위더스푼 개인의 승리이지만 패션잡지의 가십기사 정도의 얄팍한 스토리도 때론 일상에 무료한 독자의 눈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낯선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것은 두렵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첫 발을 내딛고 싶어도 발 디딜 틈이 없어 주춤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두렵고 부담스러운 일조차 더없이 부러운 일일 것이다. 2004년은 일자리를 찾아 나선 수많은 사회 초년생들이 사회진입의 문턱에서 더 이상 좌절하지 않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진입 이후에 좌절할 일만도 한 가득이니 말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01-15 16:12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