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우승 일등공신, 정규리그·챔피언전 MVP 등극뛰어난 기량에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 캐칭 신드롬 몰고와

‘캐칭천하.’ 8일 춘천 우리은행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2006 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를 요약한 말이다.

이번 겨울리그는 우리은행 포워드 타미카 캐칭(27ㆍ186㎝)의 독무대였다.

1라운드만 해도 꼴찌에 처졌던 우리은행은 캐칭이 합류한 2라운드부터 12연승을 달렸고, 결국 정규리그 우승에 이어 챔피언 결정전 우승까지 거머쥐며 통산 4번째 챔피언에 등극했다.

캐칭은 외국인 선수 최초로 정규리그 MVP에 오른 데 이어 만장일치로 챔피언 결정전 MVP에 선정됐다. 외국인선수상과 베스트5 상에 블록상과 스틸상까지 휩쓸었다.

1월 미국프로농구(NBA) 올스타전에 참가했을 만큼 미국여자프로농구(WNBA)에서도 스타급 선수인 캐칭은 탁월한 기량 뿐 아니라 성실한 태도와 겸손함까지 갖춰 겨울 코트에 뜨거운 ‘캐칭 신드롬’을 몰고왔다.

▲ '우승청부사' 혹은 '귀염둥이'

캐칭의 공식 별명은 ‘우승 청부사’다. 뛰었다 하면 우승을 이끈다는 뜻에서다. 2003년 1월 처음 한국 무대에 데뷔한 캐칭은 우리은행의 2003년 겨울리그와 2003년 여름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2년4개월여 만에 컴백한 2006 겨울리그서 또다시 우승, 별명을 확인했다.

시즌 초반 팀 성적이 부진했지만 박명수 우리은행 감독은 캐칭이 오면 달라질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고, 정말 그 말은 현실이 됐다. 박 감독은 캐칭이 팀 전력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라고 평가한다. 공격만 잘하는 게 아니라 수비도 열심이고, 무엇보다 팀내 활력소도 되기 때문.

파워를 바탕으로 한 저돌적인 골밑 돌파와 외곽슛 능력을 동시에 갖춘 캐칭은 남자라 해도 믿을 정도의 근육과 테크닉을 갖춰 ‘성별 검사를 해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특히, 코트에 수없이 몸을 던질 만큼 강한 승부 근성과 공에 대한 높은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박 감독이 국내 선수들이 캐칭을 보고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금호생명의 김태일 감독은 “캐칭 정도의 용병은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캐칭처럼 허슬플레이에 팀플레이까지 하는 용병을 구하기는 어렵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우리은행의 주장인 김영옥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경기 때마다 엉덩이와 허벅지에 미식축구 선수 처럼 보호대를 차고 나가요. 코트 바닥에 몸을 던질 작정을 하고 나서는 거죠. 농구 시작하고 그런 선수 처음 봤다니까요. 그러니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정작 캐칭은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을 싫어한다. 자신 혼자의 힘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는 인터뷰 때마다 승리의 공을 동료들에게 돌리고, 상금을 받으면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한 턱을 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캐칭이 좋아하는 별명은 팀 동료들이 불러주는 ‘귀염둥이’. 환한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인 캐칭은 애교덩어리다.

동료들에게 일일이 애칭을 지어주고, 감독에게도 먼저 장난을 걸 정도다. 훈련이 힘들다 싶으면 선수들을 대표해 박 감독에게 가서 갖은 애교를 떤다. 호랑이 선생님도 캐칭이 서툰 한국말로 ‘사랑한다’고 말하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 운명 같은 우연에 이끌려 한국으로

한국서 뛴 3시즌 모두 우리은행에 우승 트로피를 안긴 ‘복덩이’ 캐칭의 영입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우리은행은 2003년 겨울리그를 앞두고 이미 다른 용병과 계약을 마쳤지만 첫 눈에 반해버린 박명수 감독이 극적으로 영입을 성사시킨 것.

박 감독이 캐칭을 처음 본 것은 2002년 9월 중국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였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고 세계선수권에 참가한 박 감독은 미국 대표팀 소속이던 캐칭에 대해 “조그마한 선수가 내·외곽에서 뛰어다니는데 눈에 확 들어왔다”고 회상했다. 당시 6개 구단 사령탑이 모두 현장에 있었지만 신장이 작은 캐칭을 주목하는 이는 없었다.

박 감독은 준결승을 앞두고 우연히 로비에서 캐칭과 마주쳤다. 코트 밖에서의 밝은 표정과 활달한 모습을 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준결승과 결승전을 보는데 캐칭만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우리은행은 이미 다른 선수와의 계약을 끝냈던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칭에게 마음을 뺏긴 박 감독은 한국행 의사를 타진했다. 캐칭의 대답은 ‘노’. 한국에 갈 생각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본인이 싫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박 감독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다. 한데 갑자기 계약했던 선수가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게 됐다.

우리은행에 행운이 따르려고 했는지 그 선수는 마침 캐칭과 같은 에이전트사 소속이었다. 박 감독은 “캐칭을 한국으로 데려오지 못하면 당신들과 관계를 끊겠다”며 반협박을 했다.

박 감독의 끈질긴 러브콜과 에이전트사의 설득으로 캐칭은 2003년 1월2일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고, 성공시대를 활짝 열었다.

지난달 정규리그 시상식장에서 캐칭은 분홍빛의 고운 한복을 입고 “감사합니다”라는 한국말로 수상 소감을 밝히면서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해준 감독님께 특히 고맙다”고 덧붙였다. 우연이 운명이 된 셈이다.

▲ 장애를 넘어 희망을 쏘다

캐칭에게도 어두운 유년 시절이 있었다. 캐칭은 어릴 때부터 왼쪽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오른쪽 귀마저 가끔 장애를 일으켜 양쪽 귀에 모두 보청기를 끼고 있다. 그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놀림을 많이 받는 ‘왕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이유가 경기 도중에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어린 시절은 우울했다. 하지만 농구를 통해 팀워크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세상에 대한 캐칭의 시선도 바뀌기 시작했다.

아픈 상처를 극복했기에 캐칭의 웃음에는 큰 힘이 있다. 캐칭은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사회봉사재단(Catch the Stars Foundation)을 운영하고 있다. 불우한 어린이들이 농구를 통해 희망을 가지라는 뜻에서다.

캐칭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린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는 것. WNBA와 러시아리그, 한국리그에 미국 대표팀까지 오가며 빡빡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어린이 대상 농구 캠프에 참여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지난 1월 외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국내 초ㆍ중ㆍ고교 여자농구 선수들을 위한 농구 교실을 열어 자신의 농구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캐칭 집안은 농구 가족이다. NBA에서 11시즌을 뛴 아버지 하비 캐칭을 비롯, 언니와 오빠 모두 농구 선수 출신. 어머니는 육상 선수였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긴 캐칭은 가족을 소재로 한 시를 쓰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1년 전 착하지만 무능력한 남자친구와 헤어져 솔로가 됐다는 캐칭은 “천생연분을 만나면 언제라도 결혼하고 싶어요. 아들 다섯을 낳아 농구팀을 만들면 좋겠죠”라며 활짝 웃었다.


김지원 기자 eddie@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