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펄 나는 이승엽·서재응, 고개 숙인 김병현·최희섭

태극마크 아래 뭉쳤을 때 그들은 최고였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4강에 오르며 세계 야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한국 대표팀. 돌풍의 주인공들이 각자의 ‘삶의 터전’인 소속팀으로 돌아간 지 꼭 한 달이 지났다.

WBC 대표팀에서 활약한 해외파 선수들 7명의 운명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트레이드된 선수(최희섭)가 있는가 하면 극심한 부진에 빠져 ‘WBC 후유증’에 시달리는 선수(김선우)도 있다. 그리고 WBC에서의 맹활약으로 탄력을 받은 듯 펄펄 나는 선수(이승엽)도 있다.

변수는 역시 몸상태였다. 일반적으로 4월 초의 시즌 개막에 맞춰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데 익숙했던 선수들은 3월 초에 열렸던 WBC에 맞춰 예년보다 일찍 몸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효과를 본 선수도 있지만 무리하게 페이스를 끌어올린 탓에 몸을 다치거나 밸런스가 흐트러져 애를 먹는 선수가 있다.

요미우리 4번타자로 - 이승엽

WBC에서 일본을 침몰시켰던 이승엽(30)의 방망이는 일본 프로야구 최고 명문팀 요미우리의 상징이 됐다.

이승엽은 WBC 대표팀에 합류할 때만 하더라도 외국인 타자 조 딜런과의 주전 경쟁 때문에 초조한 빛을 감추지 못했지만 대회를 거치면서 세계적인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승엽이 해외진출을 타진했던 2003년 겨울, 헐값의 몸값을 제시하며 ‘아시아 홈런왕’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던 LA 다저스 등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대어’를 놓쳤다며 뒤늦은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WBC 7경기에서 5홈런 10타점을 기록한 이승엽은 81년 화이트, 87년 크로마티에 이어 요미우리 개막전에 4번 타자로 출전한 역대 3번째 외국인 타자로 이름을 올렸다.

요미우리의 선택은 탁월했다. 2006시즌 요미우리의 첫번째 득점이 이승엽의 방망이에서 터져 나온 것을 비롯해 개막전부터 터진 홈런포가 인상적이었다. 최근 8경기 연속안타와 7경기 연속 멀티 히트 행진의 이승엽을 앞세운 요미우리는 센트럴리그에서 압도적인 1위를 내달리고 있다.

지바 롯데에서의 2시즌 동안 터득한 일본 투수 공략법에 WBC에서 얻은 자신감까지. 이승엽은 일본 투수들의 투구 패턴을 낱낱이 읽어내며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 이승엽(좌), 박찬호

MLB 올 한국인 첫 승 - 박찬호

박찬호(33ㆍ샌디에이고)는 WBC 대표팀에서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입을 열 때마다 강조됐던 ‘애국심’이란 단어, 그리고 “마지막 태극마크가 될지도 모른다”던 결연함은 슈퍼스타들의 집합체인 대표팀을 똘똘 뭉치게 하는 힘을 발휘했다.

방어율 0의 완벽한 피칭은 말할 것 없고, 연봉 1,533만 달러의 초특급 투수가 대표팀에서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은 점은 ‘의무는 잊고 권리만을 내세운’ 미국 대표팀 소속의 메이저리거들과 확연하게 대비된 점이었다.

그러나 태극마크를 뗀 이후 박찬호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다. 사실상의 루키 시즌이었던 96년 이후 처음으로 불펜 투수로 시즌 개막을 맞아야 했던 박찬호는 천문학적인 몸값의 불펜 투수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묵묵히 ‘마이웨이’를 걸었다.

두 차례의 불펜 등판에서 컨디션을 조절한 박찬호는 20일(한국시간) ‘투수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쿠어스필드에서 콜로라도를 상대로 7이닝 9안타 4실점의 호투를 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올시즌 한국인 메이저리거의 첫번째 승리.

스스로가 인정하듯 “예전처럼 강하게 던지지는 않는다”는 박찬호는 제구력 투수로 거듭났다. 승리투수가 된 콜로라도전에서 내준 볼넷은 단 1개. WBC에서 10이닝을 던지면서도 박찬호가 볼넷으로 걸어내보낸 타자는 단 1명도 없었다.

마이너리그행 - 최희섭

WBC 미국전에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홈런을 터뜨린 최희섭(27ㆍ보스턴)은 대회 기간 내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1루수 자리에선 이승엽이 맹활약했고, 지명타자로 출전한 경기에서도 타격 부진을 보이며 유일한 메이저리그 타자라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LA 다저스의 스프링 캠프에 합류한 최희섭에게 들려온 소식은 웨이버 공시를 통한 방출. 지난해 1루수 요원으로 노마 가르시아파라를 영입한 다저스로선 충분히 예상됐던 일이기도 했다.

다행히 지난 오프시즌부터 최희섭을 눈여겨 봤던 보스턴 레드삭스가 손을 내밀어 빨간양말을 신게 됐지만 ‘빅초이’의 종착역은 마이너리그 트리플A 포터킷 레드삭스였다. 보스턴에도 J.T. 스노가 버티고 있어 최희섭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

포터킷에서 시즌을 시작한 최희섭은 홈런포로 타격감을 조율하며 빅리그 복귀를 노리고 있다. 21일까지 때린 홈런이 벌써 2개. 팀에서의 위치는 4번타자다.

선발 정착 컨트롤 아티스트 - 서재응

WBC 대표팀에서 에이스 역할을 했던 서재응(29)은 올시즌 한국인 메이저리거 가운데 유일하게 선발로 시즌을 시작했다. 서재응은 한 차례의 불펜 등판(5일 애틀랜타전 3이닝 3실점)을 거친 뒤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첫 선발 등판이었던 12일 피츠버그전에서 5이닝 5실점으로 부진했던 서재응은 17일 샌프란시스코전에서 6이닝 2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체인지업과 변화구의 위력이 여전해 올시즌 가장 안정된 활약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 김병현(좌), 서재응

부상과 부진 - 콜로라도의 듀오 김병현, 김선우

콜로라도의 4선발로 시즌을 준비했던 김병현은 시범경기에서 당한 부상으로 꼬박 한 달을 쉬었다.

3월 29일 샌프란시스코와의 시범경기에서 홈 슬라이딩을 하다 오른쪽 햄스트링을 다쳐 15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올랐던 김병현은 마이너리그에서 두 차례의 재활 등판을 거쳤고, 조만간 빅리그에 복귀할 예정.

김병현은 두 차례 등판에서 방어율 4.91을 기록했지만 부상 부위의 통증이 사라진 상태다. 슬럼프에 빠진 선발 자크 데이의 자리가 김병현의 몫이 될 전망.

반면 불펜투수로 출전했던 김선우는 최악의 부진을 보인 끝에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빅리그 세 경기에서 무려 19.80의 처참한 방어율을 기록한 김선우는 한때 방출설까지 나돌았지만 구단의 배려로 마이너리그에서 재활 피칭을 하며 컨디션 회복을 꾀하고 있다.


한준규 기자 manbo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