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년대 박치기 하나로 서민에 통쾌함 선사현역 은퇴 후 사업 실패·투병생활 '파란만장한 삶'

‘이마로 무엇을 세게 받아 치는 짓.’

국어사전에 등장하는 박치기의 뜻이다. 지난 1960~70년대 우리 국민들은 ‘이마로 무엇을 받아 치는 짓’에 열광했다. 상대방의 반칙 때문에 유혈이 낭자한 이마로 전 세계의 프로레슬링 선수들을 ‘받아 쳤던’ 프로레슬러 김일 씨. 그것은 지극히 본능적이고 단순하며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행위였지만 고단한 삶을 살던 한국 민중들에겐 가슴 한쪽을 후련하게 뚫어준 ‘희망’이자 짜릿한 ‘쾌락’이었다.

박치기 하나로 국민스타가 됐던 프로레슬러 김일 씨가 지난 10월 26일 13년째 입원 중이던 서울 을지병원에서 77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인생이 드라마이고 쇼 아닌가요?"

프로레슬링을 잘 짜여진 각본의 쇼라고 외면했던 사람들에게 김일은 평소 이렇게 이야기했다.

‘인생의 링’에서 김일이 걸어갔던 삶의 궤적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했다.

김일은 1929년 전남 고흥의 한 섬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로선 큰 키였던 185cm의 건장한 체구를 갖춘 김일은 씨름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지역의 온갖 씨름대회를 석권하며 무수히 많은 소를 1등상으로 받아왔다.

힘 센 소년 김일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은 역도산과의 만남. 여순반란 사건과 한국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고생했던 김일은 56년 여수에서 선원들을 통해 얻은 일본 잡지에서 역도산의 기사를 읽었다. “역도산의 인기는 천황을 앞지를 정도”라는 게 선원들의 이야기였다. 김일은 무작정 일본으로 향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전이었기 때문에 밀항을 할 수밖에 없었고, 김일은 도쿄에서 출입국 위반 등 혐의로 체포돼 약 1년간 옥살이를 했다.

형무소에 갇혀 있는 동안 김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역도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엔 ‘도쿄 역도산’이라고 쓰면 주소를 몰라도 역도산에게 편지가 배달될 정도로 역도산은 유명인이었다.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무수히 보냈던 김일. 이 가운데 하나가 우연히 역도산의 눈에 띄게 된다. 애절한 사연을 접한 역도산은 당시 일본 자민당 부총재인 오노 반보쿠에게 김일의 이야기를 했고, 역도산이 ‘신원보증’해준 김일은 곧바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듬해인 57년 김일은 도쿄 역도산체육관에 문하생 1기로 역도산의 제자가 됐다. 여기서 ‘필살기’인 박치기 기술을 익히게 된다. 함경도 출신의 역도산은 일찍이 평양 박치기의 위력을 절감하고 김일에게 “너는 조선 사람이니 박치기 기술을 익히라”고 명령했다.

역도산의 훈련 스타일은 혹독한 것으로 유명했다. 경기를 하다가 이마를 다쳐 꿰매면 다시 그곳을 재떨이, 골프채 등으로 때려 단련시킬 정도.

오오키 긴타로라는 일본 이름으로 프로레슬링에 입문한 김일은 탄탄대로를 밟으며 세계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스승은 김일이 가장 영광스러운 무대에 섰을 때 칼을 맞고 생을 마감한다.

63년 12월 김일이 미국 LA에서 생애 처음으로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챔피언에 오르던 날 스승 역도산은 괴한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경기에서 지지 않는 것만이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여긴 김일은 운동에 전념, 72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프로레슬링계를 평정한다. 30여 년의 현역 생활 동안 3,000여 차례 경기를 치른 김일은 무려 20차례나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따냈다. 라이벌인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안트 바바와의 경기는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된다.

프로레슬링의 전설로 군림했던 김일이었지만 그의 말년은 사업 실패와 투병으로 얼룩졌다. 80년대 중반 손을 댔던 활어 수출 사업 등이 잇따라 실패하면서 큰 병을 얻었고, 박치기 후유증과 노환, 당뇨병 등에 시달리며 병원 신세를 졌다.

다행히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의 도움으로 지난 94년부터 13년째 무료 입원 치료를 받아왔지만 고혈압, 하지 부종, 신부전증 등 각종 질환이 겹친 데다 최근엔 빈혈증세까지 보여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는 말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지난 3월엔 일본에 건너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한 한국 야구대표팀을 격려하기도 했고, 지난달 10일엔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LG-SK전에서 시구를 했다. 그러나 박치기왕도 결국 세월을 거스르지 못하고 ‘인생의 링’을 쓸쓸히 떠나고 말았다.

"레슬링은 쇼" 장영철과 애증 41년… 말년에 화해

김일과 장영철. 둘의 애증을 빼놓고 프로레슬링을 이야기할 수 없다. ‘박치기왕’ 김일과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은 60년대 국내 프로레슬링계를 양분했다. 역도산의 제자로 ‘해외파’를 거느렸던 김일과 ‘국내파’의 간판이었던 장영철은 모두 ‘국민스타’로 군림했고, 양측의 맞대결은 최고의 흥행카드였다.

그러나 둘은 이른바 “레슬링은 쇼” 발언 사건으로 인해 원수처럼 갈라서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65년 11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였다. 일본의 오쿠마가 ‘약속과 달리’ 거친 ‘새우꺾기’ 공격으로 장영철을 몰아부치자 고통을 견디지 못한 장영철이 매트를 쳤다. 그러나 오쿠마의 공격은 계속됐고, 보다못한 장영철의 후배들이 링 위로 몰려가 오쿠마의 머리를 병과 의자로 내리치는 소동이 벌어졌다.

장영철과 후배들은 즉심에 회부됐고, 장영철은 경찰 조사과정에서 “레슬링은 쇼”라고 말해 큰 파장이 생겼다. 프로레슬링은 ‘잘 짜여진 사기극’이란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 나갔고, 장영철은 프로레슬링 쇠락의 주범으로 낙인찍혔다. 김일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만다.

이후 41년 동안 물과 기름처럼 지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올해 2월. 김해의 한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장영철을 김일이 찾아가 만나면서 극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린 둘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지난 8월 장영철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 이상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리고 나란히 약속이나 한 듯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각종 격투기가 젊은 층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2000년대. 프로레슬링 1세대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박치기 왕'김일 씨가 26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7세. 사망원인은 만성신부전증과 신장혈관 이상으로 인한 심장마비이다. 홍인기 기자
63년 세계프로레슬링챔피언이된 김일(왼쪽)이 상대 선수를 박치기로 누른 뒤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이노키.

한준규기자 manbo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