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이영표·설기현·이동국 흥미진진한 생존경쟁 스타트

‘라이언 킹’ 이동국(28ㆍ미들즈브러)이 마침내 ‘꿈의 리그’ 입성에 성공했다. 이동국은 1월 31일 밤(이하 한국시간) 미들즈브러의 연습구장이 있는 달링턴 록리프경기장에서 공식 입단식을 치르고 동국(DONG GOOK)이라는 이름과 배번 18번이 새겨진 붉은색 유니폼을 전달받았다.

박지성(26ㆍ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영표(30ㆍ토트넘 홋스퍼), 설기현(28ㆍ레딩)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네 번째 쾌거다.

이동국의 가세로 인해 EPL을 향한 한국팬들의 관심은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2000년 이후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은 사이인 이들이 펼치는 맞대결은 올해 최고의 빅카드로 주목받게 됐다(★표 참조). 명실상부 세계 최고 리그라는 EPL에서 한국 선수들끼리 맞대결을 펼친다는 것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다.

‘EPL 태극전사 4인방’이 꿈의 리그에 입성하기까지 서로 다른 과정을 밟아왔고 묘하게 축구 인생의 음양이 엇갈려 왔다는 점에서 이들이 펼칠 ‘꿈의 대결’은 더욱 흥미진진할 것으로 보인다.

롤러코스터 축구 인생

4인방 중 가장 늦게, 그리고 힘든 과정을 거쳐서 EPL에 입성했지만 국내에서는 가장 먼저 스타 대접을 받은 이가 이동국이다.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만 해도 다른 세 명의 선수들은 무명에 가까웠던 이들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동국은 한국 축구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네덜란드와의 2차전 후반 서정원과 교체돼 그라운드를 밟으며 한국 선수 최연소 월드컵 본선 출전 기록을 세운 것. 한국은 한 수 위의 기술과 조직력을 뽐낸 네덜란드에게 0-5로 참패하는 와중에도 이동국은 기죽지 않는 과감한 플레이를 펼쳐 일약 ‘한국 축구의 미래’로 떠올랐다.

이동국은 이후 98~99년 안정환, 고종수와 함께 K리그 중흥을 주도했고 2000년 아시안컵에서는 득점왕에 오르며 한국 축구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중요한 순간마다 불행에 발목을 잡혔다. 2001년 베르더 브레멘(독일)으로 임대돼 유럽 진출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부상으로 인한 적응 실패로 6개월 만에 돌아왔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생애 최대의 시련을 겪었다.

군입대를 계기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며 독일 월드컵을 향한 꿈을 부풀렸지만 지난해 4월 불의의 무릎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며 월드컵 출전이 또다시 좌절됐다.

그러나 이동국은 기나긴 재활 과정을 거쳐 그라운드로 돌아왔고 직접 잉글랜드로 건너가 테스트를 받으며 EPL 입성을 노린 끝에 꿈의 무대에 들어섰다. 이동국은 K리그에서 바로 EPL로 직행했고 월드컵의 후광을 입지 않고 빅리그에 진출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EPL 3총사와 차별화된다. 굴곡 많은 축구 인생을 걸어온 그가 꿈의 무대에서 높이 비상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무명에서 월드스타로

이동국이 한참 주가를 날릴 때 고교를 졸업하고 갈 곳이 마땅치 않을 정도로 철저한 무명이었던 것이 현재 한국 축구의 간판 스타인 박지성이다. 박지성은 99년 수원공고를 졸업한 후 연고 구단인 수원 삼성의 2군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하는 등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였다. 그러나 당시 명지대 감독으로 재직하던 김희태 포천축구센터장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스카우트했고 올림픽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던 허정무 감독에게 그를 추천했다.

박지성은 99년 봄 연습생 신분으로 올림픽대표팀 전지훈련에 합류했고 이후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진화를 거듭했고 결국 한국인 처음으로 EPL에, 그것도 최고 명문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는 신기원을 이룩했다.

이동국은 거스 히딩크 감독과의 궁합이 맞지 않았던 대표적인 선수다. ‘히딩크호’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2002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도 제외됐다. 그러나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과의 ‘찰떡 궁합’으로 오늘날의 자리에 올랐다.

박지성은 현재 측면 공격수로 맹활약하고 있는데 그를 이 자리에 세운 것도 히딩크 감독이다.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인 박지성이지만 최초의 전공은 수비형 미드필더와 윙백이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을 3-4-3의 오른쪽 측면 공격수로 전격 기용했고 그는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그림 같은 결승골을 터트리며 스승의 기대에 부응했다.

월드컵이 끝난 후 박지성은 스승을 따라 네덜란드로 건너갔고 시즌을 치를 때마다 한 단계씩 성장해 결국 세계 최고라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당당한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노력과 집념으로 꿈을 이루다

설기현은 박지성과 같은 무명은 아니었다. 98년 태국 아시아청소년선수권과 99년 나이지리아 세계청소년선수권(20세 이하)에서 이동국과 함께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는 등 일찌감치 유망주로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이동국과 같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고 박지성보다 훨씬 앞서 유럽 리그에 진출했지만 점진적인 발전 과정을 거쳐 7년 유럽 생활 끝에 최고 리그에 입성했다. 오랫동안 꾸준히 성장한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설기현은 이동국처럼 굴곡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유럽 진출 후 부침을 거듭하는 어려운 과정을 묵묵히 참아낸 끝에 EPL에서 당당히 자리를 잡은 집념의 사나이다.

설기현은 광운대 재학 중이던 2000년 대한축구협회의 유망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벨기에 주필러리그 안트워프에 진출하며 유럽 생활을 시작했고 안더레흐트(벨기에)와 울버햄턴(잉글랜드 2부)을 거치는 동안 첫 시즌에 좋은 활약을 보인 후 이듬해부터 주춤하는 과정을 반복했지만 이를 이겨내고 성장을 거듭했다.

2001년 안더레흐트로 이적한 후 데뷔전 해트트릭,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 득점 등 거칠 것 없던 그였지만 2002 월드컵을 앞두고 팀 내 입지가 흔들려 마음 고생을 겪었다. 울버햄턴에서도 2004~05 시즌 글렌 호들 감독의 신임을 얻으며 입지를 탄탄히 하던 중 2005~06 시즌 후반기 들어 극심한 부진을 보여 독일 월드컵에서 출전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러나 레딩으로 이적한 후 심기일전, 소속팀의 초반 돌풍을 이끌었고 측면 공격수와 최전방 스트라이커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며 높은 팀공헌도를 보이고 있다.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

이영표는 진흙 속에 묻혀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후 초고속으로 발전한 케이스다. 이영표는 다른 세 명보다 훨씬 긴 무명 시절을 보냈다. 박지성도 수원공고를 졸업할 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지만 이영표는 건국대 졸업반이던 99년까지 단 한 차례도 청소년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된 적이 없다. EPL 4인방 중 유일하게 청소년대표팀 경력이 없는 이가 이영표다.

이영표의 성공 과정은 박지성과 상당히 유사하다. 건국대 졸업반이던 99년 이영표도 일종의 연습생 신분으로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했다. 당시 건국대를 지도하던 정종덕 감독이 선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팀 구성에 난항을 겪던 허정무 올림픽대표팀 감독에게 이영표를 천거한 것이다. 이후의 이영표는 ‘물 만난 물고기’ 같은 활약으로 스타덤에 올라섰다. 올림픽대표팀의 주전 자리를 꿰찼고 2000년 안양 LG(서울 전신)에 당시 신인 최고 대우로 입단했다. 대표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인 것은 물론이다.

이영표는 히딩크호 출범 후 수비형 미드필더와 윙백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로 깊은 신뢰를 받았고 2002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맹활약한 후 PSV 아인트호벤을 거쳐 박지성에 이어 두 번째로 EPL에 입성한 한국인이 됐다.

이영표가 다른 세 명에 비해 두드러지는 점이 있다면 ‘꾸준함’이다. 2000년 프로 데뷔 이후 부상이나 부진으로 장기간 벤치에 앉아 본 일이 없는 유일한 선수다. 또 4인방 중 유일하게 K리그와 유럽리그에서 모두 챔피언에 오르는 영예를 맛봤다. 이영표는 2000년 안양 LG에서 K리그 챔피언에 올랐고 아인트호벤 시절이던 2002~03, 2004~05 시즌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김정민 기자 goav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