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페더급 현역 챔피언 지인진 이종격투기 진출 왜?타이틀 따고도 생활고 시달려 '빛 좋은 개살구'… 씨름도 상황은 비슷

이종격투기 마니아들은 웃었고 복싱팬들은 울었다.

국내 유일의 복싱 세계챔피언이 결국 이종격투기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세계복싱평의회(WBC) 페더급 챔피언 지인진(34)은 지난 7월26일 공식적으로 일본 입식타격 격투기 단체인 K-1 진출을 공식 확인했다. 국내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세계챔피언이 이종격투기행을 선언한 것은 가히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 국내 유일 현역 챔프의 외도

지인진의 K-1행은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 격투기사에 남을 일이다. 현역 챔피언이 K-1에 진출한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이다. 과거 복싱 출신 선수는 적지 않았다.

K-1 최강의 펀치를 자랑하는 제롬 르 밴너(프랑스)와 마이크 베르나르도(남아공) 등은 복싱으로 기본기를 다졌고 프랑소와 보타(미국)는 헤비급 챔피언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복싱 은퇴를 선언한 뒤 전향했다. 지인진에 앞서 K-1 진출을 선언한 슈퍼페더급의 최용수(35) 역시 글러브를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당연히 K-1측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사건이다. ‘현역 챔프의 K-1행’은 매력적인 홍보 카드다.

2005년 1월 30일 서울 그랜드 힐튼호텔 특설 경기장서 열린 WBC 페더급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한국의 지인진이 도전자 호주의 토니 브라운의 안면을 오른쪽 훅으로 가격하고 있다. (연합뉴스)

K-1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K-1의 이벤트 주관사인 FEG의 다니가와 대표는 “지인진의 합류가 K-1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세계적인 뉴스가 될 것”이라며 기뻐했다.

아시아 시장, 특히 한국을 거점으로 글로벌 이벤트로의 격상을 꿈꾸는 K-1으로서는 한국의 복싱 챔피언 지인진의 합류가 더욱 힘이 될 수밖에 없다.

■ 결국 문제는 돈

이와는 반대로 복싱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하나밖에 없는 세계 챔피언의 외도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심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떨구고 있다. 지인진의 선택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유일의 세계챔피언이지만 지인진의 경제적 사정은 딱하기 그지없다. 지난 해 12월 로돌포 로페스(멕시코)에게 판정승을 거둬 타이틀을 따낸 당시 지인진이 손에 쥔 돈은 1,000만원이 채 안 됐다.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걸고 한 승부에서 지인진의 개런티는 고작 1만 달러였다. 그 뒤 6개월이 지나도록 지인진은 타이틀 방어전을 갖지 못했다.

지난 해 12월 받은 1,000만원의 수입으로 6개월을 버텨야 했던 셈이다. 지인진은 세살배기 아들과 돌이 갓 지난 딸을 둔 한 집안의 가장이다. 지인진은 최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벌어놓은 돈은 다 까먹고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고 있다”고 털어놨다.

챔피언이 된 이후 타이틀 방어전에서 지인진이 받을 개런티 역시 턱없는 액수였다. 지인진의 방어전을 주선한 프로모터 측은 지인진에게 약 4,000만원 가량의 개런티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복싱 관행상 프로모터와 매니저, 세금을 제하면 지인진의 손에 떨어지는 돈은 2,000만원이 채 안 된다.

지인진은 “세계챔피언 타이틀전이라면 1억5,000만원 정도의 개런티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프로모터측은 “그만한 개런티를 지불할 정도로 복싱이 잘 나가고 있나”며 난색을 표했다.

그렇다면 지인진이 K-1에 진출하면 얼마나 받을까. FEG측과 K-1의 한국 대회 프로모터인 양명규씨는 공개할 수 없다고 꺼려하지만 적어도 1년에 3억원 이상이 될 전망이다.

지인진에 앞서 K-1행을 택한 최용수가 3년간 10억원에 계약했기 때문에 현역 챔피언인 지인진은 그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생활고에 직면하고 있는 지인진이 K-1을 택한 건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 프로복싱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프로복싱의 한 관계자는 지인진의 K-1행을 두고 “복싱의 사형 선고”라는 말까지 했다. 갈 데까지 간 복싱의 현 주소를 그대로 드러낸 말이었다. 지인진의 이탈로 한국 복싱은 세계챔피언을 단 한 명도 보유하지 못하게 됐다.

WBC는 지인진이 페더급 타이틀을 반납함에 따라 새 챔피언으로 호르헤 리나레스(22ㆍ베네수엘라)를 지목했다.

과거 한국 프로복싱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챔피언을 보유하고 있었다. 장정구 유명우 문성길 등 최대 7명까지 세계 챔피언 자리를 꿰차고 있던 때가 있었다.

프로복싱의 인기도 여느 스포츠 뺨쳤다. “세계챔피언이 장래 희망”이라고 대답하는 어린이가 적지 않았고 배고픈 시절 ‘헝그리 복서’들의 투혼은 전 국민적인 공감대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타이틀 매치에 따라붙는 광고도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하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찬밥 신세다. 세계타이틀 매치를 벌여도 스폰서를 못 구한다. 방송 중계도 따라붙지 않고 있다. 비단 한 두 해의 문제가 아니다.

6년 전인 2001년 WBC 라이프 플라이급 챔피언이었던 최요삼은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타이틀전을 3차례나 연기하면서 타이틀을 박탈당할 위기까지 놓였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급속하게 식은 복싱의 인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지난 해 K-1에 진출한 최용수 역시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은퇴 뒤 버스운전 기사가 될 결심까지 했다.

슈퍼페더급 챔피언으로 96년부터 3년간 7차례나 타이틀을 방어한 최용수는 한국 프로복싱사에서 장정구 유명우 다음가는 레벨의 챔피언. 하지만 그가 받은 파이트머니의 50%는 매니저, 프로모터, 트레이너비 형식으로 빠져나가고 세금 등을 떼면 실제로 3∼40%밖에 받지 못해 수입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은퇴 뒤 복싱으로 먹고 살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있던 재산마저 탕진하기 십상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최용수 말고도 한때 세계 복싱계를 주름잡았던 상당수 스타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 씨름과 복싱 동병상련

80년대 최전성기를 누렸던 ‘격투 스포츠’ 복싱과 씨름은 그 존립 기반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프로팀이 한 개 밖에 남지 않아 고사 상태에 들어간 민속씨름과 그나마 하나 있던 세계챔피언을 떠나게 만든 프로복싱 모두 언제 숨통이 끊어질 지 모르는 ‘시한부 생명’이다. 종목의 붕괴 현상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지표가 바로 선수들의 이탈이다.

최홍만 이태현 김영현 등 씨름 천하장사 출신 3명이 이종격투기 진출을 선언했고 최용수와 지인진 2명의 복싱 챔피언도 K-1으로 향했다. 간판 스타들이 하나 둘 떠나간 그 빈 자리를 누가, 그리고 어떻게 채울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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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 기자 kik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