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선발 승부조작·입시 비리 잡음 속 김정길 회장 "체육계비리 척결 앞장"

대한태권도협회가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태권도협회 김정길 회장은 올 여름 사정의 칼을 빼들었다. 국기 태권도를 둘러싼 승부조작과 입시비리 등을 발본색원하겠다는 의지다. 대한체육회장을 겸한 김정길 회장은 “그동안 체육계를 좀먹던 비리를 척결하는데 태권도가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 국가대표 선발전 승부조작설

김정길 회장이 곪은 살을 도려내겠다는 결심을 굳힌 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불거진 승부조작설 때문이다.

제18회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헤비급 경기가 벌어진 5월 21일 중국 베이징의 창핑 체육관. 한국 헤비급의 간판스타 남윤배(한체대)는 준결승에서 210㎝의 거인 다바 모디보 케이타(말리)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태권도 전문가들은 “남윤배의 실력은 뛰어나지만 헤비급에는 케이타 뿐만 아니라 2m 이상의 거인이 즐비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협회 집행부는 “어쨌든 헤비급이 출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협회는 결국 6월 8일 금메달이 유력한 체급 대신 헤비급(+80㎏)을 올림픽에 출전할 체급으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헤비급은 우승 가능성이 작은데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는 비난이 쏟아졌고, 임춘길 협회 전무이사가 이승국 한체대 총장과 친구라는 이유로 헤비급을 선정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한국일보 6월16일자 17면 참조)

2008 베이징올림픽 세계예선대회(9월ㆍ영국)에 출전할 국가대표 선발전이 벌어졌던 7월 6일 국기원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태권도 협회 김정길 회장.

“편파판정으로 특정선수를 뽑을 거면 선발전을 왜 하느냐?” 한체대 선수들에게 유리한 판정이 반복되자 하봉갑 이사가 선발전 운영을 책임진 임춘길 전무에게 따졌다. 한 지도자는 판정에 불만을 품고 퇴장하기도 했다.

심판의 편파판정 논란이 벌어진 체급은 여자 67㎏ 이하급과 남자 헤비급. 공교롭게도 한체대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선발돼 승부조작설이 급속히 퍼졌다.(한국일보 7월7일자 17면 참조)

■ 태권도협회 집행부 사표 제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나온 불협화음을 보고받은 김정길 회장은 비리 척결을 주장한 일선 지도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정길 회장은 7월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체육회장과 태권도협회장 차기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불출마 선언하고서 “체육계 전반에 걸쳐 뿌리깊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고 강조했다.

승부조작설의 중심에 있던 임춘길 전무는 7월 26일 김정길 회장을 독대한 자리에서 “물의를 빚어서 죄송하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김정길 회장은 사표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자세다.

태권도 자정운동이 특정인을 겨냥한 정치싸움이 아니라 비리에 대한 ‘수술’이자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병폐에 대한 ‘예방주사’여야 한다는 게 김정길 회장의 생각이다.

태권도협회는 고교대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입시관련 부정과 각종 금품 수수 의혹도 조사할 계획이다. 협회 고위 관계자와 친분이 있는 인사는 지방 ㉠고교 선수 부모에게 금메달을 따게 해주겠다며 금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회장 직속기구로 설치된 윤리위원회는 태권도와 관련된 각종 비리와 관련된 의혹과 제보를 철저히 조사한다.

■ 곪은 상처는 터트려야 새살이 돋는다

태권도는 스포츠이기에 앞서 정신수양을 중요시하는 무예다.

화려한 발차기와 호신술은 물론 약자를 보호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자세 또한 태권도의 요체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이라는 대전제는 특정세력의 사리사욕 때문에 무너졌고 승부조작은 구조적인 병폐가 됐다.

편파판정으로 피해를 본 선수와 감독이 동료가 피해를 볼까 두려워 항의조차 할 수 없다. 불의에 항거하기보다는 침묵으로 수용해야 할 지경이다.

심판의 편파 판정은 다른 종목에도 있지만 정신수양을 강조하는 태권도에서는 눈곱만큼도 있어선 안 된다.

용인대 류병관 태권도학과 교수는 “태권도협회가 펼치는 자정운동이 몇몇 인사를 축출하는데 목표를 둘 게 아니라 앞으로 공정하고 투명한 행정이 가능하도록 원칙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협회 행정은 전무이사의 뜻에 따라 주먹구구식으로 좌지우지됐고, 결국 고인 물이 썩는 결과를 빚었다는 설명이다.

국기 태권도를 둘러싼 근거 없는 소문이 많다. 대표적인 게 “심판의 공정한 판정을 위해 반드시 전자호구가 도입돼야 한다”는 말이다.

세계태권도연맹도 올림픽에서 불거진 심판 판정 문제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전자호구를 통한 공정한 판정을 약속했다. 따라서 태권도 경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인은 전자호구만이 해결책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심판을 믿지 못하고 사람이 할 일을 기계에 맡긴다는 발상부터 잘못됐다. 승부조작에 가담한 심판은 앞으로 심판으로 나서지 못하게 징계하고, 심판능력이 부족한 심판은 교육하면 해결될 문제다. 대한태권도협회와 세계태권도연맹이 심판 관리를 철저히 하면 편파 판정이란 단어는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다.

태권도는 한류(韓流)의 원조로 한국의 자랑거리다. 외국에서는 유래를 찾기 어려운 발차기 중심의 맨손 무예에 한민족 특유의 충ㆍ효ㆍ예 정신을 담은 문화유산이다.

스스로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고 참회한 대한태권도협회의 고백성사도 바로 태권도 정신에서 비롯됐다. 태권도 자정운동의 성패 여부에 태권도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의 눈과 귀까지 집중되고 있다.

2004아테네올림픽 ‘태권도 영웅’ 문대성 동아대 교수는 24일 국가대표 선수단을 비롯한 실업, 대학 선수들과 함께 “태권도를 비롯한 체육계가 비리의 온상이 돼서는 안 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선수들도 자정운동에 동참하겠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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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