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학 매직’이 한국 남자 농구를 살렸다. 농구인들은 하나같이 유재학(50ㆍ모비스) 감독을 향해 “진심으로 고맙다”고 박수를 건넸다. 유 감독이 한국 농구를 다시 16년 만에 세계 무대에 올려놓았다. 이번 대회 MVP는 선수가 아닌 유 감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만가지 수를 가진 ‘만수’다운 지도력을 발휘했다.

14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만난 유 감독은 “지금 상황과 인기가 안 좋고, 세계대회 출전권까지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걸려 있어 선수들도 그렇고 의지가 남달랐다”며 “훈련 때부터 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니까 좋은 결과물로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선수 스스로 수비에 재미 느꼈을 것

한국 농구는 이번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촘촘한 수비 조직력으로 큰 재미를 봤다. 대표팀이 총 8경기 가운데 60점 이상을 내준 경기는 패한 이란전(76점)과 필리핀전(86점) 뿐이었다. 유 감독은 “지도자를 하면서 느낀 부분인데 수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선수들은 그런 생각이 그 동안 없었다”며 “수비를 더 열심히 하고, 수비로 여러 가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번 대회를 통해 선수들 스스로 수비에 재미를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

대표팀은 1-3-1 지역 방어를 앞세워 성과를 냈다. 외곽보다 가운데를 봉쇄하는데 초점을 둔 수비 방법이다. 아시아선수권에 앞서 열린 대만 존스컵 대회에서 높이의 열세로 대만, 중국에게 패한 뒤 2주 동안 가다듬었다. 유 감독은 “지역 방어라는 것이 외곽을 막든지, 가운데를 지키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넘어야 할 상대를 중국, 이란으로 보고 가운데에 김종규(207㎝), 김주성(205㎝), 이종현(206㎝)을 세웠다. 주성이의 위치는 공의 방향을 읽어야 하고 눈치가 빨라야 하는 ‘3’의 중앙이었다”고 설명했다. 유 감독이 준비한 수비는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만리장성’ 중국을 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란 역시 경기 내내 팽팽한 접전을 펼쳤지만 막판 체력 한계에 부딪혀 아쉽게 졌다.

▲높이 해결(?) 용병 귀화 고려할 시기

농구는 높이 싸움이다. 아무리 압박과 도움 수비를 해도 한계는 분명히 있다. 유 감독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다. 유 감독은 “2주간 높이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수비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고, 어느 정도 완성됐다 생각했는데 체력 문제가 나오니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이란전에 졌다”고 아쉬워했다.

이를 해결할 카드로 유 감독은 ‘용병 귀화’를 꼽았다. 아시아선수권에서도 나타났듯 대부분 팀들은 미국 출신 선수를 귀화시켜 전력에 포함했다. 국제농구연맹(FIBA) 규정상 귀화 선수는 1명만 등록 가능하다. 현재 이승준이 잘하고는 있지만 국제 대회에서 성과를 내려면 더 나은 기량을 갖춘 선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선수를 귀화하는 건 국내 정서상 안 맞는 현실이다. 축구 대표팀 역시 전북에서 뛰던 에닝요 귀화 얘기가 나왔지만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유 감독은 “순혈주의는 반대다. 용병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경기에서 지면 무슨 소용 있나. 아직 안 해봤으니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이 우선이니 한번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수들 또한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높이를 볼 때 국내 최장신 센터 하승진(221㎝)이 없다는 점은 분명 아쉽다. 현재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중인 하승진은 골 밑에 서있는 자체만으로도 상대에 큰 위협이 된다. 그러나 유 감독은 하승진의 대표팀 발탁에 대해 “의문 부호가 붙는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 선수든지 참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번에 두 달을 준비했는데 이 과정을 다 소화 못하면 아니라고 생각한다. 훈련이 몸에 배어야 가는 거다. 이제까지 하승진이 국제 대회에서 한번도 제 몫을 한 적이 없다. 이름만 갖고 안 된다. 훈련 과정을 못 거치면 키만 큰 거지 몸 상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아직 가야 할 길 멀다

이번 대표팀은 역대 최고 조직력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12명 중 김민구, 김종규(이상 경희대), 이종현, 문성곤(이상 고려대), 최준용(연세대) 등 대학생 5명을 엔트리에 넣는 과감한 발탁으로 세대교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유 감독은 “대학생 5명 선발은 정말 좋았다”면서 “신선한 맛도 있고, 신구 조화가 잘 됐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칭찬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였지만 유 감독은 곧바로 냉정한 잣대를 댔다. “아직 해야 할 것이 굉장히 많다. 개인적으로 숙제를 내준 선수들도 있다. 센터는 왜 볼을 못 다루고 스위치를 하면 외곽을 못 쫓아가는지 아쉬운 부분이다. 두 발 이상 움직이면 잡을 수 있는데 안 움직인다. 가드는 몸 싸움에서 밀리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 한국 농구를 끌고 가야 할 친구들이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

유 감독은 또 확실한 대표팀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표팀은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대한농구협회나 한국농구연맹으로부터 상대 팀 전력 분석 정보를 전혀 지원받지 못했다. 유 감독은 “양 쪽에 많은 강조와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시스템적으로 대표팀 규모가 더 커져야 한다. 지원 팀이나 전담 팀 규모가 커져서 시스템화 돼야 힘을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유 감독은 그 동안 말 못할 고충을 홀가분하게 털어놨다. “압박감이 정말 심했는데 누구한테 얘기할 수 없었다. 혼자 끙끙 앓느라 혼났다. 경험이 많은데 이번 대회처럼 압박감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고 책임감, 무게감이 다르다. 잠을 자더라도 선잠을 잤다. 중국전 첫 테이프를 잘 끊어 천만 다행이었다. 벌써부터 내년 아시안게임까지 지휘봉을 나한테 맡겨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아직 그런 부분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김지섭기자 oni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