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세 오뚝이' 임창용의 마이웨이오른 팔꿈치 부상 떨치고 시카고 컵스와 계약재활 성공 MLB 첫 데뷔이상훈·구대성·박찬호 이어 4번째 '한미일 클럽' 합류

'풍운아'라 하기엔 성공한 삶을 살았고, '엘리트'라 하기엔 거친 풍파를 겪었다.

그에게 늘 따라 붙는 수식어는 도전과 모험이다. 타협의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다. 우리 나이로 38세에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임창용(37ㆍ시카고 컵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임창용은 2010년 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에서 인생의 첫 번째 반전을 이룰 당시 후배들에게 이 같은 말을 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삶에 비하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냐. 심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지 않냐. 아끼면서 살고, 야구를 하면서도 벌 수 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자."

30대 중반이었던 임창용의 야구관은 뚜렷했다. 굳이 돈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면서 스스로와 싸움을 즐겼던 것이다.

광주 진흥고를 졸업한 그는 1995년 KIA의 전신인 해태에 입단해 4시즌을 뛰며 역대 최강 사이드암 투수로 이름을 알렸다. 물 흐르듯 유연한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가 일품이었다. 삼성으로 이적 후 프로 통산 9시즌 동안 104승66패 168세이브와 평균자책점 3.25를 올렸다. 30세이브 이상을 4차례 거뒀고, 3차례 구원왕에 오르며 오승환(삼성)의 등장 이전까지 국내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군림했다. 선발 투수로도 5시즌에서 두 자릿수 승을 올릴 만큼 보직을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활약했다.

국내 유일의 100승-200세이브 기록 보유자인 김용수 전 LG 코치는 "국내로 돌아온다면 임창용만이 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임창용은 2005년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팔꿈치 수술을 받은 뒤 재활에 매달려 2006년과 2007년 개점 휴업하다시피 한 것. 국내 마운드 복귀도 불투명하던 임창용은 2007년 말 일본 진출을 선언했다. 그리고 드라마틱한 반전에 성공했다.

팔꿈치 상태를 회복하고 체계적인 재활과 훈련을 거쳐 오히려 전성기를 웃도는 최고시속 160㎞의 강속구를 뿌렸다. 단숨에 야쿠르트의 '수호신'으로 거듭난 임창용은 2011년까지 4시즌 동안 128세이브를 기록했다. 2010년에는 1승2패35세이브와 평균자책점 1.46을 찍어 최고의 시즌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해엔 의도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오른 팔꿈치 인대가 끊어져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임창용은 이번에도 세간의 예상을 뒤엎는 선택을 했다. 시카고 컵스와 스플릿 계약(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리그 연봉이 다른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타진했다. 야쿠르트에서 검증된 임창용이었기에 재활을 마치고 일본에 남을 경우 괜찮은 몸값에 새 둥지를 찾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미련 대신 꿈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마이너리그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피나는 재활에 매진한 임창용은 루키리그와 싱글A, 더블A, 트리플A를 거치며 꾸준히 안정된 투구를 선보이더니 빅리그 마운드에 오르게 됐다.

이로써 임창용은 이상훈(고양 원더스 투수코치), 구대성, 박찬호(이상 전 한화)에 이어 한국 선수로 4번째로 한ㆍ미ㆍ일 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가 됐다.

2008년 일본 진출 당시 외국인선수 최저연봉(1,500만엔ㆍ약 2억원), 이번엔 2년간 최대 500만달러(약 54억원)고 그마저도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하면 보장 금액이 아니었다. 물론 평범한 야구 선수들에게는 이도 적은 돈은 아니다. 그래서 임창용은 국내 시절에도 각종 야구용품 등 스폰서를 받지 않았던 선수로 유명하다."먹고 살 만큼 돈은 있으니까"라는 이유였다. 늘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나는 임창용의 '마이웨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성환희기자 hhsu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