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저런 골프코스도 있었나?”

디 오픈이 열리는 영국의 링크스 코스에 어느 정도 익숙했던 골프팬들도 제115회 US오픈이 열린 체임버스 베이GC의 코스를 보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산재한 벙커, 관목 잡초에 에워싸인 구불구불한 페어웨이, 페어웨이인지 그린인지 구분이 안 되는 거친 그린, 나무라곤 전나무 한 그루뿐인 황량한 풍경 등 스코틀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링크스 코스의 모습이다.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영국이 자랑하는 유서 깊은 링크스 코스보다 더 골프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황량하고 삭막하고 거칠다. 러프는 깎은 러프가 아닌 풀이 제멋대로 자란 그대로고 벙커는 적당히 배치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 상태나 다름없다. 그린은 더욱 가관이다. 해양성 기후에 이상적이어서 영국의 링크스 코스의 전유물인 페스큐그래스(fescue grass)로 덮인 그린은 표면이나 색깔부터 벤트그래스로 만들어진 비단결 같은 현대의 골프코스와는 판이하다. 페어웨이나 그린 모두 길이만 다를 뿐 페스큐그래스로 깔려 있는데, 문제는 그린의 형태가 상식을 벗어나 기괴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하나같이 피자집의 서툰 주방보조가 만든 것 같은 울퉁불퉁한 도우나 싸구려 선술집의 찌그러진 알루미늄 쟁반을 연상케 한다.

이번 US오픈은 유서 깊고 명성 자자한 골프 경연이라기보다는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체임버스 베이GC의 무덤에 묻히는가를 시험하는 대회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골프황제로서의 명성 회복을 천명해온 타이거 우즈가 최하위권이나 다름없는 16오버파 공동 150위로 컷오프 탈락한 것을 비롯해 대런 클라크(17오버파 153위), 게리 우드랜드(11오버파 공동136위), 미겔 앙헬 히메네스, 러셀 헨리, 그래엄 맥도월(8오버파 공동97위), 버바 왓슨, 헌터 메이헌(7오버파 공동85위), 마틴 카이머(6오버파 공동76위) 등 언제나 우승 가능한 대선수들이 긴 풀과 모래, 기괴한 그린에 적응하지 못하고 컷 통과에 실패했다.

우리의 기대를 모았던 안병훈도 9오버파 공동 109위로 체임버스 베이의 무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5년 전 이곳에서 열린 US아마추어 오픈 챔피언십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해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이 코스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던가 보다.

이번 대회에서 5언더파의 조던 스피스(22)가 우승하고 언더파를 기록한 선수가 8명에 그친 것을 보면 체임버스 베이GC가 얼마나 악명 높은 코스인가 짐작할 수 있는데 이 골프코스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면 왜 골퍼들을 학대하기 위해 만든 무덤 같은 난해한 코스가 만들어졌는지 납득이 간다. 체임버스 베이GC는 US아마추어 챔피언십과 US오픈이 열렸지만 개장한지 9년밖에 안된 역사가 일천한 골프코스다. 골프코스가 들어선 자리는 미국 북서부 워싱턴주 타코마의 서쪽 끝 유니버스시티플레이스 교외에 있는 황무지 같은 땅으로 원래는 자갈 채석장이었다. 189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자갈을 채취하기 시작했는데 북쪽으로 64km 거리에 있는 시애틀 마천루에 들어간 골재의 90%가 이곳에서 공급되었다니 채석장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한 야심찬 검사 출신 카운티 의장(존 레이든버그)이 한 세기에 걸친 골재 채취로 황무지로 변한 이 해안가에 야구장과 하이킹 트랙, 골프코스가 들어설 공공 여가공간으로 재개발하기로 결정하면서 체임버스 베이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카운티 의장은 공개입찰과 설계과정에서부터 새로 들어설 골프코스는 링크스 코스여야 하며 US오픈을 유치할 수 있는 코스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 결국 유명한 골프코스 설계가인 로버트 트렌트 존스 2세가 코스 설계 및 건설을 맡아 2007년 6월 개장했다. 개장 전에 미국골프협회(USGA)가 이 코스를 2010년 US아마추어 챔피언십과 2015년 US오픈 개최지로 선정하면서 일약 화제의 골프코스로 명성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한 골프전문가는 “체임버스 베이 골프코스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으며 단순하고 세련되지 않아 어떤 곳은 마치 미완성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부분은 일부러 특이하게 꾸며놓은 것 같다. 처음 구상했던 꽃이 무성한 벙커는 파인밸리에서 영감을 얻어 모래 황무지로 변했고 널찍한 페어웨이는 폭이 100야드가 넘는 곳도 있지만 애매한 어프로치 각도로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그린을 공략해야 하는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고 평했다.

공사 전 USGA의 고위인사들은 카운티 의장과 함께 공사 현장을 돌며 “이 곳은 잠재력이 많은 곳이다. 그 잠재력을 망치지 말기 바란다”며 “영국의 디 오픈이 개최되는 골프코스에 절대 뒤지지 않는 골프코스를 만들어 달라”고 의미심장한 당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체임버스 베이GC가 선수들의 무덤이 될 정도로 난해하게 만들어진 까닭을 읽을 수 있는 일화다.

세계의 골프코스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이나 아일랜드의 코스처럼 가능한 한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골프의 기량을 테스트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춘 골프코스와 미국이나 아시아지역의 코스처럼 양질의 잔디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골프코스가 그것이다. 최근엔 이 두 가지 요소를 적당히 배합해 코스 자체는 인공으로 만들면서 마치 자연 그대로를 활용한 것처럼 꾸민 골프코스가 등장하고 있다.

영국의 골프선수나 골프애호가들은 지나치게 정원처럼 꾸며진 미국의 골프코스를 비하하며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골프의 묘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영국의 골프코스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는데 세계 골프를 지배하는 미국의 골프 관계자들도 이 점에 대해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도 영국의 골프코스를 방불케 하는 황무지 같은 골프코스가 조성되곤 했는데 체임버스 베이GC야말로 영국의 자존심에 도전장을 내민 대표적인 코스인 셈이다.

‘지옥의 코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프로골퍼들을 괴롭혀온 체임버스 베이GC는 그 악명을 희석시키는 주변 경관의 덕을 입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대표하는 골프코스의 하나로 명성을 얻는데 성공했다. 멀리 북쪽으로 산 전체가 빙하 덩어리인 레이니어(Rainier)산의 신비로운 모습이 다가오고 서쪽으로는 아름다운 푸젯 해협이 열려 있으며, 골재를 실어 나르던 철도가 골프코스와 해안을 경계 짓는 체임버스 베이GC는 지나치게 난해한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황량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골프코스로 명성을 얻고 있다.

체임버스 베이GC는 골프코스란 라운드 하는 골퍼를 만족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골퍼의 능력과 인내심을 시험하는 공간이란 원초적인 골프의 철학을 담은 보기 드문 골프코스임을 라운드가 막을 내린 후에야 깨닫게 한다.

# 골프한국 프로골프단 소속 칼럼니스트에게는 주간한국 지면과 골프한국, 한국아이닷컴, 데일리한국, 스포츠한국 등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글을 연재하고 알릴 기회를 제공합니다. 레슨프로, 골프업계 종사자 등 골프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싶으신 분은 이메일()을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방민준 골프한국 칼럼니스트 news@golfhank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