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GA투어 푸본 타이완 챔피언십 우승

노란색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초원을 걷는 리디아 고(18.뉴질랜드 교포.한국이름 고보경)의 모습을 보며 봄날의 들판을 날아다니는 노랑나비를 떠올렸다.

25일 타이완 타이베이의 미라마르 골프컨트리클럽에서 열린 LPGA투어 푸본 타이완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에서 리디아 고는 다른 선수와는 차원이 다른 라운드를 펼쳤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타수를 줄이기 위해, 실수를 줄이기 위해, 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고 우승을 향해 라운드를 펼치는 모습이었다면 리디아 고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날개 짓을 하며 들판에 핀 꽃들 위를 유영하는 한 마리의 나비였다. 대부분의 다른 선수들이 보다 나은 스코어에 대한 결의와 함께 우승이 멀어진데 대한 실망감과 스스로에 대한 불만감이 뒤얽힌 표정이었다면 리디아 고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한 천진난만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마치 장난감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문득 법정스님이 펴낸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초기 불교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종교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 정신의 원형이 가득했다는 기억이 나는데 그 중에서도 다음의 구절이 가슴에 닿았다.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같이,

물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 ('코뿔소의 장' 중에서)

리디아 고는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그렇게 갔다.'

리디아 고는 대회 마지막 날 대다수의 선수들이 스코어를 줄이기는커녕 지키지도 못하는 상황에도도 7언파를 치는 차원이 다른 플레이로 공동2위(유소연, 지은희)와 무려 9타 차이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우승했다. 지난 9월 메이저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 이후 1개월여 만의 승리로 시즌 5승에 LPGA투어 통산 10승째다.

낸시 로페즈(58.미국)가 갖고 있던 최연소 10승 돌파 기록(22세2개월5일)은 리디아 고의 기록(18세6개월1일)에 뒷전으로 밀렸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리디아 고는 박인비(27)에게 내줬던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비롯해 상금, 올해의 선수, 평균 최저타수 부문 등 휩쓸게 되었다.

같은 날 경기도 광주 남촌CC에서 막을 내린 KLPGA투어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KB금융 스타챔피언십에서 전인지(21)가 10언더파로 숨 가쁜 우승경쟁을 벌인 박인비와 김혜림을 한 타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전인지는 최종 합계 10언더파 274타를 기록,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전인지는 이로써 올 시즌 KLPGA투어의 하이트진로 챔피언십, LPGA투어 US여자오픈, JLPGA투어 일본여자오픈과 일본 월드레이디스 챔피언십 등 시즌 8승 중 5개의 메이저타이틀 거머쥐었다.

역시 같은 날 막을 내린 JLPGA투어 노부타그룹 마스터즈GC 레이디스 대회에서 이지희(36)가 안선주 이보미 등과 경합을 벌인 끝에 우승하며 시즌 2승, 통산 19승을 달성했다. 지구촌 여자골프투어가 범 태극낭자들을 위한 무대로 변했음을 실감하는 날이었다.

내 눈엔 이날이 참 특별해 보였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 같지가 않다. 같은 날 동시에 우승한 리디아 고와 전인지, 그리고 스폰서주최 대회를 빛내기 위해 LPGA투어를 마다하고 KLPGA투어 대회에 참가해 우승은 놓쳤지만 선전한 박인비의 공통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세 선수는 우선 마음이 고요하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소금이 물에 녹아들듯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게임에 집중한다. 게임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역연하다. 어떤 실수를 하고나서도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툴툴 털고 새로이 시작할 줄 안다. 무엇보다 동반자들에 대해 투쟁적인 구석을 발견할 수 없다.

결코 모범적인 스윙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돌부처를 닮은 미소로 톱랭커를 유지하는 박인비, 어린 나이를 무색케 하는 냉정함과 침착함 등 천부적인 '즐기는 평정심'을 소유한 리디아 고, 품격 있는 미모에 그 미모를 더욱 빛나게 하는 행동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전인지는 바로 지구촌 여자골프계를 지배할 여왕들이 분명해 보인다.

이들의 플레이에 대해 동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감탄하면서 존경하며 가끔 이들이 흘린 나락을 줍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승을 노리는 자, 투어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 마음속에 담은 경쟁자를 물리치겠다고 플레이하는 자들이 태반인 투어무대에서 과연 이들의 벽을 뛰어넘을 선수가 얼마나 될까. 투쟁적인 수많은 유명 골퍼들, 이를 테면 미셸 위, 스테이시 루이스, 수전 페테르센, 폴라 크리머 등이 여전사들이라면 박인비, 전인지, 리디아 고는 구도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대들이여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그렇게 가라.

(골프한국 프로골프단 소속 칼럼니스트에게는 주간한국 지면과 골프한국, 한국아이닷컴, 데일리한국, 스포츠한국 등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글을 연재하고 알릴 기회를 제공합니다. 레슨프로, 골프업계 종사자 등 골프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싶으신 분은 이메일()을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방민준 골프한국 칼럼니스트 news@golfhank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