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GA 투어 아칸소 챔피언십 우승

한자(漢字)에는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우주적 철리(哲理)와 인간 삶의 역사가 담겨 있다. 글자의 어원과 만들어진 배경을 파고들어가 보면 글자 하나가 소우주와 다름없다는 생각을 갖곤 한다. 길고 넓은 시공간을 거치면서 태어난 한자는 글자 하나만으로도 삶의 지침이자 화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좋아하는 한자가 적지 않지만 내게는 ‘담(淡)’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한자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 불 화(火)가 겹친 데 삼수(水) 변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이 글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물을 부어 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전적 의미는 ‘묽다, 엷다, 싱겁다, 맛이 없다’등이고 염으로 읽을 때는 ‘질펀히 흐르다, 어렴풋하다, 희미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 ‘담’자는 중첩되어 ‘담담하다’로 자주 쓰이는데 ‘차분하고 평온하다. 사사롭지 않고 객관적이다. 물의 흐름 따위가 그윽하고 평온하다’는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역학(易學)에선 고차원의 정신수준을 표현할 때 ‘담담(淡淡)’을 자주 원용한다. 인간은 기대가 클수록 불평과 결핍감이 커지고 기대 즉 꿈과 희망을 버릴수록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역학의 시각이다. 꿈과 희망이 강할수록 낙담과 절망이 클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심장에 열이 생기는데 이것이 만병의 근원이라고 본다.

흥분과 격정,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담담해져야 하는데 담담하려면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분노를 일으키거나 지나치게 웃고 즐길 때 역시 평상심을 잃어 심장에 열이 생기는데 이를 억누르려면 엄청난 내공이 있어야 한다. 이 내공이 바로 담담함이다.

지난 25~27일(한국시간) 미국 아카소주 로저스의 피너클CC에서 펼져진 LPGA투어 월마트 NW 아칸소 챔피언십에서 뉴질랜드교포 리디아 고(19·한국이름 고보경)는 ‘담담한 플레이의 진수’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세계 아마추어 1위, 아마추어로서 LPGA투어 최연소 우승, 16세 프로 전향, 17세 LPGA투어 진출, LPGA투어 통산 13승, 시즌 3승, 최연소로 36주 연속 세계랭킹 1위 유지 등 그의 경이적인 골프 연대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골프에서 최강의 무기는 과연 무엇인가를 담담하게 펼쳐보였다.

시즌 3연승을 올린 태국의 아리아 주타누간(20), 시즌 1승을 올리며 매 대회 주위를 놀라게 하는 캐나다의 브룩 핸더슨(18) 등 신성들의 기세에 리디아 고의 질주가 주춤하는 듯 했으나 이번 대회에서 그는 다른 LPGA선수들이 범접할 수 없는 단계의 ‘담담한 플레이’로 어렵지 않게 승리했다.

리디아 고의 출발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일본의 우에하라 아야코, 대만의 캔디 쿵, 유선영, 최운정, 이민지 등이 선두그룹을 형성한 1라운드에서 그는 5언더파로 공동 15위에 머물렀다.

2 라운드 접어들어 물 흐르듯 유연하면서도 기복이 없는 그녀 특유의 플레이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추월이 본격화되었다. 미국의 모건 프레슬과 함께 14언더파로 공동선두로 치고 올라선데 이어 마지막 라운드에서 모건 프레슬, 캔디 쿵, 안젤라 스탠포드, 모리야 주타누간, 산드라 갈 등 추격자들을 여유 있게 따돌리고 우승컵에 입을 맞추었다.

골프코스에 운집한 갤러리나 골프채널은 그의 우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특유의 도도하면서도 담담한, 즐기는 골프의 명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김세영이나 장하나처럼 드라마틱하진 않았지만 그의 플레이는 심연 같았다. 루틴은 한결 같았고 스윙도 유별나지 않았다.

캐디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잔디를 날려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파악하고, 볼을 날려 보내야 할 목표점을 설정해 자세를 취해본 뒤, 가벼운 연습 스윙을 하고, 수건으로 손과 그립을 닦고, 셋업 자세로 들어가 머뭇거림 없이 스윙을 했다.

그린에서의 그의 루틴을 보면 그가 왜 퍼팅에 유독 강한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린에 올라오면서 멀리서부터 볼의 위치와 그린의 생김새를 파악한 뒤, 캐디와 얘기를 주고받곤 양발과 눈 손가락으로 퍼팅 라인의 느낌을 얻은 뒤, 볼의 라인을 맞추고, 볼이 굴러가야 할 방향을 상상하며 스탠스를 취하고, 무거운 시계추의 움직임을 연상케 하는 퍼팅을 한다.

샷이나 퍼팅을 하고 난 뒤에도 그 결과에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은 채 마치 골프코스를 걷는 자체가 즐겁다는 모습으로 다음 코스로 이동한다. 영락없는 행복한 순례자의 모습이다. 특히 온갖 소음과 환호가 허용되는 17번홀(파3)에서 리디아 고가 아칸소의 상징인 멧돼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열광하는 팬들과 교감하는 모습은 심해를 유영하는 돌고래가 스스로의 열락에 겨워 공기방울을 만들고 공중제비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LPGA 홈페이지의 통계자료를 보면 리디아 고의 평균 드라이버 비거리는 248.41야드로 121위에 머물고, 페어웨이 안착률도 72.56%로 55위다. 그의 특장은 그린 주변에서 드러나는데, 파온 확률은 74.18%로 7위고 샌드세이브 확률도 60.00%로 8위로 높은 편이다. 그의 최대 강점은 퍼팅으로 해 18홀 평균 퍼팅 수 28.67로 1위, 파온 후 평균 퍼팅 수 1.72로 1위다.

이런 통계를 보면 리디아 고의 최대 무기는 장쾌한 샷을 날리지는 않지만 큰 동요 없이 물 흐르는 듯한 일관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 심연의 흐름처럼 도도하고 담담한 플레이를 펼칠 줄 안다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이런 리디아 고를 누가 대적할 수 있으랴. 가끔 우승을 놓치고 중위그룹으로 떨어지는 때는 있겠지만 긴 골프의 여정에서 누가 리디아 고와 호각을 이룰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방민준 (골프한국 칼럼니스트)

(골프한국 프로골프단 소속 칼럼니스트에게는 주간한국 지면과 골프한국, 한국아이닷컴, 데일리한국, 스포츠한국 등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글을 연재하고 알릴 기회를 제공합니다. 레슨프로, 골프업계 종사자 등 골프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싶으신 분은 이메일()을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