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PGA 이벤트 대회인 왕중왕전

올 시즌 KLPGA투어 상위 랭커들만 초청해 성적에 따라 보너스를 주는 LF포인트 왕중왕전의 우승은 시즌 상금왕과 평균타수 1위를 차지한 이정은6(22)나 신인으로서 대상과 신인상을 차지한 최혜진(19) 중 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란 게 보통 골프팬들의 예상이었다.

상위 랭커 10명만 초청해 2라운드만 치르는 대회라 이변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지만 LF포인트란 대회 특유의 배점제를 적용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공식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이정은6와 최혜진이 그만큼 유리한 입장이었다.

LF포인트는 시즌 공식기록에 나타난 객관적 기준을 적용한 점수로 환산하여 선수들을 평가하는 통합 포인트 제도다. 특히 최종 라운드 성적을 기준으로 한 '순위 배점'과 9단계로 세분화한 '타수 배점', 그리고 대회 연속 톱10 진입 여부에 따른 '추가 배점' 등 복잡한 배점제도를 적용하기 때문에 시즌 성적이 좋은 선수, 첫 라운드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이 같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11월 18일 전남 장흥 JNJ 골프리조트에서 막을 내린 대회에서 올 시즌 KLPGA투어를 양분한 이정은6와 최혜진이 아닌 데뷔 3년차 이다연(21)이 5천만 원의 보너스를 챙겼다.

최혜진은 17일 펼쳐진 1라운드에서 6연속 버디를 포함해 8언더파 64타를 쳤다. LF포인트 사전배점에 따라 3언더파를 추가해 합계 11언더파로 2위 이다연을 3타 차이로 따돌려 올 시즌의 대미를 장식하는 듯했다.

그러나 18일 최종 라운드 후반에서 난조에 빠졌다. 13번 홀(파5)에서 세컨 샷을 해저드로 빠뜨린 뒤 그린 위에서도 세 번의 퍼트로 트리플 보기를 범했다. 이어 17번 홀(파5)에서도 세 번째 샷이 해저드에 빠지면 더블보기를 기록, 8언더파 139타 4위로 최종라운드를 마쳤다.

반면 최혜진과 함께 챔피언조에 있던 이다연은 최혜진이 난조에 빠진 사이 버디만 4개를 낚으며 최종합계 12언더파 133타로 정상에 올랐다.

한편 이정은6는 최종합계 2오버파 146타로, 10명 중 유일하게 오버파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정은6의 부진은 납득이 가지만 최혜진의 최종 라운드 추락은 골프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지난달 말 미국에 건너가 지옥의 레이스라는 8라운드 LPGA투어 Q시리즈에 참가, 수석합격에 이르기까지 혼신을 다하느라 심신이 극도로 지친 상태라 에이스들만 모인 왕중왕전에서 제기량을 발휘하기엔 힘겨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라운드에서 순항하며 여유 있는 선두로 2라운드를 맞은 최혜진이 시즌의 대미를 목전에 두고 무너진 것은 진 사라젠(Gene Sarazen, 1902~1999)의 금쪽같은 충고를 깜빡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 사라젠은 1920-1930년대 미국 골프계를 풍미한 프로골퍼로, 최초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고 생애 우승기록이 41번에 달하는 미국의 골프전설이다.

“골프에서 방심이 생기는 가장 위험한 시간은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될 때이다”

후대 골퍼들이 금과옥조로 늘 가슴에 품는 이 말은 바로 진 사라젠의 입에서 나왔다.

골프에서 천당과 지옥은 등을 맞대고 있고, 잘 나갈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며,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자에게 그만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수많은 골프선수들이 뼈저리게 체험하는 진실이다.

LPGA투어 사상 처음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며 여자골프의 세계 최강자로 우뚝 선 아리아 주타누간(22)이야말로 진 사라젠의 금언을 뼈 속 깊이 체험한 케이스다.

2013년 태국에서 열린 LPGA투어 혼다 타일랜드에서 마지막 홀을 남기고 박인비에 두 타 앞서고 있었으나 파5 18번 홀에서 멋지게 2온을 하려다 볼이 벙커 턱에 박히면서 트리플 보기를 범해 박인비에게 우승컵을 바쳤다.

2015년 시즌 개막대회인 퓨어실크 바하마 대회에선 연장전에서 김세영에게 패했고 ISPS 호주 여자오픈에서는 3라운드까지 공동선두로 나섰다가 4라운드에서 무너져 리디아 고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최혜진이라고 진 사라젠의 금언을 들어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마추어들도 구력이 4~5년 되다보면 선배 혹은 스승으로부터 이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듣는데 최혜진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골프에는 늘 망각이라는 바이러스가 따라다닌다. 오죽 했으면 아침에 알았던 것도 저녁이면 잊는 게 골프라고까지 말했을까.

마라톤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이제 이겼다!’는 생각이 들 때라고 한다. 많은 운동선수들이 가장 위험한 순간을 ‘자신의 컨디션이 최고라고 느낄 때’라고 털어놓은 것도 진 사라젠의 명언과 통한다.

이번 경험이 최혜진이 골프선수로 대성하는 데 큰 보약이 되기를 바란다.

방민준(골프한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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