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현 경남FC 감독.

기억하는가. 아니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2002 한일월드컵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 경기 종료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0-1로 뒤지던 한국은 황선홍의 패스가 이탈리아 수비를 맞고 나오자 설기현이 지체없이 왼발 슈팅을 때려 극적인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한국은 안정환의 연장전 골든골로 8강에 진출했고 스페인과 승부차기를 거쳐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냈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화려했고 최고의 멤버로 여겨지는 2002 월드컵의 ‘등번호 9번’ 설기현이 감독으로 돌아왔다. 심판매수로 인한 승점 -10점 삭감(2016년)→K리그2 우승(2017년)→K리그1 준우승(2018년)→K리그2 강등(2019년)이라는 지독한 롤러코스터를 탄 경남FC의 수장으로 프로 감독 첫 경력을 시작한다. 경남 남해에서 자신의 첫 프로팀을 지도하고 있는 ‘2002 영웅’ 설기현을 만나 선수시절 품고 있던 지도자의 꿈과 축구철학을 들어봤다.

선수시절부터 품던 축구, 대학에서 시행착오로 완성하다

2015시즌을 앞둔 3월 초, 설기현은 급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성균관대에서 감독 제의가 들어왔기 때문. 설기현은 “선수시절부터 하고자 하는 축구가 있었다. 코치로 개별 선수를 지도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감독으로 해야 가능했어요. 마침 제의가 와서 성균관대 감독으로 향했죠”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설기현은 무슨 축구가 하고 싶었길래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성균관대 감독으로 향한 것일까. “아직 선수였다보니 철학만 있었지 뚜렷한 방법론은 없었죠. 그 방법론은 대학에서 완성했죠. 선수마다 모두 자기가 잘하는 게 있어요. 저는 해외에서 ‘세올(설기현의 별명), 넌 크로스가 좋으니까 페널티박스에 넣어주기만 해’라고 주문했어요. 하지만 내 특기인 크로스를 올리기 전까지는 개인 역량으로 풀기까지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럴때마다 ‘선수 특성이 발휘되기 전까지를 감독이 만들어주는 축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어요. 그것이 제 축구 철학이었죠.” 철학은 있으나 방법은 몰랐던 설기현은 명성만으로 자신을 확실히 따르는 성균관대 선수들을 4년간 지도하며 방법을 확립했다. 대학에서의 경험이 프로 감독으로 와서 큰 경험이 됐다고 한다. “대학 축구는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적었어요. 프로처럼 당장 성적을 내야하는 게 아니다 보니 이리저리 방법을 실험하며 제가 추구한 철학을 시행할 방법을 만들어 나갔죠. 어떤 때는 고려대에게 7골을 내주고 지면서도 방법을 확립하다 보니 이렇게 프로에 와서 곧바로 성공한 방법만 골라 적용할 수 있게 됐죠.”

“어렵다”며 생각못한 반발에 부딪히기도…나는 나의 축구할 것

그렇다면 설기현이 추구한 ‘선수 특성을 나오기 전까지 감독이 만들어주는 축구’ 철학을 구사할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설 감독은 “일반적으로 선수들은 전진패스가 오면 수비와 떨어져서 공을 받으려해요. 그래야 돌아서기가 편하거든요. 하지만 저는 수비를 끌어들여 붙여서 공을 받으라고 해요. 그럼 공 받기 어렵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수비가 따라나온 뒷공간이 열리고 템포도 빨라지죠. 이게 공격진영에서 몇 번 나오면 상대 조직은 무너져요”라고 설명했다. “경남에 와서 처음에 이런 훈련을 진행하니 선수들이 ‘어렵다’고 아우성이더라고요. 심지어 내부에서는 ‘그냥 K리그2 치고 멤버도 좋으니 수비 탄탄히 하다가 공격수에게 길게 차서 한골을 넣어 이겨도 같은 승점 3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는 ‘내가 그런 축구를 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다. 내가 감독을 한 이유는 다른 걸 해보기 위해서다. 설령 6개월만에 짤린다 하더라도 내가 해보고 싶은 축구를 하겠다. 이미 대학에서 시행착오를 겪어 성공한 것만 하기에 검증이 됐고 확신이 있다. 믿어 달라’고 말하기도 했죠.” 반복된 훈련과 연습경기가 진행되며 경남 선수단 내에서는 처음의 반발이 믿음으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선수들이 처음에 어려워도 막상 해보니까 경기가 수월하고 편하게 풀리는걸 보니까 여론이 바뀌더라고요”라며 웃은 설 감독은 “저는 무작정 ‘잘하자’, ‘뺏기지 마’라고 말하는 감독이 되기보다 모든 상황 상황마다 자신의 역할을 주는 감독이 현역시절 좋았어요. 당장 공이 없어도 그 다음 움직임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고, 내가 공을 잡을 때 누구에게 주는지 이 모든 게 약속되고 조직화된 축구를 하고 있죠.”

좋은 팀일 때 축구가 즐겁다

말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설 감독은 “코치들도 낯설어하는 축구”라며 웃으며 “골프 스윙을 예를 들어보죠. 팔을 어디까지 뻗고 허리를 어떻게 돌리고 하나하나 동작을 배울때는 힘들어요. 하지만 익숙해지고 잘 배우면 부드럽고 최고의 스윙이 나오죠. 저의 축구도 배울 때는 낯설고 힘들어도 조직화되면 기계적으로 상대를 무력화할 수 있어요”라며 자신 있어 했다. 설기현은 선수시절을 떠올리며 “저 역시 선수때 늘 축구가 즐겁진 않았어요. 하지만 언제 즐거웠나 떠올려보면 정말 좋은 팀으로 뭉치고 조직적으로 잘 준비돼 있을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랑 붙어도 두렵지 않고 즐겁게 축구할 수 있었어요”라며 즐거운 축구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맹목적으로 ‘즐기면서 축구해’라고 선수들에게 말하는게 아니에요. 감독으로 조직적으로 할 일을 정해주고 전술적으로 상대를 어렵게 하는 축구로 승리한다면 그것만큼 축구가 재밌을 수 없어요. 그런 팀에서 경기를 하면 스스로 즐기면서 축구를 할 수 있고 즐기는 선수들을 보면 팬들도 즐길 수 있죠. 올시즌 경남을 ‘색깔있다’, ‘팀철학과 스타일이 있다’는 말과 함께 상대에게는 ‘경남은 참 대처하기 힘든 팀이야’, ‘경기하기 어려운 팀’으로 불리게 하는게 제 목표입니다.”

남해=스포츠한국 이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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