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킹’, ‘K리그 역대 최다득점자’, ‘대박이 아빠’ 등의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니지만 ‘한국 축구 역사상 최다출전-최다골’이라는 수식어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이 있을까.

이동국(41)이 은퇴했다. 11월 1일 2020 K리그1 최종전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난 이동국은 영광과 눈물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23년의 프로생활을 마무리하게 됐다.

이동국. 연합

K리그 전성기 이끈 트로이카, 월드컵 중거리포로 국민 스타 올라

포항제철고를 졸업한 이동국은 포항 스틸러스 소속으로 1998년 3월 21일 성남 일화(현 성남FC)와의 경기를 통해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전 이후 열흘만인 전북 현대와의 경기에서 프로 첫 골을 신고했다. 이 골은 훗날 이동국이 넣는 수많은 득점의 시발점이 된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전국구 유망주’로 평가받던 이동국이 프로 데뷔와 동시에 눈에 띄게 활약하자 차범근 당시 월드컵대표팀 감독은 이를 눈여겨봤다. 대형 선수로 성장할 재목을 지나칠리 없었다. 차 감독은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19세에 불과한 이동국을 최종명단에 합류시키는 ‘깜짝 발탁’의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자신의 국가대표 감독 마지막 경기이자 0-5 참패를 당했던 거스 히딩크의 네덜란드를 상대로 후반전 이동국을 교체출전시켰다. 이동국은 이 경기에 대해 훗날 “어차피 날 아는 사람도 없으니 편하게 하자”라는 마음으로 출전했다고 한다.

이동국은 아직도 회자되는 과감하지만 임팩트 강한 중거리슛 한방으로 0-5 참패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슈팅 한방으로 이동국은 수려한 외모와 함께 귀국 후 스타덤에 오르고 안정환-고종수와 함께 ‘K리그 트로이카’로 불리며 K리그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당시 K리그 경기장은 소녀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이동국은 1998년 K리그 신인왕뿐만 아니라 K리그 인기몰이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공로상을 받았다.

너무 어릴 때 잘하다 보니… 각급 연령별 대표팀 혹사

이렇게 이동국이 실력과 인기를 모두 갖추다보니 자연스레 소속팀 포항뿐만 아니라 대표팀에서의 호출도 많아졌다. 문제는 이동국이 워낙 어려 U-20대표팀은 물론, 시드니 올림픽을 나서는 U-23 대표팀, 그리고 국가대표 A대표팀까지 모두 불려 다닌 것.

이동국은 1998년 AFC 청소년 선수권(U-20대회)에 참가한 것은 물론 1999년 FIFA U-20월드컵도 출전했다.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대비하는 U-23 대표팀의 거의 전 경기에 출전했고 올림픽도 다 뛰었다.

그리고 2000년 아시안컵을 준비하는 A대표팀에도 호출되며 4개의 소속팀(포항, U-20, U-23, A대표)을 가진 웃기면서 슬픈 상황이 나왔다. 자연스레 선수 혹사가 제기됐지만 당시만 해도 혹사에 대해 관대했던 분위기 탓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현역 생활 내내 이동국을 괴롭혔던 고질적인 무릎부상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21세에 아시안컵 득점왕에 올라…2002 월드컵 탈락의 아픔

이렇게 혹사를 당했지만 이동국의 실력은 대단했다. 만 21세이던 2000년 아시안컵에서는 득점왕에 올랐다. 당시 한국 공격진은 황선홍-최용수-서정원-김도훈-안정환 등 쟁쟁한 선배들이 포진했음에도 이동국은 주전을 꿰차며 득점왕까지 차지할 정도로 뛰어났다.

얼마나 잘 했으면 독일에서 부상으로 재활을 받다가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에 입단까지 했을까. 비록 독일에서 성공은 못했지만(7경기 0골) 어린 이동국의 축구인생은 탄탄대로였다.

당연히 대표팀의 현재이자 미래로 누구도 2002 한일월드컵에 이동국의 이름이 빠질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고 전방에서 많이 뛰지 않고 골만 넣으려는 이동국을 신뢰하지 않았다. 대표팀에 제외되는 횟수가 늘더니 결국 월드컵 최종명단에서 제외되고 만다.

당시 박지성 등 새내기의 발탁보다 이동국의 탈락이 더 충격적이었을 정도로 여론은 요동쳤다. 그럼에도 히딩크 감독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고 히딩크 감독은 4강 진출로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이동국은 훗날 “모두가 환호하던 2002년 6월, 나는 너무 충격이 커서 술만 먹었다. 맨정신인 날이 없었다. 나만 월드컵에 기뻐하지 않던 국민이었다”며 회상하면서도 “2002년의 아픔이 있었기에 40세가 넘는 나이까지도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6 월드컵 부상 이탈의 아픔과 EPL에서의 실패

상무에 입대해 ‘새사람’으로 거듭난 이동국은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아갔다. 2004 아시안컵 주전 공격수를 거쳐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는 가히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나이(만 26세)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K리그 10경기 7골) 정점을 찍어가던 이동국은 하지만 2006 독일월드컵을 2개월여 앞두고 경기 중 십자인대파열 부상을 당하며 월드컵에 나갈 수 없게 된다.

정말 이번만큼은 2002 월드컵의 아픔을 씻는가 했지만 부상으로 또 다시 월드컵을 놓친 이동국에 많은 국민들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나 이동국은 아픔을 딛고 부상에서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새로운 무대로 도전한다. 바로 박지성-이영표 등이 뛰고 있던 세계 최고 무대 EPL의 미들즈브러에 입단한 것. 현재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인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감독의 감독 데뷔시절 생애 첫 영입 선수가 이동국일 정도로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동국은 경기감각이 떨어져있다보니 데뷔전에서 교체로 들어가 아쉽게 골대를 맞힌 것을 끝으로 EPL에서 23경기 동안 단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1시즌 반 만에 영국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처절한 실패였고 이동국도 어느덧 30세에 가까운 나이가 되며 그렇게 한물간 선수가 됐다. 실제로 2008년 여름 K리그 복귀 후 성남에서 보낸 반시즌 동안 13경기 2골에 그치며 이동국은 이제 국내에서도 통하지 않는 선수로 전락하는가 했다.

2016년 11월 2일 오후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6 전북 현대와 상주 상무의 경기에서 전북 이동국이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뒤 기뻐하는 모습. 연합

2009년 전북 입단, 30세부터 전설만들기 시작

이동국은 2009년 승부수를 띄운다. 당시만해도 중하위권에 머물던 전북 현대로 입단한 것. 전북 입단은 한국 축구사에 기억될 ‘역대급 이적’이 됐다.

만 30세의 나이에 전북에 몸담은 이동국은 최강희 감독의 믿음 아래 29경기 21골이라는 맹활약을 하며 전북에 사상 첫 K리그 우승을 안김과 동시에 득점왕-MVP-베스트11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하며 거짓말처럼 부활한다.

EPL과 성남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던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반전의 부활을 해낸 이동국은 이 기세로 2010 남아공월드컵에도 참가하며 12년만에 월드컵에 다시 나가기도 한다. 물론 16강 우루과이전에서 마지막 결정적인 득점기회를 놓치면서 비난도 받았지만 이후 이동국은 전북 소속으로 수많은 역사를 써내려간다.

전북에 무려 7번의 K리그 우승과 1번의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안긴 것은 물론 K리그 MVP 4회, 챔피언스리그 MVP 1회, 득점왕 1회 등 수많은 상을 쓸어담은 것. 이동국이 입단한 2009년 이전에는 K리그 우승이 없던 전북은 이후 K리그 역사상 최다우승팀이 되며 전북의 역사는 이동국 전후로 바뀌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에는 K리그 최다득점 기록을 갖고 있던 우성용의 116골을 넘어서 K리그 역대 최다골 신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11월 1일 은퇴경기를 하기 전까지 228골로 2위와 너무나도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동국은 10월 28일 은퇴 기자회견에서 “몸 상태는 그대로지만, 정신이 약해져 은퇴를 결심했다”며 “내 축구인생 최고 순간은 프로 유니폼을 처음 받았을 때와 2009년 전북의 우승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조차 대기록으로 이어져

이동국은 수많은 대기록을 남겼다. 우선 K리그 역대 최다득점(228골)의 주인공이자 AFC 챔피언스리그 역대 최다득점자(37골).

각급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뛴 공식 경기는 총 844경기. 대한축구협회가 집계한 한국 선수 역대 최다 출전이다. 또한 공식경기(프로팀+국가대표 경기)에서 넣은 득점만 무려 344골로 이 역시 한국 선수 역사상 최다골이다.

1998년과 2017년 월드컵을 포함해 국가대표로 활약한 20년은 역대 최장기간 대표팀 발탁이었으며 19세 52일의 월드컵 데뷔는 한국 축구사상 최연소 출전으로 남아 있다.

K리그 신인왕-득점왕-MVP는 물론 도움왕까지 차지하며 모든 개인상을 받은 것 역시 이동국이 유일무이하다. A매치에서는 105경기 출전해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고 국가대표로 33골을 넣어 한국 A매치 역대 득점 5위이기도 하다.

인생골 ’베스트3’

◆ 3위 : vs일본(1998년 10월) 19세 이하 대표팀 소속으로 AFC 청소년 축구대회 결승전에 출전한 이동국. 상대는 일본이었다. 상대가 일본이기에 전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이동국은 전반 21분 뒤로 흘러가는 공을 페널티아크 부근에서 터닝 왼발 슈팅을 때리고 강하게 일본 골문을 가른다. 이날 경기의 두 번째 골이었고 한국은 2-1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이동국이 월드컵 이후 확실하게 전국민적 스타로 자리매김한 골이다.

◆ 2위 : vs이란(2000년 4월) 1996 아시안컵에서 한국은 이란에게 2-6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다. 국가적 망신이었고 4년후 다시 열린 2000 아시안컵에서 반드시 설욕이 필요했다.

공교롭게도 4년전 만났던 그 무대 8강전에서 다시 이란과 만난다. 한국은 후반 막판까지 0-1로 끌려가다 후반 추가시간 김상식의 골로 연장전으로 향한다.

그리고 연장 전반 10분, 오른쪽에서 낮은 크로스가 투입됐고 이동국이 문전으로 달려들어가 오른발을 갖다대며 골든골을 넣었다. 이동국은 “이란전 골든골은 내 인생 가장 값진 골”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 1위 : vs독일(2004년 12월) 이동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골이 아닐까. ‘발리 장인’이라는 별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골이기도 하다. 당대 세계 최고 골키퍼였던 올리버 칸이 지키던 독일 골문에 이동국은 수비 경합 후 공이 튀자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춰 오른발 발리 슈팅을 때린다.

슈팅 궤적과 세기는 완벽했고 골키퍼 올리버 칸조차 따라가다 바라볼 정도였다. 이동국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때 발에 맞았던 임팩트와 찰나의 순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며 스스로 인생골 1위로 선정했다.




이재호 스포츠한국 기자 jay12@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