췌장암 투병 끝에… 영면에 들어가다

유상철 전 감독.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플레이어인 유상철이 하늘로 떠났다. 췌장암 투병 소식이 알려진 지 약 1년 반. 만 50세의 생일도 맞기 전인 이른 나이에 잠들었기에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지난 7일 오후 사망한 유상철 전 인천감독의 장례식은 서울 아산병원에서 치러졌고 9일 충북 충주시 진달래메모리얼파크의 어머니 곁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유상철 전 감독의 어머니는 지난해 3월 유 전 감독에 앞서 수년간 췌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선수 시절 유상철.

선수생활 내내 화려했지만 투지 넘쳤던 유상철

1994년 울산 현대에서 프로에 데뷔한 유상철은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8강 일본전에서 짜릿한 동점골을 넣으며 국민들에게 크게 각인된다.

짜릿한 역전승의 발판이 된 골이었기에 인상 깊었고 유상철은 소속팀 울산에서도 김병지, 김현석 등과 전성기를 이끌며 K리그와 아디다스컵 등을 우승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월드컵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차범근 감독이 대회 도중 경질되는 참사가 일어나자 벨기에전에 유상철은 주장 완장을 차고 나선다. 0-1로 뒤진 상황에서 하석주의 크로스를 유상철이 온몸을 날려 슈팅해 극적인 동점골을 만들며 무승부를 안긴다. 벨기에전 유상철을 주축으로 보여준 대표팀의 투혼은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1999년 일본으로 이적해 J리그 우승 2회를 경험할 정도로 일본에서도 ‘레전드’가 됐다. 요코하마 마리노스 역사상 최고 외국인 선수로 회자될 정도.2001년 대표팀 사령탑에 부임한 거스 히딩크 감독은 유상철을 보고 깜짝 놀란다. 코뼈가 부러졌는데도 계속 뛰겠다고 고집했고 부러진 코뼈를 안고 헤딩골까지 넣은 것. 이 모습을 보고 히딩크 감독은 한국 축구와 유상철에 대해 크게 감명받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만 31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맞은 2002 한일 월드컵. 유상철은 황선홍이 골을 넣으며 1-0으로 앞서던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에서 후반 초반 벼락같은 중거리슈팅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는 득점까지 해낸다. 유상철의 세리머니는 한국의 월드컵 첫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었기에 국민들에게 더 짜릿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본업’ 미드필더인데 득점왕…희생의 멀티플레이어

유상철은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에이어였다. 주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로 알려져 있지만 K리그 득점왕까지 차지했을 정도로 공격수는 물론 중앙 수비 풀백, 윙으로도 뛰었다.

팀 동료였던 김병지는 스포츠한국과 선정한 ‘함께 뛰어본 선수 베스트11’에 오른쪽 풀백에 유상철을 꼽기도 했다. 한일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에서 히딩크 감독이 0-1로 뒤진 상황에서 주장이자 수비수 홍명보를 빼고 공격수를 넣을 수 있었던 건 유상철이 수비의 중심을 맡아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포지션에서 뛴다는 것은 그만큼 동료들을 위해,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유상철은 이미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도 이를 숨기고 뛰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자신은 원치 않아도 팀을 위해 뛰는 모습은 감독 때도 잘 드러났다. 감독으로 자세를 낮추고 선수들에게 다가가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유상철 감독의 추종자 선수들이 많았다.

심지어 2019년 11월 췌장암 판정을 받고도 인천 유나이티드의 K리그1 잔류를 위해 감독직을 놓지 않았다. 자신이 갑자기 나가면 팀이 망가질 것을 우려했고 끝내 인천에 극적인 잔류를 남기고 투병을 위해 감독직을 내려놨다. 그의 희생정신은 K리그에 큰 감동을 줬다.

영정사진 속에서 유상철 전 감독이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어머니도 췌장암… 꿈 많았던 유상철

유상철은 지난해 어머니를 췌장암으로 떠나보냈다. 그 자신도 췌장암에 걸린 상황에서 혹독한 항암치료를 이겨내며 다가온 슬픔이었다.

유상철은 “(항암주사를) 안 맞아본 사람은 모른다. 와, 나도 맞고나면…”이라며 말을 흐릴 정도였다. 실제로 유상철은 항암치료를 받고 나면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음에도 매체나 방송 등에 출연해 자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암환자들의 희망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올해 초부터 암세포가 뇌로 전이되며 안 좋아졌다. 1월 한 번의 위기를 잘 넘겼지만 이번에 찾아온 위기는 힘겨웠다. 일시적으로 눈이 아예 안 보이기도 했다. 발견 후에는 이미 늦었다는 췌장암을 무려 1년 반 이상 버텨낸 유상철은 그렇게 영면에 들었다.

유상철은 생전 ‘슛돌이 제자’ 이강인을 두고 “건강한 일주일이 주어진다면 강인이 경기를 보러 스페인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이강인도 “다시 제 감독님 해주셔야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상철에게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지도자로서 최고의 자리를 목표로 삼는다면 역시 축구 대표팀 감독을 해보는 거다”라며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 강인이가 선수로, 제가 감독으로 있다면 그 그림을 그려보는데 멋지지 않을까”라며 상상했었다.

또한 내년이면 20주년을 맞는 2022년에 대해 “정말 2002 월드컵 멤버 23명이 다같이 모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만 50세 생일을 4개월 앞뒀을 정도로 아직 한창이며 그리는 꿈, 바라는 꿈도 많았던 유상철. ‘조금만 더’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을 수밖에 없기에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더욱 슬퍼하고 있다.



이재호 스포츠한국 기자 jay12@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