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한 골프장 프런트 벽면에는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 ‘이시하라 색각 검사표’를 확대한 것 같은 다양한 원형의 점으로 그려진 비구상 작품인데 숫자가 아니라 글자가 그려져 있다. 락카를 배정받기 위해 프런트에 서 있으면 점으로 연결된 글씨가 보인다.

연합뉴스

작은 원의 점들로 이뤄진 커다란 원형 속에는 ‘dumb’라고 그려져 있다. 라운드를 마치고 나올 때도 프런트를 지나게 되는데 어떤 때는 유난히 선명하게 글씨가 도드라져 보이고 소리 내어 발음하다 보면 예전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 ‘덤 앤 더머’가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림을 다시 보게 된다.

해마다 연말이나 연초가 되면 골프동호회 총무들은 ‘동호회 연간 계약’을 하기 위해 골프장의 예약실과 전화 통화하느라 바빴던 것 같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골프장을 찾느라 동분서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동호회 회원수가 많은 총무는 목에 힘도 들어가고 골프장 측에서는 고생하는 총무의 그린피를 면제해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아침 일찍 연습장에 모여 노닥거리다 바람도 없고 햇살도 좋다는 누군가의 말에 클럽을 챙기고 골프장으로 직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겨울 골프는 예약보다 그날그날의 날씨에 따라서 급조된 경우가 많았고 그런 ‘번개팅’은 얘깃거리도 풍성했다. 그래서, 지나온 골프를 추억하며 얘기하다 보면 겨울 번개팅은 빠지지 않고 나왔던 것 같다.

겨울 골프의 장점은 호젓한 페어웨이를 걸으며 느긋하게 라운드를 즐길 수 있어 좋은 것도 있지만, 저렴한 그린피도 한몫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린피가 저렴해서 상대적으로 카트비와 캐디피가 비싸다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예전에는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높아서, 특히 바람과 추위를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 겨울 골프의 부킹이 무척 쉬웠다. 해가 짧은 겨울이지만 아침 일찍 시작하면 36홀을 도는 것도 어렵지 않았는데, 근교의 골프장은 날씨 좋은 날이면 오히려 캐디가 없어 라운드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원인 한 친구는 평일에 라운드를 하면 반드시 36홀을 돌아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귀중한 월차를 헛되이 보낼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라운드를 가자고 전화를 하면 돌아오는 물음은 항상 ‘36인가?’였다. 18홀은 미진하고 늘 못마땅하다며 ‘골프화 먼지만 털다 올 거야?’하면서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억울해했다. 우리는 그의 이름 앞에 ‘36’을 붙여서 ‘36 선생님’으로 불렀다.

가격도 저렴해서 부담이 없었고 앞팀과 뒤팀과의 간격도 느슨해서 한가하게 라운드를 즐기기 좋았던 시절이었다.

아일랜드 홀로 이루어진 파 3홀의 워터 해저드에는 얼음이 꽁꽁 얼어 있고, 그 위에는 색색의 공이 구슬처럼 모여 있다. 어떤 공은 절반이 얼음에 묻혀 있고 어떤 공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손을 대면 잡힐 것 같지만 의외로 멀어서 클럽으로 휘저어도 닿지 않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홀로 가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가 자꾸 돌아간다.

먼 옛날 얘기 같지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코로나19 이전의 시절에 있었던 일이고 전설처럼 아득해지는 감이 있다.

골프장 이용요금은 그린피, 카트비, 캐디피로 나뉘어 있지만 언뜻 그린피만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카트비와 캐디피를 합쳐서 지출하고 나면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가격이 정해진 뷔페식당에 들어가 잘 먹고 나오는데 추가 요금이 발생했다고 또 다른 계산서를 받아 든 기분 같은 것이랄까.

이를 당연시하는 골퍼들은 그린피와 카트비, 캐디피를 지불하지만 어느 누구도 가격인상 요인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슬그머니 카트비를 올리더니 캐디피도 덩달아 올랐고, 1/n 계산을 하며 잔돈을 셈할 때 어느 틈에 그린피도 올라 있었다.

한동안 코로나가 극성을 부릴 때는 클럽하우스 내 샤워 시설 이용을 금지했었다. 같은 기준으로 본다면 대기 시간에 그늘집 이용도 불가해야 옳을 것 같은데, 거의 30분가량을 기다리게 하고 결국 그늘집은 대기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어느 누구도 사회적 거리두기나 인원 제한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늘집 물가는 왜 그리 비싼 것일까. 마트에서 파는 똑같은 상품인데 가격은 3~5배 정도는 차이가 난다. 함께 골프를 치는 사람 중에 마트 운영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과 라운드를 할 때는 그늘집에서 음료수며 과자봉지를 들고 나올 수가 없다. 공산품 가격도 파는 곳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골프장에서 알게 되었다. 라운드가 끝나고 모자 쓴 자국을 남긴 채 귀가해도 골프장은 목욕비 한 번 주지 않았다.

올해도 비슷한 분위기일 것 같다. ‘동호회 연간 계약’과 같은 단체 계약은 무시하면서, 개인을 상대하고 여행사를 통해 패키지로 엮어서 이득을 취하려고 방향을 정한 것 같다. 요금은 무슨 명분으로든 또 오를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유입으로 골프장의 호황은 계속될 것이고 이제는 성수기와 비수기의 차이도 없어진 것 같다.

당일 예약으로 라운드를 즐기던 겨울 골프만의 낭만과 유희는 이제 사라진 제국의 전설처럼 아득할 것 같다. 골퍼가 대접받았던 시대는 가고 없다.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갈 수 없듯이 이제 그런 시절은 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자꾸 그 겨울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간다.

칼럼니스트 장보구

필명 장보구 님은 강아지, 고양이, 커피, 그리고 골프를 좋아해서 글을 쓴다. 그의 골프 칼럼에는 아마추어 골퍼의 열정과 애환, 정서, 에피소드, 풍경 등이 담겨 있으며 따뜻하고 유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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