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합스부르크 공국의 황제, 신념·의지 뛰어난 정치가

[역사 속 여성이야기] 마리아 테레지아
18세기 합스부르크 공국의 황제, 신념·의지 뛰어난 정치가

한 명의 자연인이 본인의 실력이든 주변의 덕택이든 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중요한 지위와 권력을 일말의 흔들림 없이 온전히 지키는 일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 지위와 권력을 노리는 주변 세력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를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주변의 야망을 물리치고 차지한 자리에서 자기가 가진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란 초인적인 신념과 강력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18세기 유럽 대륙은 여성들에게 그다지 녹녹한 곳이 아니었다. 섬나라 영국이나 그때까지도 미몽에 빠져있던 러시아에서는 더러 여왕이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정작 유럽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던 프랑스, 독일이 포함된 서유럽은 모두 남성들의 영토였을 뿐이었다.

그 속에서 여자이기 때문에 초래된 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여제가 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합스부르크공국)의 여자 황제이자 황후인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유럽 최고가문의 유일한 상속녀

18세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가히 유럽 최고의 가문이라고 할 만 하였다. 10세기경 작은 지역의 영주에서 시작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영토 확장을 가문의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정략 결혼으로 영토 확장에 나선 합스부르크가는 18세기 초반,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유럽 대륙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스페인,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왕은 모두 방계 합스부르크가의 사람들이었고, 유럽 어느 나라든 합스부르크가의 여인이 왕비가 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실제 합스부르크의 직접 통치지역인 오스트리아와 독일 일부, 헝가리 지역만 하여도 서유럽 영토의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18세기 초 이런 합스부르크 가문에도 고민이 생겼다. 아끼던 유일한 상속권자인 황태자가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직계 합스부르크의 대를 이을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 (1717-1780)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왕위 계승 전쟁

칼 6세는 자신이 죽은 뒤 합스부르크 직접 통치령이 여타 방계 합스부르크에 의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나라의 법을 고쳐 딸에게도 왕권을 물려줄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살아 생전에 합스부르크 통치령 아래 있던 각 지역의 제후들에게 이 법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을 받아 두었다.

그러나 막상 칼 6세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에 오르자 합스부르크가의 지배 아래 있던 바이에른과 작센 영주가 그녀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고 나섰다. 더불어 합스부르크의 방계이던 스페인과 이와 관련한 프랑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왕위 계승을 반대하고 나섰다. 프로이센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를 인정하는 대신 슐레지엔 땅을 내놓으라는 무력시위까지 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사건으로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일단 각국의 이권과 국가간의 적대적인 관계 등을 고려한 모든 외교적 수단을 이용하여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는 결국 슐레지엔을 잃지만 이후 몇 차례의 전쟁을 통해 일부 땅은 다시 회복한다.

그리고 말많은 외국의 친척 황제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외적으로는 남편 프란츠 스테판을 내세워 남편과 함께 공동의 황제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다스렸다.


가정에서는 순종적 아내, 정치에서는 뛰어난 위정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스테판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미남자였다. 마리아는 스테판과 열렬한 연애 끝에 19살에 결혼하였다. 이 부부는 금슬 또한 유별나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어른으로 성장한 자녀는 10명으로 모두 합스부르크가의 목표인 영토 확장을 위해 정략결혼을 하였다. 그 중에 막내딸이던 그 유명한 마리 앙트와네트는 적대적이던 프랑스와의 관계회복을 위해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스테판은 명목상으로는 공동 황제였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건축과 예술에 관심이 많아 정원을 가꾸고 궁전을 꾸며서 아내를 즐겁게 하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실제적인 정치는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녀는 소녀시절 여성의 덕목만을 교육 받으며 자랐지만 막상 정치현실이 자신의 수중에 떨어지자 이를 자유자재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특히 외교술이 뛰어 났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내정에도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녀는 유럽 어느 나라의 황제보다 더 유능하고 힘있는 군주였다.

그러나 막상 가정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순종적인 아내의 역할을 자처하였다고 한다. 정치에서 소외되고 있는 남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며 가정의 화목을 이끌어 나간 것이다.


완벽한 18세기의 여왕

18세기 유럽은 새로운 사상으로 들끓고 있었다. 계몽주의 사상이 대히트를 친 것이다. 각 국의 왕들은 이전까지 잔혹하고 절대적이던 왕권의 이미지를 벗고 먼저 깨어난 자의 입장에서 백성을 이끌어 나라의 부강까지 이룬다는 이른바 계몽군주의 단꿈에 젖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또한 그런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내정을 대폭 재정비하여 가혹한 농민 착취를 금하는 법을 만들고, 요즘으로 말하면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제도를 마련하여 국민 의무 교육제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녀는 온건한 18세기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전의 절대적인 왕권에 대한 향수는 여전하였고 민족을 중심으로 한 국가보다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영토적인 국가 개념에 더 연연했다. 급진적인 계몽 사상에 일말의 거부감마저 품고 있던 그녀는 계몽사상에 심취해 있던 아들 요제프 2세의 앞뒤 가리지 않는 행동을 매우 경계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지위를 결코 모래처럼 흘려버리지 않고 단단히 움켜쥔 여성이었다. 그녀의 정치 사상은 어느 정도는 시대적인 한계성을 품고 있었지만, 이 또한 앞뒤 가리지 않은 서두름을 경계한 탓에 나라의 안정적인 부강을 이루어 내는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였다.

18세기, 남성 중심의 서유럽 사회에서 노련한 여성 위정자로서 자신의 지위와 나라를 굳게 지켜낸 마리아 테레지아의 솜씨는 요즘의 여성 정치가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시사성을 던져주고 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3-12-05 09:49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