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여성이야기] 마리 앙트와네트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지만 모르는 것이 죄가 될 경우가 더 많다. 특히 한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갈 위정자와 그 측근의 사람들이 일반 민중의 삶을 모르고 지나간다면 그것은 죄를 넘어서 악이 되고 만다.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당사자가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심코 한 일이 일파만파가 되어 나라 전체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는 대단히 화려하고 부강한 국가였다.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은 마음껏 사치와 향락을 누렸다. 그러나 프랑스의 부강은 왕실과 일부 고위 귀족층에게만 국한 된 것이었다. 상류층들은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이 겪고 있던 빈곤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바로 옆에서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것도 모른 채 풍요를 구가하였다. 그들 세상에 무지했던 왕실과 귀족들의 최정점에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있었다.


사치의 대명사

백성들이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이유가 빵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마리 앙트와네트(1755-1793)가 “그럼 케이크를 먹지 그러냐”는 말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 마리 앙트와네트가 이 말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이야기가 마리 앙트와네트의 일화로 남았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백성들의 가난에 대해 무지했으며, 오로지 귀족사회의 풍요로움 밖에는 몰랐던 왕비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마리 앙트와네트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들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존재였다. 그녀가 궁중에서 벌인 화려한 파티와 그녀가 새로 해 입은 사치스러운 드레스에 대한 소문이 당장 오늘 먹을 빵 조각 하나 없는 백성들의 귀에 전해지면서 그녀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다. 게다가 그녀는 프랑스 사람도 아닌 오스트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불리며 백성들의 공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정략결혼

마리 앙트와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화려한 궁중 문화에 젖어 살았던 마리 앙트와네트는 그 세계가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자란 철부지였다.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지만 외교적인 합종연횡으로 일시적인 평화가 필요했다.

당연한 것처럼 두 나라간에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트와네트는 이러한 국제 관계에 의해 결혼을 하였다.

이 결혼이 마르 앙트와네트에게는 그다지 커다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가의 궁정 생활처럼 화려한 궁정문화가 있었고 그녀는 이를 마음껏 즐겼다. 노회하고 정략적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 비해 마리 앙트와네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왕비 그 자체였다.


착하지만 무능한 왕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결혼한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는 왕비와 또 다른 의미에서 세상에 무지한 남자였다. 그는 화려한 파티와 궁중 생활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사냥과 책에 빠져 정치에는 무심하였다. 눈앞에 결정해야 할 정치적인 현안을 판단하는 것도 느리고 둔했다. 그는 사치스러운 아내 마리 앙트와네트의 폭주도 막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는 매우 호인으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였으나 정치적인 소양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는 연일 파티를 벌이고 그녀 옆에서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세상이,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풍요로운 세상은 이대로 계속 될 것만 같았다.


마침내 혁명은 터지고

그러나 1789년 프랑스 국민들은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바스티유 감옥으로의 행진을 시작으로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황실과 귀족들에게 이때까지의 잘못을 물었다. 혁명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굶어 죽어가던 백성들로부터 시작되었던 혁명의 물결은 지식인과 부르주아 계급에까지 확산되었다. 왕실과 귀족들은 궁지에 몰려 그 동안의 사치와 방만 그리고 무지에 대한 죄 값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는 그때까지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는 프랑스 국민의 의지를 받아들여 새로운 정치를 할 것을 기약하기보다는 외세를 끌어들여 혁명세력을 진압하고 다시금 과거의 사치와 방만으로 돌아 갈 것을 원했다.

국내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왕과 왕비는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번번히 저버리며 스스로 죽을 올가미를 죄고 있었다.


단두대에 오른 왕비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는 프랑스를 버리고 오스트리아로의 탈출을 기도한다. 그러나 이 탈출은 얼마 가지도 못해 혁명군에게 발각되고 이 일로 왕실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게다가 마리 앙트와네트가 그녀의 친정 오빠인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2세에게 혁명군을 진압할 군대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알려 진다. 가뜩이나 그녀를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못마땅해 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마리 앙트와네트를 프랑스를 망하게 할 마녀로 인식하였다.

왕실과 마리 앙트와네트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할 즈음 프랑스혁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792년 가장 급진적이고 열혈한 정당이 혁명 주도세력이 되면서 혁명 정국도 가파르게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왕실에게는 아주 나쁜 소식이었다. 혁명의 와중에도 지엄한 왕실에 대한 일말의 경외감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국민의 정서가 이때 급작스럽게 전환된 것이다.

혁명 주도 정당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한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하고 그 해 10월 마리 앙트와네트도 남편의 목을 자른 단두대에 올라 사형당한다.

위정자와 그 측근의 무능과 무지는 오랫동안 백성을 괴롭히는 칼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그 칼이 되돌아와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저 화려한 궁중의 아름다운 꽃으로만 살고 싶어했던 마리 앙트와네트. 그녀는 단두대에 오르면서까지도 자신의 죄목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에 대해 하나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죄로 죽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3-12-11 13:24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