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일본을 딛고 선 천재무용가일제강점기와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부대끼며 산 예술가

[역사 속 여성이갸기] 최승희
춤으로 일본을 딛고 선 천재무용가
일제강점기와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부대끼며 산 예술가


어떤 장르의 예술이든 사회적, 역사적 환경을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때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에 환경을 벗어나 더 높은 경지로 날아 오를 수도 있다. 정치적 상황이 매우 어둡거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나라에서 위대한 문학가나 미술가가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도 예술이 가진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20세기 초반 한반도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식민지 정치 현실에서 허덕이며 희망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때 그런 암담한 환경을 뚫고 높이 무대 위로 도약해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이 되어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였다.


아름다운 코리안 댄서

1930년대 한반도에는 그 이름이 희망 자체인 사람들이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과 코리안 댄서로 해외에 그 명성을 드높인 최승희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 중에서 최승희는 해외에 나가 한국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고 한국의 춤을 당당히 공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937년 구미 각국 순회 공연부터 시작한 최승희의 해외 공연은 눈부신 성공을 이루었다. 당대 서구의 많은 예술가들이 최승희의 춤에 흠뻑 빠졌다. 그 중에는 피카소와 장 콕토 등도 있었다.

최승희는 해외공연 시 자신을 언제나 코리안 댄서라고 명시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의 댄서로 오해받기 싫다는 강한 의지였다. 식민지 한반도의 사람들은 최승희의 당당함과 용기에 환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깊이 영향을 받고, 또 그 환경을 벗어나 높이 도약한 뛰어난 예술가였다.


총명하고 예술적인 소녀

최승희(1911-?) 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한 소녀였다. 소학교를 월반에 월반을 거듭하여 4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였다. 숙명 여학교에 다니던 열 여섯 되던 해, 최승희에게는 인생을 결정할 사건이 생겼다. 당시 한국에 공연을 온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본 것. 최승희는 이날 이후 자신의 앞날을 무용가로 결정하였다.

그녀의 집안에서도 최승희의 선택을 환영하였다. 일찌감치 개화한 집안에 기라성같은 엘리트 형제들을 둔 덕분에 최승희는 축복 속에서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머리가 좋고 예술적 감각이 누구보다 뛰어났던 최승희는 이시이의 무용단에서도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시이 무용단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무용가로 성장했다. 이시이를 따라 일본 동경으로 무용을 배우러 갔던 최승희는 첫 번째 한국 귀국 때 이미 프로 무용가로서 자신의 독무대를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한국무용의 체계를 잡다

최승희의 무용관은 다분히 사회적이며 민중적이었다.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무용을 좋아했고 예술이 상류 계급에만 봉사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했다. 최승희는 안락한 이시이 무용단의 1급 무용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한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가시밭길을 걷는 심정으로 불모지 한국에 무용 문화를 심으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1929년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린 최승희는 곧 이어 한국 전통무용에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한국의 전통무용 속에서 백성과 어우러지는, 그녀가 생각하는 참다운 무용의 형태를 발견했다. 그녀는 많은 한국 전통무용 전수자를 쫓아다니며 그들의 무용을 사사한다.

그리고 그것을 신タ諛?과감히 접목시킨다. 그녀는 새롭지만 여전히 한국적인, 아름다운 무용 춤사위를 만들어 냈고 직접 무용수로서 그 아름다움을 구현하였다.

최승희는 승무. 칼춤, 부채춤, 가면춤 등을 무대 위로 올렸다. 이전 시기까지 기방이나 기층의 백성들 사이에서 비공식적으로 행해졌던 한국의 춤 문화가 마침내 무대를 얻은 것이다. 그녀의 이 춤들은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고 최승희는 자신이 개발한 한국무용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때로 너무 뛰어난 예술가들은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쉽게 정치적으로 이용된다. 일본은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최승희가 코리안 댄서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전쟁을 목전에 둔 일본으로서는 최승희가 너무 좋은 선전 도구였다. 일본 군부는 최승희에게 ‘전선 위문 공연’을 강요한다.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가장 자랑스러운 세계적 무용가가 된 최승희가 전선을 돌며 공연을 하는 것은 일본군의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뿐 만 아니라 이미 구미에서 명성을 얻은 최승희였기에 외국에 대한 선전효과도 아주 컸다.

1942년부터 2년 간 최승희는 일제의 총칼 아래서 하는 수 없이 만주와 중국 본토 등지를 떠돌며 전선 위문공연을 다녀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삶에 있어서 가장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월북과 그 이후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일제 시대부터 사회주의 문학을 하던 문학가이자 이상주의자였다. 원래부터 무용을 통해 사람들과의 공감을 추구하였던 최승희에게 안막은 더 할 나위 없는 배우자였다. 1945년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한반도의 정치 상황 속에서 최승희는 남과 북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남편을 따라 월북의 길을 택한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월북 후 얼마 되지 않아 숙청 당하고 만다. 최승희 또한 1969년 정치적으로 숙청 당하고 그 이후 함경도 일대를 떠돌다 80년대 초반에 죽었다고 한다. 최승희와 안막의 예술가적이며 이상적인 세계관을 받아들일 현실 정치는 한반도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한 명의 천재적 예술가를 키우는 것은 훌륭하든, 훌륭하지 않든 그 예술가가 처한 주변의 환경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 예술가는 혼탁하고 어지러운 환경을 벗어나 높이 비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 천재 예술가를 키웠던 바로 그 환경이 예술가의 발목을 낚아채기도 한다.

우리에겐 천재 무용가 최승희가 있었다. 그녀는 식민지의 핍박 받는 한국의 예술가로 태어나 세계적 예술가로 성장하였지만 결국 그 한국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에 날개 꺾인 비운의 운명을 살아야만 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3-12-24 17:43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