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소재·과감한 디자인과 컬러로 거리 채색, 신데렐라의 끔을 신는다

[패션] 패션의 계절, 구두에 중독되다
다양한 소재·과감한 디자인과 컬러로 거리 채색, 신데렐라의 끔을 신는다

경기가 나빠지면 노출이 심해지고, 치마 길이가 짧아지며, 속옷 매출이 상승한다? 현실과 반비례하는 반향 심리가 작용하는 패션. 이러한 현상은 구두도 예외가 아니다. 올해 여성들의 구두는 그 어느 해보다 화려해졌다. 봄을 표현한 화사한 색상의 구두가 꽃샘 추위가 무색할 정도로 온 거리를 봄 분위기로 가득 채우고 있다. 올봄 구두 유행 경향과 함께 생각해 보는 ‘구두중독’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

- 컬러풀하고 강렬한 느낌의 슈즈 선호

지금은 잘 나가는 패션지 여기자로 활동 중인 동창 L. 펑펑 눈이 쏟아질 것 같던 한겨울에도 맨발로, 발가락이 보이는 오픈 토 슈즈를 즐겨 신었다. 춥지 않냐고 물어도 ‘익숙해져서 괜찮다’라고 말하던 L. 한 아이템도 꼭 두 가지 색 이상 구입하던 습관 말고도 시공을 초월한 스타일리쉬한 태도(?)가 오늘의 그를 만든 모양이다. 그래도 역시, 한겨울에 발가락을 내놓고 다니는 일이란 웬만해서 따라하기 힘든 일이었다. 앞서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선구자의 용기와 희생이 없더라도 이제는 한겨울에 끈으로 여미는 스트랩 슈즈를 아무렇지도 않게 신고 다닐 수 있다. 그뿐인가. 한여름 패션쇼에도 모피 트리밍이 장식된 구두나 롱부츠가 등장하는 시즌리스(seasonless), 계절파괴 현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같은 TPO(Time, Place, Occasion)를 파괴하는 용기는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그 이유는 우선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문화를 주도한 ‘파티문화’와 ‘믹스&매치’의 영향을 들 수 있겠다. 용모단정의 마침표를 찍던 검은색, 중간 높이의 구두는 이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유니폼차림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과감한 컬러와 디자인의 구두들이 거리를 누빈다. 잘 나가는 패션리더들의 차림이 낮은 허리라인이 특징인 로 라이즈 데님 팬츠에서 하늘거리는 로맨틱 시폰 스커트의 행렬로 이어지면서 장식이 많다 못해 오색찬란한 컬러풀 슈즈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은 더욱 강렬해졌다. 금ㆍ은색, 원색적인 빨강, 노랑, 파랑, 분홍 신까지. 얼마 전 한 여성복 브랜드 런칭 행사장에 약속이나 한 듯 청바지 차림에 나란히 형광색 에나멜 구두를 신고 나타난 여배우들의 코디 센스는 이 같은 경향을 몸소 체험하게 만든다.

멋지게 보이고 싶은 욕망은 지금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다. 신분상승을 위한 도구로 구두를 이용한 신데렐라의 꿈은 유리구두에 의해 이루어졌고 구두에 대한 여자들의 꿈은 분홍 신에 매혹된 소녀가 등장하는 동화 <분홍신>의 비극에 비유할 만하다. 쇼핑에 중독된 사람들을 일컫는 쇼파홀릭(shopaholic)에 버금가는 슈어홀릭(shoeaholic). 필리핀 독재자의 안주인이었던 이멜다 여사는 1,060켤레라는 구두 숫자로 충격을 주었고 그 당시 구두는 낭비와 과장의 결정체였다.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으로 국가적인 영웅이었던 에바 페론은 ‘페라가모’ 마니아였다. 수십 켤레의 페라가모 구두를 갖고 있던 페론을 기념하기 위해 페라가모는 그녀가 즐겨 신던 14가지 모델의 구두를 제작해 자사 박물관에 전시하기까지 했다.

영화나 드라마 속 구두 중독자들은 어떤가. 영화 <웨딩플레너>의 제니퍼 로페즈는 길 한가운데서 덤프트럭이 달려오는 와중에도 맨홀에 낀 구찌 하이힐을 쥔 손을 놓지 못했고, 드라마 <섹스 앤 더시티>의 여주인공 캐리는 집세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구두쇼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걸핏하면 “그래서, 나 어제 구찌에서 320달러 짜리 구두를 샀어” 라는 대사를 읊조린다. 마치, 오후에 커피 한 잔을 마셨다는 말처럼 그녀의 일상을 보여주는 대사다. 캐리가 강도를 만나는 장면에서 “펜디 바게트 백이나 반지, 시계는 다 가져가도 좋으니 제발 블라닉 구두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사정한 장면도 압권이었다.

실제로도 구두광인 캐리역의 사라 제시카 파커가 애용하는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은 스틸레토 힐의 왕자. 모양을 중시한, 걷기는 힘든 구두 메이커다. 마돈나가 “섹스보다 마놀로 구두가 좋다”고 말하기도 했고 요조숙녀 원판인 드라마 <야마토나데시코>에서도 여주인공이 외국만 나갔다 오면 사들고 오는 신발도 마놀로 블라닉이다. 400달러에서 1,000달러를 호가하는 고가에다 아찔한 4인치의 구두. 굉장히 높고 가느다란 굽에 끈으로 된 디자인을 선호하는 캐리를 따라 여러 여성들이 발목을 접질리지 않았을까.

-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스틸레토 힐

이전까지 여성들이 신는 하이힐은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발표로 여성들의 하이힐 사랑을 힘겹게 했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를 듯 높고 뾰족한 굽의 스틸레토 힐은 여체를 축소한 듯한 모양으로 여성들의 분신처럼 그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이힐은 곧 에로틱한 여성미의 극치다. 날씬한 몸매를 갈망하는 것과 같이 날씬한 하이힐은 여성의 꿈. 하이힐은 여성들에게 성형수술이나 다름없다. 하이힐을 신음으로 최대 10㎝까지 키를 늘릴 수 있으므로. 하이힐에 대한 환상은 결코 남성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까닭에 더욱 매력적이다.

구두에 쏟아지는 관심과 애정은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활동적인 여성들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구두는 평등하다. 구두는 날씬한 몸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지려고만 한다면 치수 따위는 상관없다. 호사로운 해외명품 쇼 무대를 거닐었던 환상적인 구두까지도 내 발 밑에 거느릴 수 있는 특권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구두는 자유를 준다.

블라닉 같은 구두를 신으려면 발 치료 전문의를 알아보는 게 좋을 것이라는 충고를 받게 될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뉴욕의 발 전문의 수잔은 블라닉 같은 하이힐 때문에 발을 다쳐 병원을 찾는 환자가 지난해 약 30% 증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분홍색 악어가죽 샌들을 포함해 12켤레의 블라닉 구두를 갖고 있다. “세월이 흘러 뚱뚱해져서 검은색 이브닝드레스가 몸에 안 맞게 되더라도 구두는 여전히 신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모든 구두광들의 합창이나 다름없다.

- 세계 최고의 브랜드 수입, 눈높이 높아져

2000년대 국내에도 디자이너의 이름이 붙은 구두가 등장하면서 구두에 대한 한국 여성들의 욕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에스콰이어, 금강으로 대표되던 한국 구두시장의 격변, 살롱화로 분류되던 캐릭터 슈즈의 대열에 개성 있는 브랜드들이 등장했다. ‘카메오’, ‘수콤마 보니’, ‘최정인’ 같은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그들이다. 여기에 ‘나인웨스트’, ‘캐이트 스페이드’ 같은 성공한 미모의 여성을 떠올리게 만드는 뉴요커 스타일의 브랜드가 수입되면서 이 땅의 ‘구두중독자’ 양산을 부추겼다. 또 청담동의 수입멀티숍들이 마놀로 블라닉에서부터 크리스티앙 루브탕, 미셸 페리 등 해외에서 입소문이 자자한 구두를 들여와 전시함으로 눈높이를 높였다. 워낙 찾는 사람들의 개성이 다양한 까닭에 의류업체들과 마찬가지로 구두 업체들도 계절과 시기를 넘어 반응생산과 신 모델 출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고, 요즘은 굽이나 장식을 원하는 대로 주문할 수 있다니 구두광들에게는 반가운 일일 것이다.

- 경쾌한 컬러, 화려한 프린트의 하이힐 유행

구두의 굽이나 코 모양은 유행에 따라 변한다. 레트로 무드의 유행에는 둥근 코의 펌프스가, 파워풀하고 섹시한 여성미를 강조할 때는 뾰족한 스틸레토 힐이 유행했다. 지난 겨울은 미니스커트의 유행으로 어느 때보다 부츠가 사랑받았다. 그러나 믹스&매치 스타일의 일반화는 이 모든 디자인의 구두를 동시다발적인 애정공세에 시달리게 했다.

올해 구두는 소재와 컬러의 제한이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올봄 구두 트렌드 컬러는 핑크, 옐로, 그린 등의 다양한 파스텔 톤에 청록, 초록 등의 시원하고 경쾌한 컬러가 액센트. 소재는 에나멜 소재에서 트위드 소재까지 의상을 발에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반짝거리는 소재로 포인트를 주거나 다양한 모양의 레이스 등 디테일을 이용하며 끈(스트랩)을 다리에 자유롭게 감아 개성 연출할 수 있게 디자인 됐다.

컬러와 소재가 다양해진 것과 함께 이번 시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예년보다 훨씬 높아진 구두 굽이다. 날씬하고 뾰족한 하이힐, 화려한 프린트가 섹시한 슈즈는 이번 시즌 가장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이는 7~8㎝가 대중적이다. 탑처럼 하늘을 찌를 듯한 구찌 스타일의 하이힐은 동양인에게는 조금 무리이기 때문.

다가오는 봄 트렌드로 컬러풀 스틸레토 힐 슈즈를 꼽고 있지만, 이보다는 弩玲?색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구두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실크 소재(비 오는 날을 피해 곱게 신어야 하는)의 사용도 눈에 띠고, 화려한 프린트 패턴, 겨울 소재인 스웨이드, 모피까지 등장하고 있다. 화려한 색상의 구두를 고를 때는 두 가지 이상의 컬러가 믹스된 스타일이 컬러 코디에 이득이다. 버클, 스티치, 끈 장식 등 디테일이 많은 디자인은 심플한 스타일의 코디에 변화를 주는 아이템으로 각광 받고 있다.

패션쇼를 누볐던 디자이너 부티크의 호사스런 구두들이 그대로 쇼윈도에 내걸렸다. 컬러에서 소재까지 제한이 없는 구두의 화려한 외출. 지금까지 가방이 트렌드를 반영하는 중요한 패션 아이템이었다면, 올해 만큼은 슈즈가 패션을 주도하는 아이템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화려하고 개성 있는 구두로 봄 거리를 내딛는 당신. 사치라는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물집과 굳은살이 떠날 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의 자존심을 꺾지 않는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슈어홀릭’이다.

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3-11 22:22


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suzanpark@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