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과 사상을 택한 중국의 국모중국 대부호 송씨가 세 딸의 서로 다른 인생행로, 혁명가 손문과 결혼

[역사 속 여성이야기] 송경령
조국과 사상을 택한 중국의 국모
중국 대부호 송씨가 세 딸의 서로 다른 인생행로, 혁명가 손문과 결혼


사람의 인생은 때로 그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였나에 따라서 크게 변화한다. 한 부모 아래서 한 나무에 난 가지처럼 자라던 형제 자매도 선택한 배우자의 사상과 이상에 영향을 받으며 마침내 접점이 사라진 채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걷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배우자의 선택은 한 인간이 성인이 된 이후 가지게 된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발현하는 계기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20세기 초반 중국에는 아름답고 총명한 세 명의 자매가 있었다. 이들은 어린 시절 둘도 없이 친밀한 언니 동생이었지만 성인이 된 이후 각자가 선택한 배우자의 길을 따라 인생의 여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들은 광동성의 부호 송씨가의 세 명의 딸이었다. 그 중에 중국의 국모로 칭송받는 송경령이 있었다.

- 총명하고 아름다운 세 자매

광동성 대부호 송씨가의 주인인 송가수는 서구 문명에 일찍 눈을 뜬 사람이었다. 그는 누대를 거쳐 내려온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의 부강을 위해서는 청나라가 아닌 다른 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주창하는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다. 모두 총명하고 아름다우며 야심이 있는 여인들이었다. 첫째 송애령, 둘째 송경령, 셋째 송미령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학교를 다녔으며 나란히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라 똑같이 위슬리 대학을 졸업하였다. 무엇하나 그녀들의 인생을 전혀 다른 길로 이끌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가치관이 달랐다. 이들의 인생을 두고 중국 사람들은 흔히 송애령은 돈을 사랑하였고, 송경령은 조국을 사랑하였으며, 송미령은 권력을 사랑하였다고 말하곤 한다. 이 말은 이들이 선택한 배우자로 인해 나온 말이다. 첫째 송애령은 중국 산시성의 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하며 중국의 경제를 남북으로 아우르는 대부호가 되었다. 막내 송미령은 권력을 쫓아 당시 군벌의 대표주자이자 가장 정치적이었던 장개석과 결혼하며 그의 야심을 보좌하였다. 그리고 가운데 송경령은 중국 근대사상의 아버지이며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국부로 존경받는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손문을 택했다.

- 손문과의 만남, 나이를 극복한 결혼

송경령(1892-1981)은 언니 애령이나 동생 미령에 비해 침착하고 사려깊은 성격을 가졌다. 그녀는 모든 일에 심사숙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독립심이 강하고 자신의 이상적인 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길을 조용히 모색하고 있었다. 송경령은 스무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이던 손문의 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손문이 제 2혁명에서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길에 오르자 이를 수행한다.

송경령은 스물 두 살이 되던 1914년 일본에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손문과의 결혼을 감행한다. 그때 손문의 나이는 이미 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손문과 송경령의 결합은 이상적이었다. 1916년 다시 상해로 돌아온 손문은 많은 시간을 그의 민족주의 사상의 집대성에 투자했고, 그 옆에는 항상 송경령이 있었다. 송경령은 손문의 저작들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손문이 외국의 정치가들과의 통교가 필요할 때는 뛰어난 어학실력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과정에서 송경령은 손문의 삼민주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이를 체화하였다. 남편 손문을 돕는 동안 송경령 자신도 한 명의 사상가로, 중국을 미래를 짊어질 혁명가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 조국을 생각하다

1925년 손문은 북경에서 타계한다. 송경령과 손문의 결혼 생활은 불과 10여 년 남짓이었다. 그러나 그 10년은 한 명의 총명한 여성을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지도자로 변모시켰다. 손문 사후 송경령은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적극 개입하며 남편의 유지를 따라 중국 민중에게 가장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항상 고민하고 실천했다.

송경령은 국민당 정부의 수장인 장개석과 강하게 맞섰다. 송경령은 장개석이 남편 손문의 이념과 이상을 왜곡하고 중국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권력 야욕에 젖어 있다고 판단하고 그와 대립하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장개석과의 대립은 평생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장개석의 아내였던 여동생 미령과의 관계도 여기서 끝을 맺게 된다. 송경령은 빈사 상태에 빠진 중국과 중국 민중들을 구원할 길을 여러 가지로 모색하였다, 그녀는 반일과 반제국주의를 주창하고 중국 혁명의 주요 문제인 농민과 토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더불어 여성과 아동 복지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중국 현대사를 누빈 파란의 삶

1945년 9월 항일 전쟁에 승리한 후 송경령은 모택동과 손을 잡고 여동생 미령과 그녀의 남편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낸다. 송경령은 남편 손문의 뜻을 이어받을 정부로 중국 공산당을 택한 것이다. 1949년 중국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한 이후 송경령은 두 차례나 국가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이후 그녀는 중국 현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활약하였다.

송경령은 1981년 만선 임파선백혈병의 악화로 89세의 파란 많은 삶을 마친다. 죽음에 임박한 시점에서 송경령은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송경령의 긴 인생 속에서 손문과의 만남은 불과 10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10년이 그녀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나머지 삶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다. 평생을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아 조국 중국을 생각하며 살아간 송경령. 그녀는 손문과의 결혼 이후로는 언니 애령과 동생 미령과도 절연을 하여야 했다.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너무도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중국 현대사를 종횡무진 누비던 송씨 집안의 딸들의 삶은 2003년 10월 막내 송미령이 미국에서 죽으면서 역사가 되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03-11 22:27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