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지지 않는' 대제국을 열다가냘픈 그러나 영리한 여왕, 의회 민주주의 이룩하고 최대 식민지 건설

[역사 속 여성이야기] 빅토리아 여왕
'해 지지 않는' 대제국을 열다
가냘픈 그러나 영리한 여왕, 의회 민주주의 이룩하고 최대 식민지 건설


한때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고 불린 적이 있다. 지구가 돌아 영국 본토에는 밤이 오더라도 세상 어딘가 영국의 식민지 중 하나는 낮이라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은 대표적인 산업 자본주의 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인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였다. 또 빈부 격차가 극심한 대표적인 나라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얼핏 들어 명예로워 보이는 말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만큼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정치 경제적으로 착취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영국이 국력에 비해 국제적 위상이 턱없이 높은 것도 이유가 있다. 한때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였던 역사가 오늘날까지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시대, 영광의 이면에 잔혹한 착취를 숨기고 있던 시대, 그 시대를 보통 사람들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

빅토리아 시대는 1837~1901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통치하던 64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에 영국은 그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가장 전성기를 누렸다. 영국의 전통은 이때 와서 비로소 정돈이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 이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쓸어 담는 국가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던 의회 민주주의가 두 개의 당으로 정리되며 정착하였다. 그 이면에 무수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영국은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최대의 그리고 최선의 국가였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시기. 영국의 통치권자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그 상징성만으로 영국의 행보에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4번째 아들 켄트공의 딸이었다. 왕위와는 그다지 가까워 보이지 않은 위치였기에 그녀는 자랄 때 제왕의 학습보다는 일개 공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경직되고 엄한 사람이어서 빅토리아도 엄격하게 다뤘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분수를 깨닫는 것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치는, 다소 지루하고 재미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예상치 못하게 백부 윌리암 4세가 죽자 어느날 왕권이 빅토리아 손에 떨어졌다. 얼떨결에 영국의 왕위에 오른 작고 가냘픈 빅토리아에게 제왕의 카리스마가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분수를 깨닫는 것에만 골몰하던 공주에게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처럼 다가와 제왕의 위엄을 가르쳐준 사람은 당시 영국 총리였던 멜번 경이었다, 빅토리아는 이제까지 그녀를 눌러왔던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세계 최고의 국가, 영국의 여왕이 갖추어야 할 긍지와 오만과 카리스마를 배워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 20세 때 한 남자를 만난다. 독일 색스코버그 고터가의 앨버트 공과 결혼한 것이다. 이 결혼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성공적인 결혼이었다. 앨버트 공은 지적이고 사려가 깊었으며 그녀에게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의 도가 어떠한가를 직접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 여왕을 둘러싼 남자들

빅토리아 여왕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 곁에서 보좌하는 남성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남편을 비롯하여 그녀가 재위하고 있을 때 총리를 맡았던 사람들 모두 여왕에 대해서는 충성심이었고 영국과 여왕을 영광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고 있었다. 영국의 명총리로 불리는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도 그 속에 속한다. 이 두 사람은 선의의 경쟁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시키며 영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 두 사람의 총리 덕분에 유럽 대륙에 勞箏旼?혁명의 바람을 피해갈 수 있었다. 백성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여 봉기하기 전에 나라에서 먼저 그들의 요구 조건을 일부 반영하는 정책을 시행해 큰 분란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 정치의 기본은 이때 확립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장중하고 엄숙하며 도덕주의자인 글래드스턴이 비해 재기발랄하고 영민한 디즈레일리는 더 좋아했다. 빅토리아와 디즈레일리는 대외정책에서 한 뜻이 되어 영국의 식민지 확대에 열을 올렸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제왕의 칭호를 자신의 문장에 새겨 넣으며 대영제국의 영광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영국의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고 한다. 이러한 영국 군주의 위치를 자리 매김 한 사람이 빅토리아 여왕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왕이 가진 통치권의 일부를 기꺼이 내주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왕들은 끝까지 자신의 권리를 붙잡고 있다가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빅토리아 여왕은 영리했다. 그녀는 남편 앨버트 공이 살아 있을 때부터 국사의 일부를 내어놓기 시작해 1861년 남편이 병사하자 버킹검 궁전으로 물러나 일반적인 국무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자신이 내놓은 통치권의 일부를 총리와 내각이 백성들의 구미에 맞게 행사하는 동안 자신의 안전과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면서도 중요 사안의 마지막 결정권은 끝까지 쥐고 있었다.

그녀는 또 남편 앨버트 공과 역대 총리들의 영민함에 기대어 자신과 왕실, 더 나아가 영국의 안정을 꾀했다. 무리한 고집을 부리지 않고 때에 따라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면서도 국사 전반에서 남성들의 힘을 빌렸다. 한마디로 빅토리아 여왕은 짐짓 물러 나 있는 듯 하나 속내로는 그들을 조정하며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것을 다 내어준 듯했지만 실상 빅토리아 여왕이 내놓은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전 국민의 지지와 사랑, 총리 및 내각의 진폭적인 신뢰, 그리고 영국과 영국 왕실의 안녕, 더불어 자기 자손들의 입지까지도 확고히 하였다.

19세기 영국은 한 명의 노회하고 전략적인 여인의 지혜로 인해 전성기를 누렸다. 눈앞에 보이는 권력에만 집착하지 않고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 대해 크게 판세를 그릴 줄 알았던 현명하고 양보심 많은, 그러나 왕으로서의 카리스마는 절대 놓쳐버리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의 존재로 인해 대영제국의 전설이 완성된 것이다.

김정미 방송 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04-22 16:51


김정미 방송 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