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수렁에서 빛난 영상미학다큐멘터리 연출한 독일작가, 역사적 평가에 휘둘리기도

[역사 속 여성이야기] 레니 리펜슈탈
나치의 수렁에서 빛난 영상미학
다큐멘터리 <올림피아> 연출한 독일작가, 역사적 평가에 휘둘리기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한달 여 남짓 남았다. 요즘은 올림픽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조금은 시들해진 감이 없지 않지만, 한때 올림픽은 개최하는 국가의 국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였다.

올림픽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적도 무척이나 많았다. 가깝게는 80년대 냉전 시대의 올림픽이 그랬고, 멀리는 2차 대전 직전 독일이 개최했던 베를린 올림픽이 그랬다.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가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 시키는 대회로 각종 선전도구로 이용되었다. 그 중에 특히 올림픽 전체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는 빼놓을 수 없는 선전 도구였다. 한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저 선전용으로 볼만한 지루한 다큐멘터리가 아니었다. 완벽한 영상미학을 갖춘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올림피아>라는 이름의 2부 작 다큐멘터리는 영화사의 새로운 경지를 연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연출 한 사람은 독일의 여성작가 레니 리펜슈탈이었다.


- 20세기 논쟁의 중심에 있던 감독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은 영화사에 있어서 20세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만든 작품들은 영화 기술적으로, 미학적으로 너무나 훌륭하며 획기적이었지만, 문제는 그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나치의 카메라가 되어 나치가 원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그것도 너무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어 냈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영화사적 공로를 인정하려고 하면 정치색이 문제 거리가 되었다. 혹은 그녀를 나치의 전위로 몰아 세우려 하면 어김없이 그녀가 만들어낸 영화의 새로운 예술경지가 뒤를 잡아 끌었다. 게다가 그녀는 101세라는 나이로 장수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 논쟁의 중심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은 나치와는 상관이 없이 오로지 영화 미학만을 추구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해왔다. 영화 역사는 1세기간의 리펜슈탈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 히틀러와의 만남

레니 리펜슈탈의 파란 만장한 삶은 무용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유럽 전 무대를 돌며 떠오르는 신예로 성장했다. 그리고 곧 이어 그녀는 강건한 신체와 아름다운 미모를 기반으로 산악영화의 히로인으로 성장한다. 그녀가 영화 배우로 계속 남았다면 그 일생 또한 화려한 스타덤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배우로 만족하지 못했다. 곧 이어 레니 리펜슈탈은 자신의 프로덕션을 차리고 영화 제작, 시나리오, 연출, 주연 등을 도맡아 하기에 이른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이 <<푸른 빛>>. 이 작품은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되어 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해낸다. 레니 리펜슈탈은 뭐든지 한번 하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영화 <<푸른빛>>의 성공은 레니 리펜슈탈과 세계 영화사에 지울 수 없는 만남을 만들어냈다. 젊고 똑똑한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를 본 히틀러는 그녀와 그녀의 영화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레니 리펜슈탈은 그녀의 팬이 된 히틀러와 굳게 손을 잡았다. 그것은 영화 제작상 소요되는 비용을 고민하지 않고 마음껏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치는 무제한적으로 레니 리펜슈탈의 요구사항에 맞춰 군부釉?동원해서까지 그녀의 영화 제작을 도왔다. 히틀러의 레니 리펜슈탈에 대한 지원은 간혹 그녀가 히틀러의 여자였을 것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만큼 전폭적이었다. 그녀는 그런 히틀러를 위해 나치를 선전하고 국민을 선동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 너무나 예술적인 그러나 너무나 정치적인

1935년 완성된 <의지의 승리>는 뉘렌베르크에서 열린 나치의 전당 대회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히틀러를 더 할 나위 없는 영웅으로 묘사해놓았다. 마치 히틀러를 신처럼 보이게 하는 카메라 구도와 연출, 구름떼처럼 몰려 히틀러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환호성 소리, 바그너의 뛰어난 음악, 적절한 음향까지 가미하여 이 영화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볼 수 없는 최고의 선동영화가 되었다. 그 이후 다른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자신을 나타낼 때 이 영상만을 고집할 만큼 히틀러는 영화에 만족했다. 오늘날 우리가 2차 대전 관련 다큐멘터리를 볼 때 영상 자료로 나오는 히틀러의 모습은 모두 이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 <의지의 승리>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어 레니 리펜슈탈은 대단한 스포츠 기록영화에 도전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영상으로 남기는 작업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선수들의 아름다운 육체와 멋진 경기모습을 세련되고 생동감 넘치게 찍어냈지만 그 안에는 뛰어난 인종만이 살 가치가 있다는 나치의 음험한 가치관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표현기법의 뛰어남은 이전에 볼 수 없는 새로운 경지였다.

레니 리펜슈탈은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마음껏 영화 기자재를 이용하고 대규모의 스텝진을 동원하여 아무나 이루어 낼 수 없는 뛰어난 영상미를 만들어냈다. 우리나라의 손기정이 마라톤경기에서 우승으로 골인하는 장면을 찍어낸 것도 레니 리펜슈탈이었다.

그녀는 동양에서 온 과묵하고 담담한 청년 마라토너의 모습에 반했다. 그래서 그녀의 <올림피아> 다큐멘터리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이 동양의 마라토너에게 할애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만든 작품은 너무 아름답고 독창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영화감독으로써의 천재성은 그녀가 잘못 선택한 정치 노선에 의해 이후 작품활동의 기회를 잃어 버리고 만다.


- 2차 대전 후 리펜슈탈

2차대전후 레니 리펜슈탈은 오랫동안 전범 재판에 시달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녀는 자신은 정치에 관심도 없었으며 오로지 영화미학만을 생각한 사람일 뿐이라며 무죄를 고집했다. 그녀의 이런 고집스러움은 세계언론의 비판을 받았고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2차대전 이후 영화를 만들 기회를 잃어버린 레니 리펜슈탈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아프리카로 날아가 누바족의 삶을 작품으로 찍어냈다. 그리고 일흔 한 살에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따내고 동영상으로 해저의 모습을 찍어 갔다. 그녀의 100세 생일에 공개된 <해저의 인상>은 그녀를 다시 기록영화 감독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2003년 레니 리펜슈탈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잘못은 히틀러를 만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레니 리펜슈탈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린다. 그러나 그 평가들이 공통으로 인정하고야 마는 것은 그녀가 분명 뛰어난 영화감독이기는 하였다는 것이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07-20 16:10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