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영혼을 불사른 블루스 락의 여왕삶의 고통을 처절한 목소리로 토해낸 전설적인 라커

[역사 속 여성이야기] 재니스 조플린
스물일곱 영혼을 불사른 블루스 락의 여왕
삶의 고통을 처절한 목소리로 토해낸 전설적인 라커


1960년대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좁게는 미국역사에 있어서 기괴한 시기였다. 소련과 미국사이의 냉전은 나날이 심해져 갔으며 이것은 과열경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인류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했다. 지구의 한쪽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오랫동안 저항의식을 불태우며 살아왔던 작은 나라 베트남에서 미군이 근 10년째 지루한 전쟁을 계속하며 지탄의 대상이 됐다. 그리고 미국 본토, 2차 대전 이후 찾아온 베이비붐 세대의 아이들이 20대를 맞고 있었다. 그들은 1950년대 미국의 경제 호황기를 어린시절 몸으로 체험한 세대였다. 그리고 막상 20대가 되었을 때 찾아온 불황으로 사회로부터 외면 받는 세대이기도 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이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주장하는 자신들의 조국에 대해 회의했다.

반전과 평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막상 무엇하나 자기들 손으로 이루어 내지 못한 채 개인주의에 함몰하여 나른하고 소극적인 저항을 하던 그들을 히피라고 불렀다. 머리에 꽃을 달고 공동생활을 하며 마리화나를 피우고, 그리고 자유와 사랑과 평화를 외치던 히피들은 자신을 대표할만한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으로 축제를 벌였다. 그 가운데 블루스 라커의 대명사이던 제니스 조플린이 있었다.


- 우드스탁의 여신

1969년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뉴욕 주 남부의 한 작은 마을, 우드스탁에서 벌어진 음악 페스티벌, 사흘 내내 쏟아지는 비에도 수십 만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음악을 즐기며 전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우드스탁의 무대에서 배출된 많은 혜성같은 뮤지션들은 그들의 짧은 인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 짐 모리슨과 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에서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청중의 가슴에 비수같은 노래를 남기며 등장한 제니스 조플린(1943-1970). 그녀의 독특한 음색과 인상적인 무대 매너는 단번에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남성 라커들 틈에서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뿜어내며 당당히 노래 불렀다.


- 텍사스의 못생긴 여자아이

자유분방함의 상징과도 같은 제니스 조플린은, 그러나 매우 보수적인 텍사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시와 그림을 좋아하던 감수성 예민한 제니스에게 가부장적 가족의 생활은 답답함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은 사춘기의 방황과 함께 시작되었다. 1960년대 미국의 청소년사회는 소심하고 아름답지 않은 소녀에게는 너무 가혹한 세계였다. 소녀들은 놀림당하고 소외되었다. 다수가 휘두르는 정신적 폭력에 소녀들은 비뚤어져갔다. 제니스 또한 그러했다. 어느날부터 제니스는 그녀의 맑은 음색으로 부르던 컨트리송을 부르지 않게 되었다. 얼굴에 여드름은 늘어났고 살이 쪘다. 아무도 그녀를 돌아봐 주지 않자 성격은 점차 파괴적으로 흘렀다. 한때 제니스는 그녀가 다니던 텍사스 대학에서 ‘가장 못생긴 남학생’ 에 선정당하는, 우스꽝스럽지만 매우 가슴 아프며 잔인한 대접까지 받기도 하였다.


- 영혼을 찢어 놓을 듯한 목소리

소위 말하는 주류사회에 끼지 못한 제니스에게 남은 것은 방종이었다. 그녀는 술과 마약 그리고 남자들 사이를 오가며 20대 초반을 방황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런 생활 속에서도 그녀가 잊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삶의 고통을 처절한 목소리로 표현하는 예술적인 감수성이었다. 제니스는 여러 술집을 돌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까지 여성 가수들이 불러 오던 곱고 세련된 목소리가 아닌 삶의 저 깊숙한 속에서부터 끌어 올린 찌를듯하며 몸부림 치는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노래는 이제까지 들어온 여자 가수들의 노래는 모두 사기였다라고 말할 정도로 사람들의 가슴에 직격탄을 날렸다. 제니스는 이즈음 텍사스를 벗어나 한창 플러워무브먼트를 벌이고 있던 히피들의 중심지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간다. 빅 브라더 앤드 홀딩 컴퍼니(Big Brother and Holding Company) 밴드의 리드 보컬이 된 제니스는 1967년 몬트레이 팝페스티발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한다. 제니스 조플걋?눈부신 아우라는 단연 그녀의 밴드를 가장 눈에 띄게 하였다. 제니스는 미국 전역에 걸쳐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 술과 마약과 그리고 노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솔직한 노래를 남기고 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러나, 제니스는 고독했다.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서부터 고독감을 느끼던 제니스는 20대초반부터 그녀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술과 마약과 결별하지 못했다. 그리고 제니스가 유명세를 타면 탈수록 그녀의 주변에서 멀어져 가는 인간관계속에서 그녀는 고통스러워 했다. 빅 브라더 앤드 홀딩 컴퍼니를 탈퇴한 후 그녀는 몇 차례 밴드를 옮기기도 하고 새로 결성하기도 하였지만 그들과 온전히 결합되지 못한 채 항상 떠돌이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하였다.

그랬기에 그녀는 노래에 더욱 집착했고 더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술과 마약에 더 집착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했다.

그런 그녀에게도 봄이 다가오는 듯이 보였다. 1970년 제니스는 한 청년과 약혼을 하고 그와의 결혼을 기대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새 앨범 "진주Pearl"를 준비하고 있었다. 엘범 진행상황도 순조로웠으며 그녀의 사랑 또한 곧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70년 제니스는 헐리우드의 한 호텔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헤로인 과다 복용이었다.


- 여성 라커의 시조

제니스의 죽음 후 그녀는 락의 전설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남성 중심의 락 세계에서 몇 안되는 여성 라커였기 때문이기도 하였고, 그녀가 삶 속에서 길러낸 노래의 깊이 때문이기도 했다. 제니스 이후 모든 여성 라커의 모범은 제니스가 되었다. 그 어떤 여성 라커도 제니스를 극복할 수 없었다. 1960년대 미국의 소극적인 양심이었던 히피 문화 한가운데서 작열하는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곤 했던 제니스 조플린. 그녀는 스물 일곱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 갔지만, 그녀의 이름은 미국의 역사 속에 그리고 음악의 역사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김정미 (방송·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07-28 13:01


김정미 (방송·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