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품은 몽마르트의 예술혼19세가 말 무명예술가들의 삶과 예술, 사랑의 동반자

[역사 속 여성이야기] 쉬잔 발라동
가슴으로 품은 몽마르트의 예술혼
19세가 말 무명예술가들의 삶과 예술, 사랑의 동반자


19세기 말 프랑스의 수도 파리. 그 중에서도 몽마르트 언덕은 세기말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예술가들의 고향이었다. 이 시기 몽마르트는 인상파라고 불리워진 일군의 화가 군단과 음악가들을 배출해냈다. 르느와르와 로트렉, 드가 등의 화가들이 몽마르트 뒷골목의 싸구려 술집에서 압상트 술을 앞에 놓고 내일 먹을 거리와 자신의 예술이 나갈 바에 대해 고민하며 취해갔다.

그들의 귓전에는 무명의 음악가였던 에릭 사티의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 모든 예술가들의 베아트리체와 같았던 여인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화가들의 모델이었고 음악가들의 벗이었으며 그들 모두의 애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19세기 말 예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쉬잔 발라동이다.


- 그림 속의 여자

르느와르와 로트렉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 약간 사팔뜨기 눈에 풍만한 몸매, 삶의 고통을 송두리째 알아버린 듯한 표정의 여인, 그녀는 몽마르트 언덕 화가들의 단골 모델 쉬잔 발라동(1867-938) 이다.

가난한 세탁부의 사생아였던 쉬잔은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일터로 나갔고, 열 여섯 무렵에는 서커스단에서 곡예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네에서 떨어지면서 곡예사 일을 그만둔 그녀는 막막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몽마르트의 직업 모델로 나섰다. 그녀는 화가들이 원하면 싼값에 스스럼없이 누드 모델이 되어 주었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쉬잔은 예술가들과 어울려 몽마르트의 뒷골목을 누비며 그들의 삶과 예술, 그리고 사랑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 몽마르트의 애인

쉬잔 발라동이 어울린 예술가들은 오늘날 예술사에서 후기 인상파로 알려진 화가들이었다. 그녀를 특히 많이 그린 사람들은 르느와르와 로트렉, 샤반 등이었다. 그녀는 그들 모두의 모델이자 애인이기도 하였지만 특히 로트렉과 음악가 에릭 사티와의 사랑은 각별했다.

로트렉은 그 누구보다 쉬잔을 많이 그렸다. 르느와르가 쉬잔의 겉모습을 아름답게 그린데 비해 로트렉은 쉬잔의 신산스러운 삶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그 자신이 불구였던 로트렉은 그 누구보다 쉬잔을 잘 이해했으며 그녀의 성장을 돕기 위해 애썼다. 로트렉의 그림 속에 쉬잔은 아름답지는 않으나 삶의 깊이를 아는 여인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한평생을 가난 속에서 무명의 음악가로 살았던 에릭 사티는 쉬잔과 6개월간의 짧은 동거생활이라는 사랑을 나누었고 그 사랑을 한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쉬잔 발라동은 그들의 애인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간직한 예술적 혼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 그림 밖으로 나와 화가가 되다.

쉬잔 발라동은 화가의 모델이 되는 것으로 인생을 마치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화가들의 모델로 서면서 어깨너머로 본 그림들을 체화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홀로 숨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쉬잔의 재능을 발견해준 사람은 드가였다. 그는 우연히 쉬잔의 그림을 보고 그녀의 예술감각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로트렉과 함께 쉬잔이 화가로 일어 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쉬잔은 서두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의 수련을 거쳐 그녀가 발표한 그림들은 이미 아마추어의 수준을 넘어 서 있었다. 쉬잔 발라동은 정물화와 풍경화의 단계를 거쳐 인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여성화가에게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 있던 누드눼? 그녀는 남성 화가들이 여성 누드를 바라볼 때의 탐미적인 관점과는 달리 여성의 눈으로 여성의 몸 속에 녹아 있는 여성의 삶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싸구려 모델의 자리를 떠나 그녀가 모델로 서주었던 화가들과 나란히 어깨를 겨누는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성장했다.


- 아들과 어머니

쉬잔 발라동에게는 그녀가 열 여덟 살에 낳은 사생아 아들이 한 명 있었다. 화가들 사이를 전전하는 어머니를 둔 그녀의 아들은 9살이 될 때까지 성도 없이 살았다. 우연히 스페인의 화가인 위트릴로가 그를 입양해주어 마침내 위트릴로라는 성을 가지게 된 쉬잔의 아들 모리스는 오랫동안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였지만 언제나 갈증을 느꼈다.

열 살 때부터 몽마르트의 뒷골목에서 압상트 술맛을 알게된 위트릴로의 청년시절은 알코올 중독과 정신 착란으로 점철되었다. 이른 나이에 병원에 입원한 그에게 어머니 쉬잔 발라동이 제시한 것이 그림이었다. 위트릴로는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예술성을 이어받은 그는 곧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위트릴로는 몽마르트의 거리 구석 구석을 자신의 화폭에 남겨 모딜리아니와 함께 몽마르트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아들에게 어머니다운 사랑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했던 쉬잔 발라동이었지만, 화가로서 나란히 서게 된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와는 말년에 화해를 하게 된다.

19세기말 서양예술사는 산업혁명이후의 사회적 혼란과 세기말이라는 정신적 불안 속에서 위태롭지만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 정점에 파리 몽마르트의 예술가들이 있었다. 쉬잔 발라동은 그 예술가들의 가운데 서서 그들과 함께 예술과 자유를 만끽하고 스스로도 화가로 우뚝 선 19세기말 예술사의 히로인이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08-25 15:38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