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영원한 자유를 남기다1940년대 나치의 압제에 항거한 가녀린 소녀

[역사 속 여성이야기] 소피 숄
이 땅에 영원한 자유를 남기다
1940년대 나치의 압제에 항거한 가녀린 소녀


젊음은 때로 무모하고 맹목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순수하고 찬란하기도 하다. 젊음은 세상의 모든 부정부패와 억압과 절망에 물들지 않았고 그러기에 감히 자신의 생명도 내놓을 수 있는 용기를 부리기도 한다. 한때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젊은이들이 있었다. 압제와 독재가 당연한 것처럼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 앞에 스스로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숨만 쉬고 있을 때,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용기있게 외쳤다. 그들은 앞서 간 많은 젊은이들의 순수한 이상에 감동받고 그들의 길을 따라 갔다. 1940년대 나치하의 독일에서 압제에 항거했던 한 명의 소녀, 소피 숄의 삶도 70년대와 80년대를 살아가던 순수하고 찬란했던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처형장의 젊은이들

1943년 2월22일 독일의 뮌헨에서 아무런 죄도 없는 세 명의 젊은이가 처형당했다. 그들은 소피 숄, 한스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였다. 한스 숄과 소피숄은 3살 터울의 남매였고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친구였다. 그들은 모두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들은 자신의 안위보다는 독일민족과 국가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이 더 걱정스러운 젊은이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광이자 독재자였던 히틀러에 반대하는 몇 장의 글과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내주어야만 했다. 제일 나이가 어렸던 소피 숄이 가장 먼저 처형됐다.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 들였다. 그녀는 스스로가 행했던 올바른 길에 한 점 후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빠인 한스 숄은 ‘자유여 영원하라!’는 외침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그 후 2년간 잊혀졌다.


- 나치를 따르던 소년 소녀들

소피 숄(1921-1943)은 독일의 울름 출신이다. 아버지는 ‘국가는 개인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자유주의적 생각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소피 숄과 오빠 한스 숄이 청소년기이던 1930년대 독일의 사정은 그들의 아버지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히틀러라는 전대미문의 선동가가 등장해 많은 독일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광기로 몰아갔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청소년들은 국가에 충성을 바치고 민족을 위해 살아야만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 충성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히틀러 개인과 나치당에 집중된 것이었다.

숄 남매도 일반 청소년들과 다르지 않았다. 한스 숄은 1936년 뉘렌베르크에서 열린 나치의 전당대회에 소년대의 기수로 나설 만큼 히틀러에 열광했다. 소피 또한 그러했다. 소피는 나치소녀단의 열성적인 단원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켜가면서 참여했던 나치 소년단 활동에서 그들은 모든 것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씩 어긋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구렁텅이로 독일 국민 전체가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 백장미단의 활동

나치와 히틀러의 잘못을 먼저 깨달은 것은 오빠 한스 숄이었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한스 숄은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독일 국민 전체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독일 국민의 대부분은 히틀러가 내건 독일의 자존심이라는 마약에 취해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일부 히틀러의 문제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나치 정부의 폭압에 감히 나설 수조차 없었다. 나치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철저히 그리고 잔혹하게 제거되었다. 독일은 광기 아니면 공포, 두 가지 상황 속에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한스 숄은 친구들을 모아 백장미단을 만들었다. 젊은이들이 용기 있는 비판세력이 되어 잠자고 있는 독일琯湧?양심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청소년기에 나치에 반대하는 생각을 품어 감시 대상이 되었던 소피 숄은 나치의 강요로 갖가지 활동에 끌려 다니다가 뒤늦게 뮌헨의 백장미단에 합류했다. 1942년 6월과 7월 백장미단은 전단지를 네차례 배포하고 거리에 히틀러를 반대하는 낙서를 했다. 1943년 1월과 2월에 두차례 더 전단지가 만들어졌다. 결과는 예상밖으로 컸다. 잠자거나 혹은 숨어 있던 독일의 양심이 서서히 깨어 나려는 순간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백장미단의 의견에 동조했고 나치의 선전 대회에 야유를 던지는 사람이 늘어갔다. 나치는 긴장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불어 넣어주는 백장미단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 나치치하의 마지막 양심

소피 숄은 1943년 2월 18일 뮌헨대학에서 여섯 번째 전단지를 뿌리다가 열렬한 나치당원이던 대학 경비에게 잡혀 나치의 비밀 경찰 게슈타포에 넘겨졌다. 오빠 한스 숄과 같은 백장미단원이던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에 대한 나치 정부의 대응은 잔혹했다. 나치는 비판세력에 대해 피의 복수를 보여줌으로써 깨어나려던 독일의 양심을 잠재우려고 했다. 바로 나흘 뒤에 가장 열렬한 나치 옹호자인 판사가 그들을 재판했다.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소피 숄은 비롯한 백장미단원 세 명은 그날 오후 바로 처형되었다. 나머지 백장미 단원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그리고 나치하 독일의 양심은 다시 공포 속에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2년 후 독일은 수많은 잘못을 저지른 나치 정부와 함께 전쟁에 졌다. 전쟁에서 지고 나서야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나치하의 자신들의 모습은 독일 국민에게 그대로 상처가 되고 벗어날 수 없는 짐이 되었다. 그때서야 하나 둘 백장미단을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광기와 공포 속에 엎드려 있을 때 용기있게 나서 꽃다운 목숨을 아깝게 버려야 했던 젊은이들을 기억해 내게 된 것이다. 소피 숄을 비롯한 백장미단의 죽음이 전후 독일인들에게 조그마한 면죄부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처형된 숄남매에게 남은 누이 잉에 숄은 백장미단의 활동을 그린 수기를 펴냈다. 이 책은 이후 억압속에 살던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상과 자유를 위한 투쟁의 이정표가 되었다. 70년대 말 우리나라에도 이 책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읽혀졌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09-14 16:56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