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디바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그리스 태생의 전설적 프리마돈나

[역사 속 여성이야기] 마리아 칼라스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디바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그리스 태생의 전설적 프리마돈나


올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에서 그리스는 자신들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인물 중에서 단연 마리아 칼라스를 손꼽았다.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아테네 주경기장에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노래에 마음을 싣고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마리아 칼라스는 1950년대와 60년대 세계 문화계의 히로인이었던 인물이다. 세계 각지를 돌며 그녀가 보여주었던 많은 오페라 무대는 그대로 전설이 되었고, 그녀의 카리스마와 목소리에 사람들은 전율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리아 칼라스는 전무후무한 디바로 자리 잡고 있다.

마리아 칼라스는 사람의 마음 저 깊은 데까지 도달하는 자신의 목소리만큼, 그리고 그녀가 연기했던 오페라 무대의 비극적 여주인공만큼 처절하고 진지하며 그리고 비극적으로 살다 간 프리마돈나였다.

- 신이 내린 목소리

마리아 칼라스(1923~1977)는 미국의 그리스 이민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지독한 근시에다가 뚱뚱했던 그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10살 무렵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녀의 천부적인 능력은 바로 아름다운 목소리와 훌륭한 표현력이었다. 1930년대 경제 공황기에 미국에서 맞이한 아버지의 파산과 부모의 이혼 등 불행 속에서도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만은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다시 돌아 온 그리스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날개를 달게 된다. 그리스 왕립 음악원에서 만난 스승 이달고 여사의 교육으로 마리아 칼라스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프리마 돈나의 목소리로 가다듬어 진다. 그리스에서 마리아 칼라스는 90kg에 달하는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름 조그만 성공을 거두게 된다.

- 프리마돈나의 탄생

그러나 아버지를 찾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 와 두드린 세계 무대로의 길은 밝지 않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오디션을 받았지만 탈락하고 만 것이다. 그후 힘들게 얻어낸 계약도 기획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또 다시 좌절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그 때 그녀에게 갑자기 기회가 왔다.

함께 일했던 이태리 출신 베이스 가수 레메니의 소개로 마리아 칼라스는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지오콘다’를 부를 기회를 잡게 된다.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이 무대를 계기로 마리아는 훗날 남편이자 매니저가 된 메게니니와 음악적 후원자인 당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 세라핀을 만나게 된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승승장구하며 인생 최고의 시기를 맞이한다. 풍부한 성량과 아름다운 목소리, 무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이시기 마리아 칼라스는 평생의 짐이었던 무거운 몸무게도 떨쳐 버린다. 일년만에 30여kg을 감량하여 명실상부 어떤 오페라에도 어울리는 가냘프고 아름다운 프리마돈나로 거듭난 것이다.

- 오나시스와의 사랑

이즈음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의 이후 생애를 좌지우지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세계적인 부호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에 감동한 오나시스는 그녀와 남편 메게니니를 자신의 배 크리스티나에 초대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부호가 만들어 낸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항해 여행이 끝날 즈음 마리 칼라스는 남편을 저버리고 오나시스의 연인이 되고 만다.

오나시봇“?빠진 마리아 칼라스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며 인생을 바쳤던 노래와 무대를 멀리 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무대에 서기보다는 오나시스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여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자신의 연주 스케줄보다는 오나시스의 스케줄에 더 골몰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오나시스와의 불같은 사랑으로 실상 몇 년간을 상류 사회의 파티 놀음에 빠져 음악을 내팽개쳤다. 이후 지인들의 간곡한 충고로 다시 무대에 오르기도 하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머리 속은 온통 오나시스 한사람만으로 채워지곤 하였다.

- 사랑의 상처

그러나 오나시스의 사랑은 쉽게 식었다. 오나시스는 세계적인 프리마 돈나를 자기 여자로 만든 것에만 만족할 뿐 마리아 칼라스를 평생의 동반자로 여겨주지는 않았다. 오나시스와 결혼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마리아 칼라스에게 어느날 청천 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날라 들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아직도 핑크빛 꿈이 젖어 있던 마리아 칼라스에게 애인 오나시스가 재혼했다는 소식이 들려 온 것이다. 그 상대는 바로 전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아내였던 재클린 케네디였다.

오나시스의 갑작스런 배신은 마리아 칼라스에게 도저히 아물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황폐해졌고 기력을 탕진해 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전성기와 같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세월이 다 가버렸음을 알아차린 마리아 칼라스는 쓸쓸히 뉴욕에 은둔하며 칩거하게 된다.

- 불멸의 디바로 기억

1965년 토스카를 공연한 뒤 오페라 무대를 떠난 마리아 칼라스는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어 후진 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하였다. 이미 쇠해 버린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 줄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노래의 창법, 무대 위에 카리스마 그리고 그녀의 인생 속에 녹아 있는 노래에 대한 철학은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또 1973년부터 1974년까지 마리아 칼라스는 친구였던 디 스테파노를 돕기 위해 마지막 세계 연주 여행을 떠나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목소리도 정열도 쇠해 버린 마리아 칼라스에게는 무리한 연주 여행이었다.

여행 직후 다시 은둔하기 시작한 마리아 칼라스는 다시 한번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오나시스의 처절한 배신에도 마지막까지 그와 결합할 것을 희망했던 마리아 칼라스에게 오나시스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후 마리아 칼라스는 생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채 파리에서 은둔한다. 그리고 1977년 마리아 칼라스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죽었던 여인 마리아 칼라스. 그녀의 인생은 짧았지만 그녀의 노래는 여전히 남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입력시간 : 2004-11-17 11:49


김정미 방송ㆍ시나리오 작가 limpid7@ms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