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섹스, 낯섦과 신선함에 대해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의 욕망과 연애담론에 대한 쿨한 해석질기고 밋밋한, 그러나 씹을 수록 깊은 맛이 나는 뉴요커들의 아침식사

[문화 속 음식기행] TV드라마 <섹스&시티> 베이글
여자들의 섹스, 낯섦과 신선함에 대해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본 여성의 욕망과 연애담론에 대한 쿨한 해석
질기고 밋밋한, 그러나 씹을 수록 깊은 맛이 나는 뉴요커들의 아침식사


“남자한테 ‘난 니가 싫어’라고 하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섹스를 즐길 수 있지만, ‘난 널 사랑해’라고 말하면 아마 넌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을 거야.” 로맨스를 꿈꾸던 여성들에게 이렇게 찬물을 끼얹으면서도 오히려 그녀들을 열광하게 만든 드라마가 있다. 미국 HBO TV에서 6년 간 방영되면서 숱한 유행과 화제를 몰고 왔던 ‘섹스 & 시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뉴욕의 유명 칼럼니스트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 홍보 회사 중역 사만다(킴 캐드럴), 화랑 딜러 샬롯(크리스틴 데이비스), 그리고 하버드 출신의 변호사 미란다(신시아 닉슨). 이 네 명의 독신 여성은 어느 날 미란다의 생일 파티 자리에 모여 중대 선언을 하게 된다. 남자들처럼 자유롭게 성생활을 즐기자는 것이다.

네 여자가 아침부터 식당에 앉아 전날 잠자리를 함께 한 남자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은 낯설고도 충격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흔히 생각하기 쉬운 ‘음담패설’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여성과 성,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나름의 진지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다.

화자인 캐리는 연애 전문가로 통하면서도 감정 조절에 서툴러 남자에게 끌려 다니기 일쑤이며, 사만다에게는 욕망이 곧 사랑이다. 완벽한 결혼과 가정을 꿈꾸는 샬롯은 뜻하지 않은 난관에 인생이 꼬이고, 냉정한 미란다는 연애에서의 ‘경계 설정’ 문제로 고민한다.


그녀들만의 우정과 당당함
이 드라마가 네 여성의 삶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꿈 같은 로맨스가 아니라 정답도 없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이다. 완벽한 애인, 에이든을 누가 봐도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떠나 보내는 캐리나, 백마 탄 왕자인 줄 알았던 남편이 무책임한데다 마마 보이임을 깨닫는 샬롯의 모습은 씁쓸하다.

그러나 그 씁쓸한 현실에도 웃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든든한 친구들 때문이다. 샬롯이 이혼 후 결혼 반지를 팔아 캐리의 집세를 마련해 주고, 혼자서 아이를 낳는 미란다에게 세 사람이 이모가 되어 주기로 한다는 내용은 ’쿨 하지만 동시에 끈끈한‘ 그들만의 우정을 보여준다.

물론 ‘섹스 & 시티’에도 어느 정도의 한계는 보인다. 주인공들의 화려한 직업과 여유로운 생활은 일과 돈에 쫓기는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드라마 전체가 명품 광고가 되어 버렸다는 비난도 만만치 않다. 다만 여성의 욕망을 긍정하고 남성 중심으로 왜곡되어온 성, 연애 담론을 새롭게 기술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파격이라고 할 만 하다.

‘섹스 & 시티’에 나오는 네 주인공 같은 뉴욕의 독신 여성들이 아침 식사로 즐기는 것이 바로 베이글이다. 캐리, 사만다, 샬롯, 미란다는 마치 우리나라 여성들이 심심풀이로 오징어를 씹듯 베이글을 씹으면서 데이트하는 남자 이야기를 입에 올린다. 남자 친구에 대해 불평할 핑계 거리로 친구에게 베이글을 사 가지고 가기도 한다. 질기고 밋밋한 듯 하지만 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베이글처럼, 낭만이 없고 지나치게 적나라한 그들의 연애담도 듣다 보면 “어? 나도 그랬는데…”라며 공감하게 된다.


유대인의 정통 빵에서 세계인의 빵으로
베이글의 기원은 17세기 중엽의 오스트리아이다. 당시 투르크(터키)와 전쟁을 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폴란드 왕 얀 3세가 보낸 기마병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던 한 유대인 제빵사는 감사의 표시로 폴란드 왕에게 둥근 모양의 빵을 만들어 바쳤다. 승마를 좋아했던 왕은 빵의 모양이 말을 탈 때 발을 딛는 등자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뷔겔(Bügel: 등자(鐙子))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발음이 변해서 ‘베이글’이 된 것이다.

밀가루와 이스트, 물, 소금만으로 만드는 베이글은 다른 빵에 비해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식으로 인기가 높다. 반죽을 바로 구워내는 것이 아니라 끓는 물에 한 번 데친 다음 굽기 때문에 쫄깃하게 씹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도넛 모양으로 만드는 이유는 끓는 물에서 반죽이 쉽게 익도록 하기 ㎸漫?甄?

베이글에는 담백한 플레인 베이글 뿐 아니라 짭짤한 어니언, 상큼한 블루베리, 향기로운 시나몬 레이즌, 고소한 세서미 베이글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크림치즈를 발라 먹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며 햄, 훈제 연어, 토마토 등과 함께 샌드위치를 만들어도 좋다.

원래는 유대인의 전통 빵이었던 베이글이 전 세계로 퍼진 것은 19세기 말 동유럽의 유대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뉴욕, 뉴저지 등지로 이주하면서부터 였다.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해결하면서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베이글은 바쁜 직장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베이글을 ‘세계 10대 발명품’으로까지 선정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수다를 떨면서도 먹을 수 있는 베이글은 어쩌면 자유분방한 뉴요커,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다.

정세진 맛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12-08 17:29


정세진 맛 칼럼니스트 sejinjeong@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