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간에 떠오른 생의 찬란한 기억 브라스밴드작가의 고통 생생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이야기'

[문학과 페미니즘] 김인숙의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
죽음의 순간에 떠오른 생의 찬란한 기억 브라스밴드
작가의 고통 생생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이야기'


다시 한 해가 기울고 있다. 어쩌면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한 지점, 무수한 순간들 중 한 점일 뿐이지만, 연말과 새해는 늘 놀랍다. ‘벌써? 또 이렇게?’ 놀람은 어느새 익숙함으로 변하고, 그렇게 한 살을 더 먹은 나이에 적응할 무렵이면 느닷없이 또 송년을 하란다. 시간에 점을 찍는 일, 쉼표이든 마침표이든 느낌표이든, 그것은 늘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미래를 기약하게 만든다.

이렇게 점이 찍힌 순간들 덕분에 우리는 과거, 미래와의 연결 고리들을 찾고, 의미 있는 특정 순간을 부각시킬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지진한 우리의 생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김인숙의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는 아리고 아프게 그 진실을 포착하는 단편이다.

김인숙만큼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굳이 페미니즘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김인숙의 인물들은(오히려 때로는 남성들까지) 여성의 내면을 여성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임을 고수한다. 이른 등단으로 20여 년 째 소설을 써오는 김인숙의 소설은, 고통이라는 씨줄과 상처라는 날줄로 교직한 천이라고나 할까. 빛깔도 무늬도 흐릿하지만, 읽는 이의 가슴에 선연한 통증을 남기는, 그 아픔의 자국으로만 남는 무엇이다. 그래서 김인숙의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 새 가슴이 먹먹해오고, 목구멍까지 답답해오고, 제대로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이 심장이 사무치고 미어진다. ‘아아, 어떻게 해야 하나?’ 해답도 출구도 없이 아픔과 안타까움만이 고요히 여울지며 여백들을 메운다.

작품을 쓴 작가의 고통까지가 만져지는,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 엮어 있으나, 결국은 오롯이 나에게로 향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내가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찍어 줘
화자인 ‘나’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영화 감독인 나에게 암으로 죽어가는 친구는 자신의 죽음을 카메라에 담아 달라고 부탁한다. “내가 어떻게 죽어가는지”, “죽음이란 게 대체 뭔지”, “죽음이 내게 어떻게 오는지, 얼마나 가까이 와서 날 안아버리는지”를 촬영해 달라는 것이다. 친구인 그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삶의 마지막 껍질”인지 “껍질 속에서 가볍게 풀려나온 죽음”인지도 알 수 없는, 친구가 죽어가는 모습을 촬영했다.

그 죽음의 기억에서 제대로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돌연히 마주하게 된 사실은 아내 역시도 암에 걸려 친구처럼 죽어가게 되리라는 사실. 그리고 더욱 끔찍한 것은 그 즈음 알게 된 아내의 불륜 사실. 불륜이나 죽음으로 보복을 당할 만큼 나쁘지 않았던 아내와의 관계는 그렇게 배신 당한다.

”기태의 죽음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해져 있었고 충분히 겁을 먹고 있었다. 기태의 죽음만 갖고도 나는 평생 동안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걷고 나와 함께 숨을 쉬고 나와 함께 영화를 보는 죽음의 존재를 느끼며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아내까지 기태처럼 꼭 그렇게 보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누구든 삶의 몫에 꼭 필요한 만큼의 불행의 분량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쳐도, 내게 존재하는 이 불행은 아무래도 부당했다.”

대체 나는 아내라는 여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러나 증오도 잠시. 죽어가는 아내를 간호하며, 그 처절한 고투를 지켜보며 나는 “다만 죽음”인 아내의 존재를 본다.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마침점은 그에게 그와 아내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고, “대체 내가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고백하게 만든다.

”이제 불가해의 존재”가 되어 버린 아내, “반쪽의 허깨비”. 몸뿐만 아니라, 영혼도 빠져나가는 듯한 그녀는 “마치 썰물 뒤의 갯벌” 같다. 결국 나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미어져 오기 시작한”다.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아내의 존재를 찾고 싶은 그는 텅 빈 가계부에 끼워진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것은 아내가 힘겨운 고통으로 정신을 잃어갈 무렵, 허공을 가리키며 “브라스밴드야. 나도 저기에 있고 싶어”라고 중얼거렸던, 브라스밴드의 사진이었다. “자신의 애인에게도, 남편인 내게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는 그 여자가 마지막으로 있고 싶다는 곳은 브라스밴드의 행렬 속”이었던 것이다.

네 죽음으로 내 삶을 용서해라
그리하여 밝혀지는 아내의 반쪽. 한때 고적대원이었던 소녀. 그러나 폐병을 앓아 제대로 연주를 하기도 전에 고적대를 나와야 했던 아내의 순간들.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그녀로서도 확연하지 않을 기억을, 나는 “그 반쪽이야말로, 이제까지 내가 한 번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녀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딸이면서 어미일 수 없었고, 아내이면서 아내일 수 없었고, 애인이면서 애인일 수 없었던… 그리고 심지어는 여자이면서 여자일 수도 없게 된 그 여자의…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해칠 수가 없는,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해칠 수가 없는, 그 무엇이 아닐까”라고 자리매김한다.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역시 카메라에 담고 있던 나는 “그 어떤 이름도 가지지 않은 한 인간”일 뿐인 아내에게, “나를 용서해라.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용서해라. 네 죽음으로 내 삶을… 내 삶을 용서해라. 부디, 제발 그렇게 해라”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 속에서 죽음의 존재를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내가 찍고 싶은 것은 그녀에게 남아 있는 삶이었다. 그 삶 속에 남아 있는 그녀의 기억들, 그녀에게 찬란했을 어떤 순간들, 끝끝내 멈추지 않을 뜨거운 피의 돌기”

아내는 죽었다. 아내를 묻고, 자신이 촬영한 테이프를 돌려보던 그는 “가능만 하다면 죽음 같은 것과는 상관없던 시절의 나로만 당신에게 기억되고 싶어. 미움이면 미움 그대로… 혹은 사랑이면 사랑 그대로…”라고 말하며 살고 싶다고 오열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내 스스로 촬영한 부분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오롯이 나라는 인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찍는다
”기억은 이상한 순간에 복원”된다. 절대 기억할 수 없는 일들, 얼굴들, 사건들이 “모두 한 순간에 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순간 기억은 말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사건과 얼굴들 뿐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 대한 것들” 결국 “오롯이 나라는 인간”에 대한 것까지도 말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나를 응시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찍고 있는 것 같았다”는 문장으로 마침점을 찍는다.

결국 「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아프게 죽음을 겪어낸 삶, 수많은 상처와 그리움으로 여울진, 애절하지만 찬란한 삶에 대한 이야기.

특정한 순간, 무수한 흐름의 한 순간일 뿐이지만, 너무나 행복했기에, 또는 너무나 아팠기에, 또는 너무나 간절했기에…. 하나의 의미로 자리매김되고야 마는 그 순간들에 김인숙은 쉼표와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하여 소설은 무언가 칼로 긁힌 자국, 피가 맺힌 상처를 남겼지만 결국에는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생의 어느 자리. 순간이기에, 영원할 수 없기에 아름다운 그 상처들의 흐릿하지만 선연한 그림이 된다.

한 해에 마침표를 찍는 오늘에 어쩌면 우리는 환희의 순간들을 하나씩 꺼내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기뻐서이든, 슬퍼서이든, 간절해서이든, 치열해서이든, 아파서이든, 그 모두는 찬란할 수밖에 없기에 ‘환희’라는 이름을 붙여 두자. 아니,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내가 생의 마침점을 찍게 되는 때 유일하게 기억될 어떤 순간이라면? 죽음과 소멸의 지점에서 나를 응시하여 ‘오롯이 나’로 기억될 순간이라면?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4-12-22 14:46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