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와 망각의 욕망이 만들어낸 비극이자 희극세 남자가 죽인 한 여자의 이야기, 혹은 한 여자를 죽인 세 남자의 이야기

[문학과 페미니즘] 김영하의 <크리스마스 캐럴>
은폐와 망각의 욕망이 만들어낸 비극이자 희극
세 남자가 죽인 한 여자의 이야기, 혹은 한 여자를 죽인 세 남자의 이야기


지난 해 특히 활발한 활동을 하여, 장편 <검은 꽃>으로 동인문학상, 중편 <보물섬>으로 황순원문학상,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로 이산문학상을 모두 거머쥐었던 소설가 김영하. 그의 소설은 농담 같다.

그는 현실에서는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일들. 충격적이고 기이하다 못해 독자를 황당하게 만드는 일들을, 매번 너무나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낸다. 빈번한 살인은 물론 자살안내인이나 흡혈귀가 등장하는가 하면, 번개 맞는 사람이나 자연발화로 죽는 사람까지. 아들이 아버지를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는가 하면, 결코 이해할 수도 없는 거대한 사기극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인간들은 그렇게도 기막힌 악행을 벌리고도 별 탈도 없이 잘 들 살아간다. 인물의 악행들도, 인물들도 너무 심하게 나빠서, 오히려 ‘기가 막혀’ 웃음이 날 지경이다.

게다가 김영하 특유의 문체, 기발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문장들, 신랄한 조롱과 반어를 담고 있는 경쾌한 어조, 엄청난 속도감으로 진행되는 유머와 능청들이 그 기막힌 이야기들에 여러 몫을 더한다.

단편 <크리스마스 캐럴>은 세 남자가 죽인 한 여자의 이야기이자, 한 여자를 죽인 세 남자의 이야기이다. 즉, 이 소설은 한때 한 여자를 공유했던 세 남자의 이야기이면서, 한때 자신을 벌레처럼 여겨 세 남자에게 공유당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의문의 죽음과 서서히 드러나는 악행들
세 남자의 “유령”이자 “공동소유”였던 한 여자

소설은 그 ‘한 여자’인 진숙이 살해당해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뉴스를 본 ‘세 남자’ 중 영수와 정식의 전화통화로 시작된다. 십 년 만에 세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난 날 그 여자, 진숙은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 영수는 아내가 건네준 진숙이 보낸 크리스마스카드를 연다. 카드에서는 캐럴이 자동으로 흘러나온다.

그런 배경으로 10년 전 악행의 파노라마가 서서히 펼쳐진다. 남자들에게 헤퍼서 아니, “헤프다기보다는 좀 맹”하게 느껴져서, “자판기”라는 별명을 가졌던 진숙. 세 남자는 “비슷한 시기에 모두 진숙이와 잤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진숙을 “바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두가 손을 떼는 (…) 말하자면 공동경비구역”으로 만들기보다는) “그 여자가 아예 없었다고. 지금도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즉, 진숙을 모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으로 치부하며, “그 여자를 공유한다 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질 않”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누가 씨발, 싫다는 년 건드렸나요. 가도 싫다고 안 하니까 가서 자고 오고 그러는 거죠”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폭로된 실상에 망각과 은폐를 위한 살의
그런데 어느 날 그 시절의 진숙, “젊은 날의 백치 소녀”는 “환경운동가가 되어 돌아”와 그들 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다. “세 남자는 진숙의 출현을 모두 불편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가 일치했”으며, “게다가 동시에 한 자리에 소집된, 그런 우스꽝스런 상황이 그들에겐 더 견디기 어려웠”는데, 진숙은 그들 사이(진숙과 남자 셋)의 권력관계를 “명백히” 완전히, 뒤바꿔 버린다. “옛날부터 우리 셋의 공동소유”였던 진숙, “유령”이었던 진숙이 “현실적으로 존재했으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어떤 것”을 “백일하에 현실로” 인정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에 돌아오면 너희들이, 한국사회가 얼마나 변했을까,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어. 그런데 와보니까 내가 제일 많이 변했더라. 니들은, 그대로였어. 기분 나쁘지 않지?”

“그때의 나는 말이지.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 벌레 같다고 생각했던 거야. 벌레라고 생각하면 못할 게 없어. 한번 벌레가 되고 나면, 니들이 날 강간하지 않는 한, 그러니까 최소한의 예의만 갖춰준다면, 별로 문제될 게 없었어.”

“니들은 내가 바보였다고 생각하지. 그래 난 바보였어. 그렇지만 난 니들이 조금은 측은했어. 20대 초반의 너희들은, (…) 똥 마려운 강아지들 같았어. 너희들은 날 측은하게 여길 여유 같은 건 없었어. 욕망에 허덕대는 자신에 대한 혐오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 대해 동정 따위는 베풀 여력도 없었지. 개폼을 잡고 내 자취방에 기어들어와 10분 만에 사정하고 도둑놈들처럼 기어나가면서 자기들이 무슨 게릴라나 된 줄들 알고 있었지. (…) 그때의 내가 나 자신을 벌레로 여기고 있었다는 게 사실 가장 큰 문제였어. 한 여자가 자신을 벌레로 여기고 있으면 다른 벌레들이 꼬이게 마련이잖아. 그냥, 너희들이 나를 백치 아다다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 같아서, 그것만은 언젠가 교정을 해주고 싶었어.”

진숙은 “당신은 벌레가 아니다. 당신은 고귀하다”고 처음으로 말해준 독일 남자와 결혼했다고. 그러나 그 말들을 듣는 중에도 “영수의 머릿속엔 사실, 이제 이 여자와 잠을 자기는 틀려먹었다는 생각만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서 세 명의 남자를 사로잡는 살의. 그들은 제각기 “태연히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던 진숙에 대해” 살의를 품는다. 그녀는 그들의 “추악한 과거의 악행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걸어 다니는 비디오 테이프”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뇌리엔 살인의 충동이 격렬하게 똬리를 틀”고, 영수는 상상 속에서 그녀를 살해한다. “미안해.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고. 그러게 돌아오지 말았어야지. 우리 셋은 모두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 한 여자를 공유하던 과거 같은 건 다 잊었다고. 그러니, 넌 좀 사라져줘야겠어” 라고 읊으면서 말이다.

때문에 이후 진숙이 피살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자기 손을 찬찬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사실 그 동안 그들의 꿈속에서 진숙은 여러 번 살해되었다. 그녀의 피는 끝이 없었다. 속죄는 가능하지 않았다. 짓지 않은 죄를 참회할 수는 없었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참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악행은 “죽이지도 않았는데”라는 구차한 변명 때문에 더욱 더 커진다. 단지 남자라는 명분으로 한 여자를 이미, 10년 전에 비열한 방법으로 살해하고도, 단 한 번도 참회하지 않은 그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악행은 ‘한국사회’이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살해자는 중권으로 밝혀지지만, 영수와 정식은 통화를 하며, “그런데 이상한 건 말이지. 왜 우리가 이렇게 찝찝하냐 말이지. 씨발 나는 손에 피 한방울 안 묻혔는데 말야” “누군 묻혔냐?”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들은 찝찝할 것이다. (상상 속에서건 의식적으로든) 그들의 손에는 이미 시뻘건 피가 여러 번 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의 마지막 말은 참으로 가관이다. “인생이 씨발 다 그런 거 아니냐.”

“개새끼”와 “개 같은 년”, 그러나 부부인 그들
(잠시 중심 사건에서 조금 벗어나 보자.) 영수는 진숙의 크리스마스카드와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뉴스로 인해, (진숙과의 과거를 알고 있는) 아내 숙경 사이에 “총성 없는 전쟁. 회담 없는 휴전”을 시작한다. 당시 진숙과도, 숙경과도 몸을 섞으면서, 숙경에 대해 “사실 별로 다를 바 없잖아. 차이가 있다면 너는 진숙이와는 달리 나하고만 잔다는 거”라고 생각했던 영수. 그리고 그 시절 진숙으로 인해 “투닥거렸던” 그들은, 이제 서로를 “개새끼”와 “개 같은 년”이라 속으로 뇌까리며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영수의 아내인 숙경은 “정말 저 인간이 그랬다면? 자. 유. (…) 그랬다. 그녀는 자유였다. (…) 그가 교통사고로 깨끗이 죽어준다면, 생명보험까지 들어 있으니까 금상첨화지만. 그것까지야 바랄 수 없고 (…) 아, 뭔가 사는 것 같을 텐데. 살인자의 아내가 되어보는 것도 흔치 않은 경험이지 (…) 내 남편은 살인자였다! 멋진 헤드라인이잖아” 라는 생각들이 분주하다.

영수는 “내가 정말 살인이라도 했기를 바란다는 거야 뭐야. 정말, 이민이라도 가버릴까. 모든 재산을 슬금슬금 챙겨 한순간에 꿈의 땅 캐나다로 휙, 떠버리는 거지. 개 같은 년 그때도 저렇게 기고만장할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생각한다.

망각과 은폐 속에서 또 다시 ‘잘 만’ 살아갈 일상들
모든 사건이 종료된 후, 영수는 아내 숙경에게 크리스마스트리나 사러가자고 “복음을 전하는 동방박사처럼 한껏 과장된 어조와 몸짓으로”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 보니 “손을 씻어낸 물이 핏물처럼 벌”겋다. 다음 순간 “난 죽이지 않았다구”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괴물을 닮은 남자 하나가 서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영수는 다음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진숙의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중얼거린다.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찾아오신대.”

물론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산타 할아버지는 찾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배터리가 완전히 소모될 때까지 끈질기게 울려 퍼질 크리스마스 캐럴. 물론 그것은 숙경과 영수의 귀에는 결코 들리지 않을, 단조로운 멜로디에 불과”하기에.

소설에서 보다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살해 사건과 누가 실제로 그녀를 죽였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가 하는 문제도 아니다. 김영하는 농담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너희들 모두 살인자가 아니니?’ 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 모두는 각각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이 시대의 악행들을 (물론 정도의 차이가 크겠지만) 행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 진숙을 살해한 것은 중권이며, 그녀는 중권에 의해 죽었다. 그러나 진숙은 영수와 정식의 상상 속에서 이미 살해당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면, 10년 전에 이미 살해당했다. 그녀를 “바보”로 알던 세 남자와, 자신을 “벌레”로 여긴 그녀 자신에 의해서 말이다(그것을 살해 이외의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 소설의 현재에서 일어나는 살해들은 10년 전 살해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진정한 범인을 알고 있을 산타할아버지는 10년 전에도 현재에도 결코 찾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또한 소설에서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늘 살해하고 살해당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만’ 살아간다.

나는 김영하의 소설이라는 농담을 이렇게 읽는다. 물론 그것은 마치 ‘농담’이기에, ‘그래서 어떻게?’ 라던지, ‘뭘 어쩌라고?’ 에는 그리 분명한 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본다. 김영하 소설의 현실이 우리 시대를 한 70도쯤 삐딱하게 돌려서, 몇 번쯤 난도질을 한 후, 다시 그것을 뻥튀기 기계에 한 번 쯤 돌려낸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저 마주 보고 있으면 아무도 제대로 찾아내 지적할 수 없어 묻혀있을 ‘인간’이라는 이상한 생물체의 본질이 언뜻언뜻 드러난다고 말이다. 그 지점을 ‘얼마나’ ‘어떻게’ 읽는가 하는 점은 아무래도 독자 개개인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김영하가 여러 개의 거울들을 가지고, 그것을 서로 여러 각도로 비추며 때로는 오목 혹은 볼록으로 왜곡시키고, 그 현실의 상들을 엄청나게 불리! 고 자르고 망가뜨리며 변형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쯤 염두에 둔다면, 독자는 실제의 상을 순간적으로 언뜻 포착해낼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우리의 시대가 무엇인가를 ‘언뜻’ 볼 수밖에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김영하라는 작가의 소설과 즐거이 만나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기이하고 황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우리는 또 그것들을 쉽사리 잊고 ‘잘 만’ 산다. 그러니 가끔은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자. 문득 “괴물을 닮은 남자 하나”를 만날 지 누가 알겠는가?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1-12 13:11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