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란 것은 쓰레기 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니 말야"여성의 섬세한 시각으로, 일상의 면면들에 숨은 진실 찾기.

[문학과 페미니즘] 하성란의 <곰팡이 꽃>
"진실이란 것은 쓰레기 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니 말야"
여성의 섬세한 시각으로, 일상의 면면들에 숨은 진실 찾기.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단편 〈풀〉로 등단한 하성란은 일상의 구체적 세목에 대한 사실적이고 세밀한 묘사로 평범함 속에 숨은 진실들을 포착해낸다. 흔하디 흔해서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않고 지나친 사물들과 일상의 면면들이 하성란을 거치면, 너무나 치밀하고 섬세하게 관찰되어 오히려 낯설 지경이다. 그의 (소설 속 화자가 모두 여성은 아니지만) 관찰들은 너무나 여성적으로 섬세해서, 늘 작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독특한 감각과 정밀한 묘사로 대표되는 그의 독보적인 문체는 (여성 소설들에서 다소 일반적으로 보이는 경향과는 달리) 감정이나 심리를 결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꼼꼼하고 성실한 관찰자로서, 그 면면들에 숨은 심리나 욕망까지도 미시적인 객관적 상관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적이고 냉정한 그의 서술들을 읽다 보면, 숨? ?심리나 욕망이 오히려 강렬하게 와닿곤 한다. 어쩌면 탐구나 탐색을 동반한 관찰 자체가, 쉽게 의미를 잃어버리고 의미의 탐구마저 잃어버린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하나의 형식인지도 모른다. 1999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곰팡이꽃>은 하성란의 그런 장기가 매우 잘 발휘된 단편이다.

숨은 그림을 찾듯이 쓰레기 봉투를 뒤진다
곰팡이가 꽃을 피운다고? 〈곰팡이꽃〉을 읽기 위해, ‘곰팡이꽃’의 묘사부터 만나보자.

“녹차의 티백 찌꺼기와 두터운 오렌지 껍질, 다이어트 코카콜라. 모두 다 저열량의 음식들뿐이다. 돌돌 말린 비닐 팩을 들어낸다. 미모사 향의 섬유 유연제다. 미끌미끌하게 썩은 밥풀들이 달라붙어 있지만 시큼한 악취 가운데서도 비닐 팩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난다. 남자가 복도에서 맡았던 그 냄새다. 쓰레기 봉투 맨 밑바닥에 손도 대지 않은 생크림 케이크가 문드러져 있다. 하얀 우윳빛 생크림이 군데군데 벗겨진 사이로 포도 시럽이 잔뜩 발린 삼단 케이크가 드러나 있다. 그 위에 하늘하늘하게 곰팡이꽃이 피어 있다.”

시선의 주인공은 508호에 사는 ‘남자’다. 그는 대문을 마주하고 있는 507호 여자의 쓰레기 봉투를 욕조에 풀어놓고 이렇게 세밀하게 관찰한다. 그는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가? 그 시작은 쓰레기 종량제가 시작된 것을 모르고 일반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버렸던 그를, 범인을 찾기 위해 쓰레기 봉투를 뒤진 부녀회원들이 찾아 온 일에서 비롯된다. 부녀회원들이 가져온 자신의 쓰레기 봉지를 치우며, 그는 “분명 자신이 버린 쓰레기들인데도 쓰레기들은 낯설”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쓰레기 봉투를 뒤져 낯선 진실을 찾고자 하는 그의 또 다른 생활이 시작된다.

90세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매일 한 두 개의 쓰레기 봉투를 뒤지던 그는, 100개가 넘는 쓰레기 봉투를 뒤져, 90가구의 취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된다. 욕조 속에 쓰레기 봉투를 풀어놓고, “숨은 그림 찾기에서 찾아야 할 항목들처럼” 쓰레기들을 뒤지는 일이 퇴근 후 그의 또 다른 업무이다. 그는 쓰레기 봉투에서 나온, 물품들과 전단지나 청구서(찢어지거나 훼손된 그것들을 씻고 짜맞추어서) 등에 적힌 이름이나 쇼핑 목록들을 꼼꼼하게 수첩에 적으며, 그 메모와 끼워맞추기 위해 아파트 주민들의 삶을 관찰한다. 시소에 앉아 강낭콩 깍지를 까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베란다 창가에서 내다보면서, “콩깍지를 덮고 있는 가실가실한 솜털의 촉감과 콩깍지의 틈을 벌리느라 엄지손톱께 낀 섬유질까지 전부 다 상상할 수 있다”고 말하는 남자. 그는 “수많은 쓰레기 봉투 가운데서 그 여자! 를 식별하는 유일한 단서”로 “콩깍지, 시소, 구름사다리, 사내아이, 물 웅덩이”를 수첩에 적어놓는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놓쳐버린 진실의 면면들을 발견한다. “그 여자(남자가 사랑했으나, 회사의 후배와 결혼해버린)의 쓰레기를 볼 수만 있었다면 남자는 그 여자의 숨은 성격에 대해서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까닭 없이 코발트색에 약하고, 입심이 좋고 단정한 옷차림의 남자에게 끌린다는 것을 알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코 도달할 수 없을 진실
그런 남자에게 한 사내가 찾아와, 자신이 사랑하는 507호의 지애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하고, 장미꽃 다발과 생크림 케이크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남자는 최지애를 만나지 못하지만, 그녀가 나가고 복도에 남긴 “은은하면서도 코끝을 톡” 쏘는 향수 냄새를 맡고,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매일 매일 쓰레기 봉투를 뒤지던 남자는 최지애의 쓰레기를 찾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앞집 여자에 대해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내보다 많이 알게 된다. “생크림 케이크를 무척 좋아하지요. 물론 저야 생크림광이지만요”라고 말했던 사내의 생각과는 달리, 과일만 빼먹고 버려진 생크림 케이크에서는 곰팡이꽃이 피어있고, “지애는 바다를 좋아하죠”라는 사내의 말과는 달리, “구례행 무궁화 열차표 한 장”과 빨래줄에 걸려 있던 흙물이 든 노란 양말은 그? 析?혼자 산에 올랐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어쩌면 그들의 결별은 생크림 케이크로부터 연유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남자는 “쓰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쓰레기야말로 숨은 그림찾기의 모범 답안이다”를 중얼거리며, “여자는 지금 다이어트 중이다. (…) 여자는 남자가 좋아하는 생크림 케이크를 억지로 먹어주는 데 지쳤고, 남자는 여전히 여자가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믿어버린 데서 생긴 오해가 그들 사이에 틈을 만들었다. 사내가 한 번쯤이라도 여자의 쓰레기를 훔쳐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한다.

“코발트 색깔의 와이셔츠 때문”에 남편과 결혼했다는, (남자가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의 남편이 “젠장, 만날 그 여잔 코발트 색깔의 와이셔츠만 사들이는 거야. 이젠 코발트의 코자만 들어도 진저리가 쳐진다니까”라고 말하고, “신입 여사원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나오”곤 한다는 사실, “지금은 남편이 된 후배의 실체에 대해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듯이, 사내는 최지애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호출기의 번호도 바꿔 버리고, 어느 날 홀연히 이사를 가 버린 최지애. 그녀의 행방과 상관없이 아파트를 찾아온 사내는, 영영 최지애를 오해하며 아파트 뒤뜰의 무성한 풀숲에서 그녀가 던져버린 (함께 제주도를 여행하다 산) 돌하루방을 찾고 있다. 사내와 함께 풀들을 뒤적이며, 남자는 말한다. “도대체 알 수가 없다니까. 진실이란 것은 쓰레기 봉투 속에서 썩어가고 있으니 말야.”

진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영원히 최지애를 오해하면서도 그녀와의 흔적을 찾으려 몸부림치는 사내는 어쩌면, 영원히 타인을 오해하며 살아가면서도 스스로는 무척이나 안간힘을 쓰는 우리 개개인인지도 모르겠다. 쓰레기 봉투를 다 뒤져야만 간혹 그 실체를 드러내는 진실. 그러나 쓰묽?봉투를 뒤진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식습관이나 일상에 대해 조금쯤 추측할 수 있다고 해도 진실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또한 쓰레기 봉투 속에서 그 놈의 진실을 어느 정도 찾아낸다고 해도, 그것이 소통으로 연결될 일은 요원하다. 소설에서 남자는 사내가 말한 것과는 상반되는 최지애의 습관들을 알아차렸지만, 바로 앞집에 사는 최지애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 게다가 남자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이해될 수 없는, 쓰레기 봉투를 뒤져 찾아낸 것이므로) 사내에게 설명할 수도 없다. 한 층 더 나아가, ! 남자가 쓰레기 봉투로 추출한 사실들이 정말 진실인가에까지 이르면 또 다시 막막하다. 최지애가 생크림 케이크를 버렸다고 해서, 구례행 기차를 탔다고 해서, 그녀가 생크림 케이크를 싫어하고, 바다가 아닌 산을 좋아한다고 완전히 믿을 수 있을까? 결론은 물론 그렇지 않다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진실이 발견하기도 어렵고, 진실에 대한 소통은 더더욱 어렵다’는 사실을 〈곰팡이꽃〉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점들, 그것은 결코 거짓말을 안 하는 쓰레기 봉투를 뒤져도 완전히 풀릴 수 없고, 여전히 소통의 지점은 멀기만 하다.

대단한 소득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레기 봉투를 뒤지는 일을 쉬지 않던 남자처럼, (그 진실이라는 것이 어쩌면 영영 불가능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현실의 세세한 면면을 포착하여 진실 찾기, 즉 소설쓰기를 쉬지 않는 하성란의 모습은 마치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 하다. 더 이상 완전한 진실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그 일면들의 포착을 쉴 수 없어 미시적으로 숨은 단면들을 그려내고 있는 문학 말이다. 아무도 모르게 하늘하늘 꽃을 피워낸 곰팡이, 가장 추악한 모습이지만 스스로는 진실을 선명하게 피워내는 곰팡이꽃을 문학은 찾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 <곰팡이꽃> 1999년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조선일보사, 1999.

혹여 당신은 오늘 이렇게 생긴 쓰레기 봉투를 하나 내버리지 않았는가? 당신이 먹은 음식물의 찌꺼기와, 당신이 찢어 버린 각종 고지서나 영수증들, 당신의 생활을 겪으며 버려진 슬리퍼 한 쪽이나, 속옷 한 벌, 칫솔 하나에서 샴푸나 린스, 세제나 섬유유연제의 껍질에 이르기까지, 쓰레기 봉투 속에는 당신의 취향과 숨은 진실들을 증명할 여러 가지가 담겨있다. 오늘 당신이 내버린 쓰레기가 몽글몽글 곰팡이꽃을 피우며, 당신을 오롯이 증언하고 있다면? 그 속에 당신에게 가장 익숙하지만 (이미 버려졌기에) 낯설기만 한 진실들이 가득하다면? 누군가 “쓰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쓰레기야말로 숨은 그림찾기의 모범 답안이다”를 중얼거리며 당신이 내버린 쓰레기 봉투를 뒤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왜? 당신이란 사람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 말이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2-17 13:59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