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살아서 펄떡이는 것들을 서서히 고아내는 일균열을 받아들이고 평화와 용서에 이르기 까지
[문학과 페미니즘]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 삶이란 살아서 펄떡이는 것들을 서서히 고아내는 일 균열을 받아들이고 평화와 용서에 이르기 까지
1997년 등단하여 그다지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전에 이상문학상의 영예를 거머쥔 작가 권지예. 그녀의 소설은 그의 늦은 등단만큼이나 차분하고 성숙한 목소리를 내비친다. 그의 역작이라 할 수 있을 ‘뱀장어 스튜’는 집안의 일상이 갖는 권태와 애증, 그를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에의 욕망과 집밖의 낭만적 사랑, 환상에의 도발이 허무의 확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정교하게 엮고 있는 작품이다.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는 주체로서의 여성.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그들이 갖고 있는 내면의 욕망들과 너울거림들이 펼쳐지고, 그녀는 그 내면의 격정을 지나고 지나 고요한 평화에 깃들인다. 여자를 보고 있는 ‘나’의 목소리와 시선, 그리고 여자가 ‘남자’를 만나 그려지는 ‘여자’로서의 시선, 여자가 ‘남편’과 함께 있는 ‘그녀’로서의 시선. 세 개의 겹이 액자처럼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그에 단단하고 촘촘한 상징과 은유들이 소설 곳곳에 자리하여 소설을 하나의 정밀한 모자이크화로 만들었다. 권지예의 다른 단편들과 더불어, 이 작품에서도 섹스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권지예에게 섹스는 일단 상대와의 소통, 관계맺기의 정점인 동시에, 권태로운 일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그리하여 삶과 예술에 대한 동경이며 탐미적 자기도취를 이끌어내는 동시에, 죽음에의 희열과도 맞닿아 있다. 때문에 섹스는 희열의 순간이면서, 황폐와 허무를 체험하게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것이 관계에 대한 이해와 화해로 이어진다.
-“무언가를 죽여 보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없다” 그리고 ‘남편’. 그는 여자가 가진 두 개의 흉터(자살을 시도하다 오른 손목에 푸른 정맥을 가로지른 흉터, 오래 전 자궁에서 아이를 꺼내느라 생긴 흉터)에 대해 “그녀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도 그 상처들을 따뜻하게 핥아” “치유되고 있는 느낌”을 준 첫 남자였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수렁은 “한 발만 디뎠다 하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퀴벌레 잡이용 끈끈이 같아서, 그녀는 “단 한 번의 유혹에 소금 기둥처럼 바닥에 들러붙는 다리”가 되어 “죽는 날까지 남아 있는 생에 치를 떨다 죽어 버”리거나, “더듬이로만 울부짖다 서서히 죽어 가”게 될 지도 모를 공포를 느낀다. 이후 홀로 방황하는 “여자가 늘 떠나길 망설이는 새였다면 남편은 오래된 정원의 마로니에처럼 그 땅의 일부가 된” 듯 존재한다.
- “아무튼 잘 들여다보면 삶에는 어느 순간, 균열의 순간이 있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와 하루를 보내며, 영원히 낭만적이고 황홀한 사랑은 없음을, 언제나 생이란 어떤 균열들, 위선이나 기만들로 짜여질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남자 속에 숨은 권태와 황폐, 허무의 지점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도달하게 되는 연민과 화해.
-“그건 그저 아름다운 하나의 습관, 견딤, 의리라 한들 어떨까.” 또 다른 폭력이자 가둠일까? 남편은 집으로 돌아온 그녀에게 삼계탕을 끓여준다. “좀 외설스런 포즈”로 “두 다리를 한껏 가슴에 치켜 올린 채 누워있는 닭의 뚫린 꽁무니에 남편이 대추를 집어넣고” “인삼뿌리를 쑤셔 넣”는다. 삼계탕이 뭉근히 끓여지는 동안 이루어지는 섹스. 이후 지쳐 잠든 남편을 향해 그녀는 “인생의 황혼 무렵, 이 남자도 자신이 흘려버린 구슬을 찾아 신을 찾아 신고 헤맬 것인가(시집오기 전 남몰래 사랑한 총각을 한평생 마음의 고향으로 삼은 어머니처럼). 가슴속에 짜르르, 연민이 끓어올랐다.” 결국 그녀는 애증마저 긍정하고 화해한다. “격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한순간의 깊은 상처는 긴 세월 동안 흉터를 남긴다. 함께하는 세월 동안 남편은 그녀의 흉터를 핥아줄 것이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저 아름다운 하나의 습관, 견딤, 의리라 한들 어떨까. 생이라는 건 질긴 것이다. 구슬을 꿰는 실처럼. 하루하루 끊임없는 애증으로 엮어진 진실인 것이다.” 이윽고 소설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부엌에선 삼계탕 끓는 소리가 자작자작, 빗소리에 잦아들고 있을 것이다. 소리 죽여 우는 여자의 흐느낌처럼, 격렬한 섹스를 끝내고 잠든 남자의 박동소리처럼 고요히 끓고 있을 것이다. 삼계탕이 끓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고즈넉한 평화로움에 젖는다. 살아서 펄떡이는 것들을 모두 스튜 냄비에 안치고 서서히 고아내는 일. 살의나 열정보다는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 그건 바로 용서하는 일인지 모른다. 그녀는 이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삶이란 살아서 펄떡이는 것들을 서서히 고아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평화란 살의나 열정을 지나서만 얻어낼 수 있는 전리품인지도 모른다. 탈일상의 도발, 낭만적 사랑이나 환상을 찾았던 잠시의 격정을 지나,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와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것. 그것은 방랑의 질병을 거쳐야만 이뤄낼 수 있는 삶의 묵묵한 긍정이다. 공허와 무의미를 지나쳐 와야만 결국 의미, 삶의 심연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일까? 그리고 소설은 조용히 내비친다. 가둠과 갇힘은 어쩌면 주체의 내면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갇힌 영혼을 열고 상처에 덧입히기를 거듭해야만 결국 자유로운 영혼으로 삶을 서서히 고아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환상과 균열, 애증까지도 녹여 현실을 품어안는 묵묵함에는 삶의 주체이자 관계의 주체로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와 사랑이 있다. 소통! 을 갈구하지만 항상 어긋나게 되는 그 지점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이, 삶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겸허함이 그 속에 있다. 결국 “삶에는 추억이라든가 기억이라는 이름의 구슬들이 널려 있는데 그것을 어떤 실에 꿰어서 목걸이를 완성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은 아닐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신의 몫일까, 운명의 몫일까 생각해본다. 분명한 것은 생이 끝나는 순간까?우리는 미로와 같은 삶의 궤적을 방황하면서도 완벽한 목걸이를 만들어 보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꿰고 싶은 구슬을 놓치는 적도 있을 것이다.”
입력시간 : 2005-03-2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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