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을수록 빛나는 와인과 인생초라한 두 중년의 자연스런 삶 묘사, 와인의 다양한 맛과 향 가득

[문화 속 음식기행] 알렉산더 페인 감독 <사이드웨이> 와인
묵을수록 빛나는 와인과 인생
초라한 두 중년의 자연스런 삶 묘사, 와인의 다양한 맛과 향 가득


프랑스의 한 시골 마을에서는 매년 포도 수확기마다 ‘와인 마라톤’이라는 행사를 갖는다. 그런데 이 마라톤의 방식이 좀 독특하다. 참가자들은 운동복 대신 가장 무도회 복장으로 나오고, 코스 곳곳에는 물이 아니라 와인이 준비돼 있다. 이 대회에서 우승은 별 의미가 없다. 와인을 마시면서, 달리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 ‘사이드 웨이’는 와인 마라톤 같은, 두 남자의 어수선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두 주인공 마일즈(폴 지아매티)와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은 말 그대로 초라한 중년이다. 마일즈는 아내에게 버림받은 외로움을 와인으로 달래는 영어 교사로, 잭은 와인보다는 여자를 훨씬 좋아 하는 퇴물 배우로 등장한다. 무미 건조한 하루 하루를 보내던 이들은 잭의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산타바바라의 와인 농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마일즈와 잭은 여행 중에 마야와 스테파니라는 두 여인을 만나 더블 데이트를 즐기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달콤한 일탈은 곧 씁쓸함으로 바뀐다. 마일즈의 소설은 출판사에서 거절당하고, 그의 전처로부터는 재혼 소식이 들려온다. 사소한 실수로 새 연인들과의 관계도 꼬이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스타일만 구긴 채’ 집으로 돌아오는 두 사람. 얻은 게 없어 보이는 여행이지만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와인이 무르익어 가듯 , 마일즈와 잭도 아주 조금 성숙해진다.

이 한 편의 저예산 영화가 쟁쟁한 블록버스터들을 제치고 극찬을 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위적인 덧칠이나 진부한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삶에 대해 자연스럽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 두 주인공은 결코 외모가 아름답거나 마음이 선하지 않다. 이들의 여행이 극적인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며 두 사람의 우정이 눈물겹도록 지극하지도 않다. 그러나 오래 묵은 와인 한 잔의 향기처럼, 이 영화는 떨떠름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겨준다.

와인을 소재로 한 영화답게 ‘사이드웨이’에는 참으로 다양한 와인들이 등장한다. 피노 누아로 만든 샴페인은 여행에 나선 마일즈와 잭의 들뜬 마음을 표현하며, 네 남녀의 더블 데이트 자리에 등장한 소비뇽 블랑은 이들의 사랑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 마일즈는 아내와의 결혼 10주년에 마시려고 모셔 두었던 1961년산 슈발 블랑을 햄버거와 함께 들이켜 버린다.

와인 애호가들에게 미국산 와인은 한때 싸구려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저가 와인을 대량 생산했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기존의 유럽산 와인과 차별화되는 ‘색깔’을 만들어내면서 품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비유하자면 유럽산 와인이 오랜 역사에 걸맞은 기품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미국산은 풋풋하고 활기찬 매력이 있다. 현재 미국은 세계 4위의 와인 생산국이며 그 90%가 캘리포니아에서 만들어진다.

보통 미국 와인의 이름은 사용되는 포도 품종에 따라 정해지지만 최근에는 유럽식 블렌딩 와인의 생산도 늘고 있다. 유명한 와인으로는 농도가 짙고 강한 맛을 풍기는 까베르네 소비뇽을 비롯해 풍성한 과일향의 메를로, 다양한 스타일의 토착 품종인 진판델 등이 있다. 순한 과일향을 풍기는 피노 누아나 열대 과일의 풍미를 지닌 샤르도네, 풋풋한 향의 소비뇽 블랑 등도 애주가들에게 사랑 받는 와인이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한 캘리포니아 지역은 포도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와인 생산지로는 샌프란시스코 북부의 멘도치노, 나파, 소노마 카운티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나파 벨리산 포도는 ‘보라색 황금’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만큼 뛰어난 맛과 향을 자랑한다. 특히 나파 벨리에서는 컬트 와인(cult wine: 캘리포니아에서 소량 생산, 한정 판매하는 고품질 와인)을 비롯한 값비싼 와인들이 생산되고 있다.

와인은 원칙적으로 칵테일로 만들어 마시지 않는다. 본래의 맛과 향을 그대로 즐기기 위해서다. 그러나 중저가의 와인을 가볍게 즐기고 싶거나 와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 칵테일을 만들어 보는 것도 색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와인에 과일을 썰어 넣고 오렌지 주스를 섞은 ‘샹그리아’는 무더운 여름 날씨에 어울리며, 레드 와인에 설탕과 계피, 레몬 껍질을 넣어 따뜻하게 마시는 ‘뱅 쇼’(vin chaud: 따뜻한 와인이라는 뜻)는 코끝을 찌르는 진한 향기가 기분을 좋게 만든다. 요즘 같은 환절기에 마시면 감기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 뱅 쇼 만들기
-재료(1인분): 레드 와인 한 컵, 레몬 1개, 설탕 1큰술, 통계피 한 조각

-만드는 법:
1. 레몬은 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겉에 묻은 농약을 제거한다.
2. 필러로 레몬 껍질을 얇게 벗긴다.
3. 주전자에 와인을 붓고 설탕과 레몬 껍질, 계피를 넣어 따뜻하게 데운다.

정세진 맛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4-04 20:12


정세진 맛 칼럼니스트 sejinjeong@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