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과 동물을 넘나드는 탐미와 관능의 세계결국 인간과 예술

[문학과 페미니즘] 한 강의 <몽고반점>
식물과 동물을 넘나드는 탐미와 관능의 세계
결국 인간과 예술


- 절대미를 향한 추구와 실현, 현실에서의 그 좌절까지
소설가 한승원의 딸인 한강은 1988년 아버지에 이어 2005년 이상문학상을 받아 부녀가 나란히 같은 문학상을 수상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1993년 시로, 다음해에는 소설로 등단한 한강은 이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적 토대를 닦아왔는데, 그의 소설은 긴밀한 서사와 치밀한 묘사, 풍부한 상징, 안정된 문체로 평가 받는다.

특히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은 그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매우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는 소재와 위태로울 만큼 관능적인 성적 묘사 속에는 삶과 예술, 육체와 성, 욕망과 일탈의 문제들이 녹아있고, 이 모두는 작가의 차분한 호흡과 차원 높은 미적 감각으로 하나의 예술적 경지를 일구어냈다.

소설은 비디오아티스트인 ‘그’의 절대미를 향한 예술적 열망이 몽고반점을 지닌 처제에 대한 성적 욕망과 얽히면서 진행된다.(처제를 상대로 설정한 것은 사회 제도나 삶의 규범, 일상의 삶이 갖는 금기를 보다 강조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읽어야 마땅하다. 처제와의 성교 역시 일상의 질서와는 상충하고 고통을 수반하지만, 절대미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하나의 상징적 제의다.)

소설의 시선과 목소리의 주인공인 ‘그’는 2년 간의 공백기에서 하나의 강렬한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아내로부터 처제에게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말을 들은 후 그를 사로잡은 “흡사 괴물과도 같은” “관능적인, 다만 관능적일 뿐인” 이미지는 그를 점점 고통스럽게 만든다.

모든 순간 정갈해 “너무 좋기만 한 것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는”아내와의 일상이 주는 진부함과 오랜 공백기의 절망감, 늙고 추해지는 자신의 육체 등에 대한 환멸은 더더욱 그 이미지를 부추겨 “이것만큼 강렬하고 매혹적인 어떤 이미지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것이 아니면 안되”는 절대적인 것으로 그에게 각인된다. 그는 처제의 몽고반점을 상상하며 “대상이 분명하며 강렬한 성욕"을 느끼는데, 이 역시 자신의 결핍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의 욕망이자, 강렬한 예술적 열망이기도 하다.

특히 자살을 시도해(이는 고기를 먹지 않는 처제에게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의 장인이” “우격다짐으로 입 안에 고깃덩어리를 밀어 넣”어서 벌어진 일이다) 피를 흘리는 처제를 업고 달렸던 체험은 “그의 운명에 대한 해독할 수 없는, 충격적인 암시처럼” 느껴진다.

그는 그 “단 한 순간에” 자신의 이전 작품들 모두에 “구역질”과 환멸을 느끼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게 된다. 이후 처제의 몽고반점에 대해 듣고, 이 사건은 “추체험”으로 그에게 각인되는데, 처제의 자의식과 도발성은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원초성의 상징인 몽고반점의 이미지와 얽혀 그에게 동물적 욕망과 예술적 열망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매개로 작용한다.

-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
처제 영혜를 찬찬히 보자. 그녀는 철저한 식물성 지대에 있다. 세상의 무엇도 욕망하지 않는 듯이, 스스로 식물이고자 하는 그녀는, 자살 기도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정상적 세계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채식주의자일 뿐 아니라, 마치 광합성을 하듯 “늦가을 햇볕을 쬐며 낮 시간을 보”내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경계에 가 있는 사람의 덤덤한 음성”을 지니고 있으며, 옷을 입기보다는 벗기를 더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는 그런 처제를 설득해, 처제의 나체에 온통 꽃을 그리고, 비디오 촬영을 한다. 그는 “지나치게 담담해, 대체 얼마나 지독한 것들이 삭혀지거나 앙금으로 가라앉고 난 뒤의 표면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선”을 지녔으나,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를 가진 처제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를 충격한 것”의 실체가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임을 깨닫는다.

처제의 몽고반점은 이제 그에게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 그는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을 경험한다. “40년 가까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찬란한 희열”로 전율하는 그에게 처제는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소설에서 식물성에의 탐닉은 원시 혹은 태고에의 동경이자 현실의 삶을 넘어서는 어떤 절대적 미의 추구와 맞닿아 있다. 처제의 몸은 식물의 몸이자 근원적 아름다움이 깃 들어 있는 몸, (그에게) 동물적 관능을 일깨우는 몸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해 있고 초월하게 만드는 몸이기도 하다. 그 속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 현실에서는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고 무표정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죽음 같은 삶과 더불어, 하나의 식물처럼 꽃처럼 생생하고 아름다운 육체로서의 삶이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 “그 사람 몸에 뒤덮인 꽃이요… 그게 날 못 견디게 했던 거예요”
그는 서서히 자신이 꿈꾸던 이미지, “진공 공간과 같은 침묵 속에서 몸에 꽃을 그린 남녀가 교합하는 장면. (…) 적나라하나 그 적나라함으로 인하여, 그 극한으로 인하여 도리어 고요히 정화되는 지점”에 다가간다. 후배와 처제의 나체에 꽃을 그리고 촬영을 진행하게 된다.

촬영을 하며 성적으로 흥분한 처제는 촬영 후 그것이 상대의 몸에 그려진 꽃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 그 사람 몸에 뒤덮인 꽃이요… 그게 날 못 견디게 했던 거예요. 그것뿐이에요”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철저히 욕망을 배제하고 사는 듯한 처제, 그러나 극도의 아름다움을 현현하고 있는 그녀의 몸에 욕망을 일깨운 것이 ‘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식물성의 그녀에게 동물적 욕망을 일깨운 것은 동물성이 아닌 식물성, ‘꽃’이었던 것이다. 동물적 욕망에는 무심한 듯한 처제이지만, 그녀는 식물처럼 자연스럽게 철저한 주체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피워낸다.

이후 그는 “죽었으면 좋겠어”를 외치며 “덜덜 떨리는 몸을 주문처럼 진정시키는”데, 이 지점에서 극단적 미의 추구는 곧 죽음에의 충동과 맞물려 있음이 드러난다. 완전한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쾌락을 추구하는 삶에의 충동 에로스가 향하는 지점은 죽음에의 충동 타나토스이다. 몸에 대한 욕망, 극단적 에로스의 추구는 죽음에의 충동 타나토스와 얽히면서 가장 강렬한 예술적 열망으로 태어난다.

-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
그리하여 소설은 그가 처음부터 꿈꾸었던 이미지를 몸소 실현하는 지점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몸에 온통 꽃을 그리고 처제를 찾아간다. 마치 “겹쳐진 꽃들”과 같이 두 사람은 결합하고 “꽃과 짐승과 인간의 뒤섞인 한 몸”이 된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꿈꿔왔던 대로 였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의 붉은 꽃이 닫혔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됐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 속을 드나들었다.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원초적 순수성을 연상시키는 처제의 몽고반점을, “낙인 같은 이 점을 나눠 갖고 싶다고 (…) 널 삼켜서, 녹여서, 내 혈관 속에 흐르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특히 꽃들의 결합 순간은 두 인간의 결합 순간이며, 여기에는 짐승의 교합이 만들어내는 신음소리도 가세한다. 꽃과 육체, 식물과 인간은 서로 섞이며, 동물적 관능을 분출한다. 처제와의 섹스는, 그의 동물적 욕망과 더불어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세계 혹은 극단적 아름다움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 실현되는 지점이다. 그녀가 식물이라면 그는 동물이고, 그녀의 동물적 관능을 일깨운 것이 꽃이라면, 그의 동물적 관능을 일깨운 것은 근원적인 것의 상징인 몽고반점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동물과 식물,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이 지점에서 모두 교차하고 순환한다. 처제의 몸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과 온몸에 그려진 꽃들, 그 꽃들이 서로 겹쳐지는 섹스는 하나의 심미적 도구로 식물과 동물, 아울러 인간과 예술의 이미지를 모두 현현해낸다. 마침내 그것은 동물과 식물의 구별마저 넘어서는 어떤 원초적 지점, 인간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극단적 예술미를 창조한다.

소설은 그러나 오롯한 현실로 돌아와 막을 내린다. 그들의 꽃이 그려진 벗은 몸과 밤새 촬영된 테이프를 본 아내는 “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라며 구급대를 불러놓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절대적 예술 혹은 미의 추구는 현실의 질서와 상충하는 것, 혹은 금기를 넘어서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임을 소설은 은근히 내비친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처제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을 보인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겪어버렸다고, 늙어버렸다고, 지금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구급대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설에서 몽고반점은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그'에게 강렬한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킨 처제의 몽고반점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욕망조차 초월하는 그 무엇, 식물성과 동물성을 지나 "본질적인, 어떤 영원한 것을 상기시키는" 근원적인 것의 낙인으로 자리매김한다.

결국 몽고반점이 향하는 지점은 어떤 잃어버린 순수 혹은 절대미이고, 소설은 그런 예술적 열망을 모색하고 추구해 실현하는 과정들을 밟아 간다.


입력시간 : 2005-04-2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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