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늘 아래서 함게 아파하며 그늘을 지운다

[문학과 페미니즘] 이혜경의 <꽃그늘 아래>
꽃그늘 아래서 함게 아파하며 그늘을 지운다

1982년에 등단해 1995년 <오늘의 작가상>과 2002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혜경은 ‘가족’을 소설의 주요 화두로 삼아왔다. 그의 작품들은 가족의 내력을 파헤치며 그 표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여성들의 상처 어린 삶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곤 했다. 이미 남성적 가치관이나 양식으로 규정되어진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그 속에 숨은 여성의 내면과 상처를 파헤치며, 그 슬픔이나 절망에 조용히 화해를 모색하는 여성 화자들이 이혜경 소설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또한 그의 소설은 가족을, 그것도 대단하거나 파격적인 가족이 아니라,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가족을 이야기하기에, 소설은 결코 특정한 해답을 향해 있지 않다. 차라리 그 해답 없는 묵묵한 질문들이 이혜경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해답이 없지만, 해답 없다는 그 지점까지 끌어안는 깊이.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함께 아파하고 이해해가는 포용력. 그 속에 잠재하고 있는, 사라져가는 것들과 상실되어 가는 것들, 곧 삶에 대한 끈끈한 애착이 소설의 결을 아름답게 한다.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꽃’의 이미지와 상징 속에서 조용한 화해가 녹아나는 작품, <꽃그늘 아래>에서도 이혜경 특유의 찬찬함을 맛볼 수 있다. 오래 씹어야 맛이 우러나는 음식을 먹듯 천천히 씹고 씹으며 음미해볼만 하다.

- “사랑이 왔을 때 일부러 거리를 두려 했던 오만”은 얼마나 큰 잘못이었던가
주인공인 서연은 결혼을 두 달 앞 둔 어느 날 인도네시아에서 일하던 연인의 부음을 접한다. 집들이에 왔다가 지신밟기를 한다는 연인 영모의 전화. “귀신보다는 귀신 이야기를 하는 영모의 몰두 때문에, 서연은 막연한 불안을 느끼며 잠을 설쳤고”, 그것은 그와의 마지막 통화가 되었던 것이다. 몇 번의 열애를 겪고(“쇳덩이를 맑고 발갛게 달구던 열정. 그 열기가 식으며 검푸른 쇳덩이로 되돌아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갛게 달궈져 불꽃 튀던 기억을 잊을 수 없던 서연은 또 다른 꽃불에 몸을 던졌다. 이 사람이 처음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아쉬움에 서연은 사랑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마라톤 코스를 단거리 경주의 속도로 치달은 사랑은 쉬 종말을 맞곤 했다.” 많은 것을 요구했었던 마지막 남자는 “서연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 남자가 바라던 여자와 비슷해졌다고 생각할 즈음” “넌 변했어. 이젠 그전만큼 매력이 없어”라며 “결별을 선언했다”), 상처투성이가 된 서연을 끌어안아주었던 영모였기에 그의 죽음은 서연의 가슴에 더욱 큰 멍에를 만들었다. “영모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땅을 파헤쳐 공기가 통하게 하고, 무성하게 뻗어서 볕을 가리는 넝쿨들을 걷어내고, 그리고 조심조심 씨앗을 심고 흙을 북돋웠던” 사람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서연은 결혼을 서둘렀던 영모의 말을 들어주지 못한 것, 특히 “사랑이 왔을 때 일부러 거리를 두려 했던 오만”을 자책한다. 사랑의 상처가 많았던 서연은 영모의 뭉근한 사랑에도 “거기 섞여 있을 열정의 변덕”을 두려워했고, 그 때문에 “쐐기풀로 옷을 잣는 여자처럼 꼼짝도 않고 견뎌냈다. 담금질과 단근질의 나날. 그 날들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물결에도 쓸리지 않으며 걸핏하면 녹을 만들어 부스러뜨리려는 시간에도 견딜 수 있도록 그들의 사랑을 연단하리라고 믿으면서.”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익혀가기를 기다릴 때 사랑하는 영모는 이미 죽어버렸고, “그가 회오리 같은 기운에 휘말려 심해로 끌려들어가던 그때, 그 소름 돋게 외롭던 때에 곁에 있지 못했다는 자책”만이 그녀를 괴롭힐 따름이다. 서연은 “꿈속에서라도 그를 만나, 함께 떠나지 못한 것을, 감히 사랑을 시험대에 올린 것을 사죄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 “무서웠겠구나,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그러던 어느 날 서연은 “영모가 살던 집에 영모로 보이는 사람이 자꾸만 나타난다.” “아무래도 영모가 못 떠나고 있는 거 아닌가 싶다”는, 인도네시아에 사는 영모 친구의 전화를 받고 인도네시아행을 결심한다.

한편 서연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만큼이나 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땅”인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도착하면서부터 “착란과 같은 기시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자카르타와 족자카르타, 발리를 거치는 여정에서 “문득문득 한국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을 연상하게 하는 얼굴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서연은 자기가 이곳에 실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서연은 과거 이해하지 못했던 영모의 말들도 하?둘씩 이해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모의 후배인 윤지에게 여행 안내를 받는 서연은 윤지가 영모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음을 감지한다. 그러나 “영모가 있었더라면” “아주 예쁜 상자에 담겨 배달된, 어찌해볼 길 없는 폭발물로 느껴졌을” 윤지를 그녀는 묵묵히 바라봐 준다. “윤지의 감정이 높은 파고를 오르내리는 게 감지되었지만”, “서연은 영모의 눈으로 그런 윤지를 보았다. 사랑스러웠다. 동그란 원통에 말린 채 포장을 뜯지 않은 은박지처럼 구겨져본 적 없는 영혼, 제 비밀을 가두고 있는 게 버거워서 끝내 그걸 부려놓은 순진한 영혼.”

이윽고 서연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모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아파하는 윤지의 “또박또박 토해내는 회한”을 듣는다. “그렇게 누군가를 바란 건 처음이었어요”라는 윤지는, “벌 받을 마음인 줄 알면서도,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를, 그래서 영모 오빠를 제가 차지할 수 있게 되기를 빌었어요. 오빠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벌 받는 것쯤은 무섭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서연은 그런 윤지를 가만히 이해해준다. “무서웠겠구나,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그 물속에 끌려들어가던 순간의 영모에겐지 아니면 영모를 열망하던 나날의 윤지에겐지 모르게, 서연은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마침내 서연의 옆에서 영모가 빠져 죽은 바다를 바라보며 “그만, 그만 떠나가세요”라고 말하는 윤지.

- “싱싱한 꽃보다는 적당히 시든 꽃에서 향기가 더 진하게 우러난대요”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랑을 염원하며 기도할 때 바치는 동시에, 저주를 퍼부을 때도 쓰인다는 꽃. 꽃의 이미지는 소설의 중간 중간에 등장해 소설 전체를 감싼다. 영모의 부음을 전해들을 때도, 영모와 사랑을 꽃피운 시절을 기억할 때도, 영모의 자취를 밟아갈 때도, 서연과 윤지가 조금씩 거리를 좁혀갈 때도, 마침내 영모를 보내줄 때도, 서연과 윤지가 서로를 감싸 안을 때도 꽃이 등장해 마치 수채화에 점점이 꽃을 그려내듯 그 장면들을 물들인다. 그리하여 꽃은 아름답고 빛나는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시든 사랑이 묵묵히 꽃물을 우러나게 만들어 또 다른 생으로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냄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서연이 영모를 떠나보내주는 것도 꽃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 서연은 관광 중에 이름 모를 사람의 화장 장례식을 보다가, 처음 보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여인에게서 꽃을 받는다. 서연은 그 꽃을 “영모의 영혼이 떠도는 어름에서 서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영모가 편지 속에 담아 보내준 꽃 한줌과 섞는다. 그리고 장례식을 보며 “가는구나, 가려 하는구나, 이제 정녕 떠나가는구나”를 중얼거린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서, 서연은 윤지가 마련해놓은 꽃물로 목욕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몸을 씻을 때 사용한다는 꽃물로 몸을 씻는 서연에게, 윤지는 “그런데요, 싱싱한 꽃보다는 적당히 시든 꽃에서 향기가 더 진하게 우러난대요”라고 말하며 위무를 던진다. “서연은 남은 꽃물을 한꺼번에 몸에 쏟아 부어 윤지의 말(영모를 사랑해서 서연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를 바랐다는)을 지워냈다. 명부로 빨려 들어가는 영혼처럼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

결혼을 두 달 앞두고 애인을 잃어버린 서연과 난생 처음 사랑에 빠진(그러나 마음껏 사랑할 수조차 없었던) 상대를 잃어버린 윤지는 그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위무했다. 마음속으로 서로의 존재를 존중해주고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함께 아파하고 애도해 그를 다른 세상으로 보낼 수 있었다. 같은 꽃물로 몸을 씻어내고 또 다른 생을 기다리는 그들. 상처의 공유는 치유의 시작인 것이다.

그들의 자매애적 화해는 서연에게 꽃을 건네준, 이름 모를 한 인도네시아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연은 어딘가 낯이 익은 그녀를 “스쳐간 한 시기의 어느 인연. 아니 어쩌면 전생의. 어쩌면 다음 생에 자매로 인연 맺을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꽃을 영모에게서 받은 꽃과 섞으면서 서연은 영모를 영영 떠나보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전생과 후생을 모두 넘나들며 생들을, 죽음들을 끌어안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위무의 말을 건네는 것도, 함께 울음을 터트리는 것도 아니지만, 그 여성들은 서로의 존재를 묵묵히 느끼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위무한다. 사랑이라는 꽃, 그 꽃이 만들어내는 꽃그늘은 그늘이지만 암울하지만은 않다. 꽃의 아름다움이 그늘마저 아름답게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꽃그늘 아래서 잠시 손을 잡은 그들이 있기 때문에. 꽃이 만들어내는 그늘은 아직 짙고, 그들의 가슴에 어린 상처도 여전하지만, 꽃그늘 아래 그들이 같이 앉아 슬픔의 노래를 부르니 꽃그늘조차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 꽃들을 우려낸 꽃물로 몸을 씻어내는 제의는 작은 흔적을 만들어 낸다. “채 건져내지 못한 꽃잎 몇 장이 흘러내렸다. 물이 빠지는 바람에 욕조 안쪽 네 면에 점점이 붙은 발자국, 아주 작은 발자국 같았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7-14 16:42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