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 스며들어 생을 누리는 죽음과 삶

[문학과 페미니즘] 천운영의 <명랑>
서로에 스며들어 생을 누리는 죽음과 삶

2000년 <바늘>로 등단한 이후 한국 문학의 새로운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는 작가 천운영. 그가 지난 2004년 펴낸 소설집 <명랑>은 몇 가지 점에서 2001년의 소설집 <바늘>과 비교된다. <바늘>이 면밀한 취재에 기반한 치밀한 묘사와 강렬한 이미지로 대변되었다면, <명랑>은 다양한 형식적 실험과 더불어 보다 성숙된 작가 의식을 보여준다.

작가 역시 <바늘>이 ‘미추의 경계’를 다룬 것이라면, <명랑>에서는 ‘생사의 경계’를 다루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생명을 갈망하나 그것을 온전히, 완연(完然)히 이루지는 못하는 비루한 이들의 비극이 각각 성격을 달리 하는 <바늘>과 <명랑>에서 그렇듯 그려진 것이다.

하지만 <명랑>은 <바늘>에서의 열정이 은근히 농익은 느낌이다. <바늘>이 섬뜩했다면, <명랑>은 그 섬뜩한 열정을 보다 내면 속에 녹여 은근한 온기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천운영 소설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을 ‘몸’(결국 ‘생명’)에 대한 사유 역시 <명랑>에서 그 감각의 영역을 넓혀가 보다 성숙해져 있다.

한편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천운영 소설이 늘 여성으로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명료할 것 같다. ‘여성’은 천운영 소설이 갈구하고 추구하나 그 도달에는 늘 실패하고야 마는 ‘생명’, 그 생명에 보다 가까운 몸이자 존재이니까.

소설 <명랑>은 할머니와 어머니, 딸에 이르는 삼대의 이야기이다. 한 평생 힘들게 일하는 것이라곤 모르고 살아온 할머니(어머니의 시어머니), 유원지에서 백숙을 팔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며 아득바득 살아가는 어머니, 미용사 기술과 발관리사 기술을 배웠으나 아직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살고 있는 딸이 그 주인공들이다.

서로에 대한 긴장이 소설의 큰 구조를 짜고 있는데, 주목할 만 한 점은 그 긴장 속에 숨겨진, 체온과 체취가 물씬 풍기는 따스한 애정이다. 특히, 소설이 어머니와 딸, 각각의 시선과 목소리로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점은 이채롭다(그러니 소설을 읽어가며 ‘나’가 어머니인지, 딸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화와 소멸이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의 몸
점점 죽음으로 향해가는 할머니, 그녀를 상징하는 것은 “전족을 한 것처럼 작고 위태”로운 발과 습관처럼 입에 털어넣는 진통제 가루 ‘명랑’이다. “촉수를 세운 더듬이”처럼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을 탐색하고 위험을 감지”하는 발. 그 “흰 버선발은 어둠과 냄새의 여운을 말끔하게 몰아낸다.

오히려 발등에 수놓아진 붉은 꽃송이에서 향긋한 꽃내음이라도 풍겨나오는 듯하다.” 그리고 ‘명랑’. 할머니는 그 하얀 가루를 마치 설탕 가루인 양 시도 때도 없이 입 안에 털어넣는다. “그녀가 먹은 것은 약이 아니라 방부제인지도 모른다. 그녀 몸은 이미 부패가 시작되었고 부패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방부제를 투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리하여 그녀는 죽어도 썩지 않으리라.” 할머니가 먹는 명랑 가루는 고통을 누그러뜨려 삶을 연장하는 수단(다른 한편으로 과용으로 인해 죽음에 다가가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인 동시에,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망각하려는) 근원적 본능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할머니의 “단단한 젖가슴 위에 자그마하게 자리 잡은 분홍빛 유두는 이제 막 젖멍울이 지기 시작한 소녀의 것과 비슷하다. 그녀의 가슴에는 진화와 소멸이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세월을 거스르고 싶은 것이다. 죽음을 맞으러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탄생 이전의 따뜻한 양수 속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직은 어린 손녀, ‘나’는 그렇듯 젊음을 희구하는 할머니와는 달리, “늙은 여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세월의 고난을 거치지 않고서 곧바로 늙은 여자가 되어 세상을 비껴보고 싶은 것이다”를 중얼거린다. “과거의 회한과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함께 침묵하고 있는 늙은이의 눈동자”, “무엇에도 잡히지 않는 시선의 자유로움”이 깃든 “바라보면서도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있는, 마른 듯 하면서도 젖어 있는, 간절하면서도 무심한 늙은이의 눈동자”를 나는 욕망한다. 서로를 탐하는 젊음과 늙음, 그리고 그 사이에 중년의 어머니가 있다.

노인네에게서 풍기는 “죽었으나 썩지 않기 위해 제 몸을 삭히는 발효의 냄새”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죽은 이후 집안의 생계를 떠안고 있는 어머니는 그녀의 시어머니인 할머니에게도, 딸에게도 늘 악다구니를 퍼붓는다. 그러나 그 악다구니 속에 숨긴 것은 어쩔 ?없는 애정. 자신이 먹고 치장하는 데는 돈을 써도 자식들 교육시키는 데는 무심했던 시어머니, “평생 일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할머니를 ‘나’(어머니)는 “모두 그녀 때문인 것 같았다”라고 줄곧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입맛이 까다로운 그녀를 위해 가오리를 삭히고, 그녀의 요구를 단번에 무시하고서도 돌아서서는 요구를 들어줄 궁리에 부산하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녀에게 쌈닭처럼 달려들거나 낯선 사람처럼 무심하게 대하기 시작했”지만, 그리고 “그녀는 나의 냉대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입이 짧은 그녀를 위해 굴비를 찌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을 고려해 실고추와 깨를 듬뿍 뿌린다.

한편, 나는 “어머니처럼 곱게 늙지는 못할 것”을 예상하고, “이미 나는 그녀보다 훨씬 늙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시어머니에게서 “죽었으나 썩지 않기 위해 제 몸을 삭히는 발효의 냄새”, “늙고 외롭고 쓸쓸해서 고함치는 냄새”를 감지하고, 그녀의 “호소와 갈망과 애증으로 가득한 눈”, “어딘지 원망하는 것 같은 눈동자 속”에서 “언제나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운” “공유하는 과거”를 본다. 그러나 “버선에 단단히 싸매진 그녀의 발은 어딘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고, 나는 “숨소리도 안 내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노인네를 보면 불안해진다. 남편상을 치르긴 했지만 나는 아직 죽음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 나는 그것이 정화수라도 되듯 빌어보는 것이다. 내가 준비될 때까지만 살아달라고.”

어머니와 딸의 팽팽한 긴장이 풀어질 무렵 찾아온 할머니의 죽음
할머니와 어머니, 어머니와 딸, 딸과 할머니 사이의 긴장감으로 그 큰 구조를 엮어 놓은 소설은, 특히 어머니와 딸 사이의 긴장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그 역시 이중적이다. 아직 취직을 못 하고 있는 딸에게 어머니는 용돈이나 받아쓰지 말라고 악다구니를 치지만, “지금이야 자주 불퉁거리긴 하지만 심성 하나는 어릴 적부터 고왔던 애다”라고 되뇌고, 자는 아이의 가방 속에 몰래 돈을 넣어주곤 한다.

딸은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하면서도, 손님이 다 가도록 골방에서 지내야 하는 할머니에 대해 “아예 가둬놓고 굶겨 죽이지 그래?”라며 가슴에 못 박는 말들을 내지르곤 한다. 그녀가 탐하는 할머니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엄마에게서는 누린내가 난다. (…) 엄마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여자의 냄새가 아니다. 엄마의 목소리가 굵어지면서, 수염이라도 난 것처럼 코밑이 검어지면서부터 풍기기 시작한 그 냄새는, 사내들의 콧바람에서 묻어나오는 역겨운 냄새와 닮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찜질방에 간 딸, 노인네의 재촉으로 딸을 찾아나선 어머니. 그러면서 소설은 진행 속도가 빨라진다. 폭우를 헤치고 찜질방을 찾아가는 어머니는 다시 “노인네 때문이야”라며 “노인네에게 악담을 퍼붓는다. 모든 것이 노인네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찜질방에서 딸은 처음으로 지독히도 못 생기고 남루한 어머니의 발을 맛사지해 준다.

밤새 찜질방에서 두 사람이 시간을 보내며 서로 간의 긴장을 녹인 사이, 밖에는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린 두 사람은 불어난 계곡물과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유원지를 따라 늘어선 식당들이 폭우에 휩쓸려 뭉개졌던 것. 우리 집 역시 토사와 바위들에 묻혀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이 처참하다. “온몸의 힘이 모두 사라져버린 듯하다. 내 앞에 펼쳐진 살풍경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죽음에 의해 끊임없이 보충되는 삶
그렇게 할머니는 갑자기 죽었다. 손녀는 마지막으로 (늘 버선 속에 숨어 있던) 할머니의 맨발(“꼭 회독 오른 아버지의 발 같았”던)을 본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쩌면 죽은 것이 아니다. 내(손녀) 속에서 또 다른 생을 누리기 때문에. “눈을 감아도 검은 망막 위에 곧바로 새겨지는 버선발. 나는 사람들이 양말을 벗고 맨발을 보일 때마다 그녀의 버선발을 생각한다.” 그리고 “꼭 명랑 가루 같”은 “곱게 빻아진 그녀의 뼈”를 나는 살아생전 할머니가 명랑 가루를 먹듯, 조금씩 맛본다.

“납골당에 넣기 전, 나는 그녀의 뼛가루를 조금 덜어내 작은 상자 안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이 생각날 때마다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 그녀의 뼛가루를 묻힌 다음 혓바닥으로 맛을 보곤 했다. 내 내부에는 언제나 나를 바라보며 침묵하는 그녀가 있다. 그녀는 내 속에서 숨 쉬고 내 속에서 잠을 잔다. 그녀는 가끔 내 속에서 버선발을 내밀기도 한다. 나는 내 속에 있는 그녀를 위해 명랑을 먹는다. 설탕처럼 하얗고 반짝이는 명랑 가루에서는 그녀의 냄새가 난다.”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살아가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과 대면하게 되면 삶을 절실히 느끼곤 한다. 어쩌면 인간은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죽음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죽음은 삶을 보충하고, 삶은 또한 죽음을 연기하려고 애쓴다. 그렇듯 <명랑>에는 삶 속에 다시금 녹아나는 죽음이 있고, 그 죽음 속에 숨은 삶에 대한 본능적인 희구가 있다.

노쇠로 인해 죽음으로 다가가는(마치 죽지 못해 사는 듯 보였던) 할머니 역시 그 죽음 속에 늘 삶의 욕망을 품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죽음 속에 숨은, 삶에의 욕망은 이제 손녀에게서 반복된다. 죽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 명랑을 상복했던 할머니처럼, 손녀는 그녀 속에 할머니의 죽음을(실은 삶에의 희구를) 살게 하기 위해 할머니의 유골 가루를 맛본다. 할머니의 죽음은 이제 손녀에게는 삶이다. 죽음이 각인된 그녀의 삶은 더욱 강렬해지리라. 그 죽음 속에는 삶에의 희구가 숨어 있었으니, 그것은 죽음을 맛봄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는 더욱 생생한 삶일 터이니.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7-22 16:01


권민정 자유기고가 eunsae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