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가 찢길지라도 먼먼 바다를 건너가려는 나비처럼

[문학과 페미니즘]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
날개가 찢길지라도 먼먼 바다를 건너가려는 나비처럼

<바다와 나비: 2003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3.

이른 등단으로 20여년의 작품 활동을 해온 김인숙.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문학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성실을 잃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르는 만큼이나 웅숭깊게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 그런 김인숙이 최근에 특히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인간관계에 내재한 소통불능이다.

사랑이나 이상을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원대한 꿈이 비루한 일상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인물들에게 남은 일은 자신에 대한 모멸과 생에 대한 환멸 뿐이다. 그런 상처 받은 인물들은 소통을 갈구하나 그것은 늘 불가능하거나 너무 늦다. 그러나 모멸이나 환멸 같은 자기 부정의 과정은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애달픈 몸짓에 다름 아니다.

소통불능이 만들어내는 단절감과 고독마저도 존재에 대한 지극한 희구를 향해있기에 존재와 소통에 대한 깊은 고뇌와 성찰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그 무엇도 온전히 남아있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이미 폐기된 꿈을 환기하거나 다른 소통을 꿈꾸는 과정 속에 김인숙 소설이 있다.

그에게 2003년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작품, <바다와 나비>는 몇 가지의 서사가 촘촘하게 결을 이룬 섬세한 작품이다. 황량하고 황폐한 인간 관계의 본질을 바라보면서도 그를 넘어서서 존재와 소통으로 나가고자 하는 나비의 몸짓은 독자의 마음에 선연한 자국을 남긴다.

“나는 그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와 함께 울고 싶었다. 그와 함께 울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다.”
화자인 나는 “아이를 세계인으로 만들기 위해”라는 명분으로,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으로 떠나왔다. 그러나 중국 행의 본질적인 이유는 더 이상 소통되지 않는 남편을 떠나기 위해서다.

“무언가에 완전히 장악되어” 버린 남편은 더 이상 나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과거 스스로 사표를 던지고 나와 3년 동안 실업자로 살아가면서 “모욕과 비굴”의 극한을 겪고는, 전 직장에 다시 들어가 “단지 자기 것인 의자 하나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되어버린 남편.

“그에겐 더 이상 나와 할 말이 남아 있지 않다.”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혹 질문을 던지더라도 “말끝에는 의문부호가 달려 있는 않는” 남편에게 나는 늘 혼자 말을 덧붙여 이야기해야 했고, “이제 모욕을 당하고, 비굴해져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인 듯 했다.”

술에 취한 남편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도, “나로서는 그가 울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 어쩌면 평생 동안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참혹하게 만들었다. 더욱 괴로운 것은, 어쩌면 그 자신조차도 본인이 울고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하리라는 예감이었다.” “내가 그에게 원했던 것, 내가 내 삶에 대해 원했던 것….

세월이 흐를수록 배반만 더해지던 내 삶의 욕망에, 그러나 내가 무릎을 꿇지 못했다는 것…. 어쩌면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더라도 그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다. 용서할 줄 알았다면, 벌써 무릎을 꿇을 줄도 알았으리라.”

그러니 나에게 그는 마치 죽은 사람인 듯 보인다. “비명을 지르고, 공포에 떨고, 울음을 터뜨리는 건 그(죽은 사람)를 바라보는 사람들 쪽”인 것처럼, 남편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지라도, 내게 “다른 사람의 넋”으로 보이는 그와의 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선택은, 혼자서조차 말할 수 없는 곳, 언어적 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한 곳(중국)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죽음보다 더한 거”, “살아서 못 볼 것들을 모조리, 남김없이 다 봐야 한다는 거”
한편 나는 중국에서 내 어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일하는 한 조선족 여인의 딸, 채금을 만난다. 이제 겨우 25세인 그녀는 한국으로 가기 위해 마흔 살도 넘는,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 남자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다.

“앞으로 그녀가 겪어야 할 것이 다만 언어의 문제만은 아닐 테니”라고 생각하는 나. 결국 어린 채금은, 스물 다섯에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던 나처럼, “언어보다 더한 것들…, 그러나 결국 언어인 것”, 소통불능의 고통을 겪게 될 터였다.

한편 나는 채금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여덟 살에 한 죄수가 총살당하는 장면을 보고 그것을 본 한쪽 눈이 멀어, 그 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죽음의 냄새” “남겨진 자들의 공포”를 느끼며, “평생 동안 죽은 사람의 넋으로만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서 찾게 되는 것은 두 눈을 번연히 뜨고도 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죽은 것만 같은 남편의 모습이다.

채금의 아버지는 “남아 있는 눈이 보고 있는 게” “죽음보다 더한 거”라고, “살아 있다는 거라고, 살아서 못 볼 것들을 모조리 남김없이 다 봐야 한다는 거라고, 그것도 아주 천천히 아주 아주 오래”라고 말한다. 그에게 죽음은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상처의 중심이지만, 더욱 가혹한 것은 죽음 이후에 감당해야 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넋인 양, 죽은 듯 살아가는 그에게도 삶은 늘 고통이었다. 죽음이 불러일으킨 존재 확인에 대한 치열한 욕망을 삶은 매번 배반했을 터이므로. 나는 채금의 아버지의 두 눈(죽음과 삶을 각각 상징하고 있는)을 바라보며, 그가 어떤 눈으로 나에게 말을 하는지에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나는 다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라며 긴 독백의 편지를 쓴다. 내가 과거 채금의 아버지처럼 여덟 살 아이이고, 남편이 총살당하는 죄수가 된 꿈을 꿨다는 이야기. 그 속에서 당신이 피로해보였고, 나는 그런 당신에게 편히 쉬라며 흙을 덮어주었다고, 그러나 당신은 피로해서 내게 고마워할 줄도 몰랐다고.(그러나 결국 나는 남편에게 생활비를 부쳐달라는 짧은 메모를 보낼 뿐이다)

결국 채금의 아버지가 본 죽음도, 내가 본 남편의 (의식적인) 죽음도 이 지점에서 동일해진다. 존재에 대한 더 큰 갈구를 불러일으키는 죽음들, 그리고 그 갈구를 늘 배반하는 삶들. 삶의 의미를 잃고, 진정한 자아를 잃고, 타인의 넋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거짓말들 중에, 내가 꿈꾸었던 행복이라는 이름의 거짓쯤은 별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때 실업자이던 남편이 즐겨보았던 나비의 다큐멘터리를 기억해낸다. 나는 그날 나비가 바다를 횡단하는 장면을 보며 “나비가 바다를 건너다니…, 세상에는 저런 거짓말도 있구나. 그러자 (…)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거짓말들 중에 내가 꿈꾸었던 행복이라는 이름의 거짓쯤은 별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었다”라고 생각했었다.

채금의 아버지를 만난 후, 삶은 늘 죽음보다 더 가혹함을 받아들이게 되는 나는 서서히 남편을 용서해간다. 나는 중국에서 자주 남편을 닮은 남자들을 보고, 문신 가게 안에서는 갈기갈기 찢겨진 날개로 바닷물을 흘리고 있는 나비의 환영을 본다. 그리고 “남편의 몸통이 바다 위를 둥둥 떠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몸통에서 떠나간 팔다리를 보고 싶지 않은 듯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다시 한번 홀로 채금의 집을 찾아간 나는 채금이 “안녕하세요. 나는 이채금입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를 빼곡하게 공책에 쓰며 연습해 나에게 말을 걸어왔던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소통에 대한 그녀의 노력이 눈물겹고, 그런 내 눈에는 하나의 영상이 어린다.

“바다에는 팔다리가 사라진 그가 둥둥 떠 있다. 비록 몸통뿐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를 아주 오랜만에 안아주고 싶었다. 팔다리가 없어서 나를 마주 안을 수가 없는 몸통뿐인 그는, 내게 안겨서도 점점 더 푹, 짠 소금물에 절여지는 듯했다.”

혼자서 말을 중얼거려야 했던 것처럼, 부치지 못할 긴 편지를 써야 했던 것처럼, 여전히 남편과의 소통은 요원하다. 그러나 불가능을 알면서도 바다를 건널 꿈을 품는 나비처럼 나는 또 하나의 꿈을 품는다. 무엇보다 그를, 나를 용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몸통뿐이더라도, 점점 더 소금에 절여지더라도 그의 삶을 부둥켜 안고 싶기 때문에.

망망대해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죽음임을 예감하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양 바다를 향해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그렇게 어떻게든 살아보려다 모든 것들을 망각해버린 남편도 역시 또 하나의 나비일 터이므로.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언가 막연한 꿈을 품고 한국이라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채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바다를 건너가려는 나비의 꿈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품는 모든 근원적 불행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위대한 거짓말의 힘으로 인간들은 삶을 이루고,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날개가 찢겨지고 젖어 죽음으로 향해갈지라도 바다를 건너려는 나비의 처절한 날갯짓은 아름답다.

삶과 죽음이 얽혀있는 바다를 횡단하는 그들에게는, 이루지 못한 꿈이든 이미 잃어버린 꿈이든 여전히 간절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이란 바다 건너편의 육지에 도달하는 일보다는 몸이 찢어지면서라도 바다를 건너는 일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나도 채금도 언어마저 통하지 않는 곳에서의 삶을 시작해야 하지만, 바다를 건너간다는 나비, 그런 위대한 거짓말 앞에서 행복이라는 거짓마저 별 것이 아닌 일이 되니 날갯짓을 쉴 수는 없을 터이다. 그리고 궁극에 문제되는 것은 그 삶의 거짓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일, 그러면서도 날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권민정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8-0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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