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스타일 담은 가벼운 소설읽기

패션은 환상을 준다. ‘고저스(gorgeous)’하고 ‘시크(chic)’한 세계로 인도한다. 화려한 화보가 가득한 패션잡지만큼이나 젊은 여성들이 꿈꾸는 삶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어디에? 바로 소설과 에세이 속에서다. 동네 DVD 대여점에서 헤매거나 추석특집 TV에만 빠져 있지 말고 이번 연휴에는 책 속에서 ‘패션’을 읽어보자.

학교 다닐 때 남학생들은 모여서 호기심에 누드사진집을 탐닉했지만 여학생들은 달뜬 욕망을 달래려고 로맨스 소설에 빠졌다. 친구집에서 로맨스 소설을 돌려보며 우정을 쌓았던 것. 그렇다면 요즘의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은 어떨까. ‘칙릿(Chick lit)’에 흠뻑 빠져 있다.

여성이라는 존재 확인

칙릿은 젊은 여성들을 주요 독자로 삼는 대중소설을 뜻한다. 젊은 여성을 뜻하는 칙(Chick)과 문학(literature)을 뜻하는 단어를 합성한 신조어로 ‘칙북(Chick book)’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칙릿은 1990년대 중반 영국에서 등장해 유럽과 미국, 아시아까지 패션과 함께 유행했다. 한마디로 젊은 여성들이 동경하는 패션업이나 미디어 등의 직업을 가진 대도시 사회 초년생 여성들의 삶과 스타일을 풀어가는 가벼운 소설이다.

말하자면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드라마 ‘섹스 앤드 시티’ 류의 소설이 바로 칙릿이다. 주인공들은 외모에 항상 고민하고 패션과 쇼핑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물론 연애와 섹스에 대한 솔직담백한 수다도 곁들여진다. 브리짓 존스를 통해 뚱뚱한 외모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캐리, 사만다, 샬롯, 미란다를 통해 독신 여성들의 우정과 연애, 패션을 배운다.

칙릿은 패션잡지처럼 작품성 없는 연애소설이나 순정만화처럼 치부되기도 하지만 새롭게 진화해가는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외모에 관심을 각고 옷, 구두, 화장 등 최신 유행 패션을 소유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욕망을 감추지 않는 그녀들. 배우처럼 완벽한 외모도 아니고 배경도 없는 지방 출신에 실수투성이, 게다가 감정의 우여곡절도 겪는다. 그러나 결국 능력과 기지를 발휘해 자신이 꿈꾸는 일과 사랑을 찾아가는 이 시대 여성들의 성장소설이라고 할까.

2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자기 계발서’와 ‘아가씨 소설’로 불리는 칙릿은 올 상반기 서점가의 대박 상품이었다. 인문, 교양 도서가 1만 부 팔리면 성공한 것이라는 우리 출판 시장에 10만 부, 30만 부씩 팔리는 20대 여성 ‘성공담’ 서적들이 인기 아이템으로 자리잡았다.

나쁜 여자론을 역설적으로 풀어나간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우테 에하르트 지음, 글담), 여성 자기계발서의 본격 신호로 꼽히는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남인숙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서른에 재산세를 내는 즐거운 상상을 하라 등 현실을 직시하도록 강조한 ‘여자생활백서’(안은영 지음, 해냄), 20대 CEO가 충고하는 20대 여성의 부자학 ‘가난한 남자와 결혼해도 부자가 될 수 있다’(이정일 지음, 휴먼비즈니스), 여자 나이 서른에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스무살과 서른살, 열정의 온도가 다르다’(박은몽 지음, 다산북스) 등이 그들이다.

여성의 욕망, 그리고 자아성취

‘20대 여성 성공담’의 또 다른 모습은 런던, 뉴욕을 무대로 고급 패션브랜드에 대한 욕망과 쇼핑, 연애, 일과 자아성취라는 소재를 다룬 소설이다. 4부작 ‘쇼퍼홀릭’(소피 킨셀라 지음, 황금부엉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문학동네)가 대표적이다.

4부작 ‘쇼퍼홀릭’은 20대 쇼핑 중독자가 결국 자신의 특기(?)를 발휘해 퍼스널쇼퍼로 성공하는 스토리다. “신이시여, 부디 제가 그 스카프를 차지하게 해주소서!”로 대변되는 주인공 레베카 블룸우드의 유일한 관심사는 쇼핑. 옷, 소품, 화장품, 인테리어 용품까지 쇼핑 그 자체를 사랑하는 그녀는 사실 카드 빚 때문에 은행 독촉장을 받는 신용불량자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기자를 지망하는 앤드리아 삭스가 패션지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의 개인비서가 돼 온갖 수모를 겪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아간다는 줄거리다.

이름만 들었던 명품 옷과 가방, 신발이 쌓여있는 거대한 옷장을 맘대로 사용할 수 있고 심지어 디자이너들이 직접 옷을 디자인해주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어울리는 ‘바나나리퍼블릭’ 벨벳 스커트를 다시 꺼내 입고 소원하던 칼럼니스트가 된다.

이밖에 삼성패션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저자가 패션 읽기를 돕는 ‘패션에 쉼표를 찍다’(김정희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현직 패션기자가 런던, 뉴욕, 도쿄 등을 둘러보고 최신 유행, 패션 등을 소개하는 ‘쇼핑 앤 더 시티’(배정현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가장 옷 많이 입혀본 스타일리스트와 가장 옷을 많이 입어본 모델이 소개하는 스타일 가이드북 ‘스타일북’(서은영, 장윤주 지음, 시공사)도 읽을 만하다.

꿈을 향해가는 여성들의 아름다움

칙릿을 작품성 없는 통속물로 치부하고 소설 속 주인공들을 허영덩어리 ‘된장녀’로 몰아갈 수도 있겠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대 여성상의 변화된 모습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칙릿은 육체와 자아, 욕구에 있어서 과거와는 달라진 ‘요즘 여자들’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과거 로맨스 소설이 뛰어난 외모와 순진성을 무기로 잘난 남자 만나 성공하는 신데렐라의 여성성을 추구했다면 ‘칙릿’은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능력으로 쟁취한다’는 자본주의 시대의 여성상을 보여준다. 바로 시회적인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사랑도 성공적으로 완성한다는 인생 역전의 스토리를 추구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추구하는 외모와 패션, 쇼핑, 일은 ‘바로 내 얘기네!’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결론은 ‘꿈을 찾아 간다’는 것이지만, 소설과 에세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생활 자체다. 왕자를 찾는 허무맹랑함 대신 내가 열심히 살아간다면 내 꿈은 내가 이룰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는 여자들의 ‘인생지침서’인 것이다.


박세은 패션칼럼니스트 suzanpark@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