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 게임같은 연예계… 정상은 잠시, 추락은 한순간"하루아침에 스타로 뜨고 지는 풍토, 트렌드 변화 심해 기다림·인내 배워야

“거실에서 어머니가 코미디 프로를 보다가 웃는 소리가 들릴 때면 (저는) 마음이 아파 몰래 속울음을 삼켜요. 말씀은 안 하시지만 ‘왜 너는 저기에 없냐’고 묻는 게 느껴지거든요. ”

‘사바나 추장’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2000년대 초 떠오르는 ‘개그계의 황제’라는 극찬까지 받으며 잘 나가던 개그맨 심현섭(37)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벌써 안방극장에서 진짜로 나갔다. ‘은퇴 아닌 은퇴’를 한 것이다. 짓궂은 개그맨의 기질과 열정이야 여전하지만, 수년 전 그토록 시청자들을 열광케 했던 ‘봉숭아 학당’의 참견쟁이 맹구는 예상 밖으로 차분한 사나이로 필자를 만났다.

한창 때를 지난 30대 후반의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시련 속에 터득한 달관의 경지에 들어선 때문일까, 개그계에서 권불십년(權不十年)의 염량세태를 맛보고도 적잖이 덤덤하다.

“저는 낙천적입니다. 그냥 ‘그때까지만 (개그맨 활동을) 하라’는 하늘의 뜻이었겠지 합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마음이 여유로워졌고, 긴 시간을 내다볼 수 있게 됐습니다.”

미련·집착 잊은지 오래… 운명으로 받아들여

그는 요즘 교통방송의 매일 라디오 프로그램 <2시가 좋아>의 MC를 맡고 있다. 방송 활동으로는 현재 유일하게 맡고 있는 생업이다. TV 코미디언 시절엔 일주일 단위로 살던 것이 이젠 일일 단위로 바뀌었다. 하루가 화살처럼 흘러간다. 그러면서도 TV로 되돌아 가겠다는 미련이나 집착은 전혀 없다.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들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요즘도 가끔 행사 출연 섭외가 들어오는데 ‘저···, 이 정도 (소액)출연료인데 나와주실 수 있겠어요?’ 라고 물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예전의 저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비참해지겠지만, 저는 그때마다 무명시절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렇게라도 저를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지요. 제 경우, 무명시절을 거쳐봤기 때문에 인내의 힘이 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개그맨의 삶이 어떤가는 심현섭이 지나온 길이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는 1989년 서울예전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할 때부터 갈 길이 드러나 있었다. 자신의 전공 수업은 빼먹기 일쑤, 대신 연극과 수업을 상습적으로 청강하다가 교수에게 들키기도 했다. 연극과 학생들의 공연이 있을 때면 ‘포스터를 그려주겠다’는 흥정을 벌여 스탭이 되기도 했다.

학교 축제 때에는 비공연과 학생으로는 최초로 사회자가 된 기록을 남겼다. 이미 그때 ‘AFKN 따라하기, 공룡 흉내내기’ 등 끝도 없는 개인기로 완전무장하고 있었다.

해군 홍보단으로 복무를 마치고 93년 제대 후 제일 먼저 달려간 곳도 개그맨 공채 시험장이었다. 몇만 명이 몰린 치열한 공채 경쟁을 뚫고, 드디어 96년 SBS의 개그맨 신분증을 쥐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를 땐 그렇게 합격만 하고나면 ‘(힘든 시기가) 이제 끝났다’고 기뻐하지만, 실은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예요. 김대희, 김준호 등이 저랑 동기인데 그때 무명시절을 함께 보내면서 모여서 술만 마셨다하면 ‘우리, 어떻게든 살아남자!’고 다짐하곤 했죠. ”

공채 합격 후 3개월간의 연수과정을 거쳤다. 회사원처럼 매일 출근해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모니터링 해 가며 리포트를 써내기도 하고, 선배들로부터 인성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본인의 적성에 맞는 역할이나 하고 싶은 소재들을 찾아내는 것이 숙제였다. 연수기간 중 받은 월급은 당시 38만원. 말 그대로 거마비 수준이었다.

연수 한두 달만 지나도 이미 ‘될 싹’과 ‘안 될 싹’은 판명되기 시작한다. 단 석 달 안에 PD눈에 띄자니 합격자들 간에 생사를 건 특기경쟁이 벌어졌다. 로보캅이 되어 뉴스를 진행하는가 하면, 각국 사람들로 변신하며 오토바이 타는 흉내를 선보이기도 하고, 그 외에도 동물 흉내 등 별별 장기가 다 등장했다.

심현섭은 초반부터 끝없이 샘솟는 개인기가 강점이었다. 지금까지도 꿋꿋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동기생 강성범 역시 당시 숨도 쉬지 않고 지하철 노선별로 역 이름을 읊어대는 등 합격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스타의 싹을 보인 유망주 중 한 명이었다. 김준호나 김대희 등도 이미 연수시절부터 ‘장수할 재목들’로 인정받고 있었다.

연수가 끝나면 이때부터 각개전투가 시작된다. 장기가 특별한 사람은 프로그램에 곧바로 투입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심현섭은 <이홍렬 쇼>의 방송 시작 전 바람잡이로 약 9개월을 이름없이 보냈다.

99년 KBS로 옮겨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에 출연하면서부터 심현섭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다도시 흉내를 내며 정치 풍자를 한 것이 시청자들에게 먹혀들었다. 시청률이 높아졌고, ‘이다도시 분장을 하고 나오는 사람이 대체 누구냐’는 질문이 전화로, 인터넷으로 몰려들었다.

“운이 맞았던 것 같아요. 저를 알아보는 분들이 하나둘씩 생겼고, 기분이 너무나 좋았지요.”

전국 방방곡곡의 오지를 돌아다닌 <파워 백세> 프로그램은 더욱더 그의 인기에 가속도를 붙여주었다. 당시 결정적으로 개그맨 심현섭의 존재를 각인시킨 것은 99년 KBS <개그콘서트>가 신설되면서부터였다. <개그콘서트>는 기존 코미디 프로그램들의 ENG 녹화나 비공개 녹화 방식을 버리고 획기적으로 무대를 시청자들에게 개방한, 국내 최초의 공개 개그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사로서도, 개그맨들 자신으로서도 대단히 큰 모험이었다.

“아이디어 찾기가 가장 어렵지요. 과정상으로는 먼저 개그맨들이 각자 하고 싶은 아이템을 찾아서 ‘이번주엔 이걸 하겠다’고 들고 가면, 코미디 작가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서 내용을 만들어가지요. 이를테면, 개그맨들이 ‘장을 보아서’ 가면 그 재료로 작가랑 ‘요리’를 하게 되고, 그걸 PD가 맛을 본 뒤 ‘짜다’고 하면 다시 양념을 바꿔서 만들어내는 식으로 내용이 짜여집니다. ”

무사히 방송을 끝내고 나면 돌아서자마자 곧바로 다음주에 방영될 소재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밀려온다. 다행히 그 주의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의 뜨거운 호응이 받았을 땐 모든 게 즐겁고 보람을 느낀다.

<개그콘서트>의 마무리 홈런, ‘봉숭아학당’ 코너의 맹구 캐릭터는 심현섭의 인기를 절정에 올려놓았다. 도처에서 CF제의가 밀려왔고, 그를 찾는 곳이 너무 많아 ‘늘 머리채를 잡아당겨 끌려가다시피’ 각종 행사와 프로그램에 불려다녔다. 2000년에는 백상예술대상을 받았고, 2002년까지도 심현섭의 몸값은 상한가를 달렸다.

그 무렵 지인의 소개로 패스트푸드점을 부업삼아 열기도 했지만, 적자만 안고 다섯 달 만에 문을 닫았다. 방송만 알 뿐, 세상 물정에 어두운 개그맨들에게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연예인 중에서도 가장 활동 수명이 짧은 것이 개그맨들이예요. 밤업소에라도 나가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밤업소측에서도 잘 나가는 개그맨들과 계약하려고 하지 아무나 받아주지 않습니다. ”

폭음,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기도

2002년 말부터 일이 묘하게 꼬였다. <개그콘서트>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들과 함께 SBS로 집단 이적해 <웃찾사>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이후 대선과 관련된 모 후보의 지지연설 논란 등에 얽히면서 그의 영원할 것 같던 인기는 갑자기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정상까지 오르기엔 한참의 세월이 걸렸지만, 정상에 머문 시간은 잠시뿐이고 추락은 순식간이었다.

“하도 속이 타서 처음엔 술도 많이 마셨고, 거의 1~2년 동안 대인공포증에 시달려서 어딜 가든 사람이 싫었어요. 제일 답답한 것은 사람들이 뻔히 이유를 알면서도 제게 물어보는 거예요. 심지어 목욕탕에서 조용히 반신욕을 하고 있는 데도 누군가 다가와서는 ‘요즘 왜 TV에 안 나오냐’고 괜히 물어보는 겁니다. 그 이유를 뻔히 알면서 일부러 말이지요. ”

TV에서의 퇴장은 서서히, 그러나 뚜렷하게 진행되었다. 어느날부터인가 하나둘씩 섭외 전화가 줄어들었다. 제시하는 출연료의 수준도 낮아졌다. 얼마쯤 지나자, 어쩌다 명절 특집 때가 아니면 TV에서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그가 설 자리는 다른 개그맨들로 채워져 있었다.

개그계는 연예계의 그 어느 분야보다 트렌드의 변화가 빠른 곳이다. 그 트렌드를 민첩하게 따라잡거나 아예 주도하지 못하면 중간 도태는 시간문제다. 심현섭의 퇴장 후, <웃찾사>만 해도 그사이 벌써 두 번 ‘물갈이’를 했다. 심현섭의 특기였던 ‘개인기 시대’가 막을 내린 뒤 ‘옥동자, 갈갈이 시대’가 지나갔고, 현재는 ‘유행어 띄우기’ 트렌드가 뜨고 있다. 그러기에 그가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데뷔 12년째인 올해, 그는 현재 <웃찾사>에서 활동중인 개그맨들과 많게는 20세 가까이 차이가 난다.

“가수나 탤런트는 컴백과 인기 회복이 언제나 가능하지만, 개그계는 ‘모 아니면 도’입니다. 새롭게 보여줄 것이 없으면 돌아가봐야 욕만 먹을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진작에 ‘총알’을 한꺼번에 다 쏘지말고 한 발씩 아껴가며 쐈어야 하는 건데, 제 스타일상 저는 그러지 않고 마구 기관총처럼 연발로 한꺼번에 총알을 다 쏴버린 거거든요. 그러니 총알은 다 떨어져버렸고, 게다가 요즘은 개그맨 지망생들이 워낙 많다보니, 방송쪽에서는 굳이 새 총알을 장전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그냥 사람 자체를 갈아버리고 있어요. ”

이후 얼마간 KBS에서 라디오 방송 진행을 맡기도 했고, 간간이 <파리의 연인?>, <내사랑 못난이> 등 드라마에도 출연한 바 있다. 그리고 현재의 라디오 프로그램 DJ를 맡게 된 것이 작년부터다. 지나온 길에 대해선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다. 후회도, 저항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일 뿐이다. 과거 개그계 황제의 ‘퇴장’의 변은 의외로 초연하다.

“‘저는 낙천주의라서 이미 지난 일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않는 편이예요. 중1때 아버지(故 심상우 전 청와대비서관)를 잃은 뒤부터 더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살고 싶습니다. 실제로 마음이 편하구요. ”

선배 코미디언 김형곤 씨의 돌연사 소식을 들었을 땐 너무나 거짓말 같아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단다. 그리고 최근까지 연이은 연예인들의 사고, 그리고 자살. 데뷔 후 12년간 연예계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모두 달려본 그는 특히 후배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요즘 연예계는 마치 두더쥐게임 같습니다. 갑자기 이쪽에서 뭐가 팍 올라오는가 하면 저쪽에선 뭔가 갑자기 팍 내려가는 식이죠. 기획사나 길거리 캐스팅 등이 늘어나면서 예전의 연예계 풍토와는 다르게 하루아침에 스타로 떠오르는 연예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본인들이 더 힘들어 하는 겁니다.

처음보다 조금만 상황이 안 좋아져도 민감하게 좌절감을 느끼게 되죠. 무명 시절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인기의 단맛은 알아도 기다림과 인내를 잘 모르는 겁니다. 후배들이 좀 더 연예인으로서의 자기 삶에 꿋꿋하고 현명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

TV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그의 개그맨으로서의 태생적 기질은 어쩌면 평생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현재 맡고 있는 2시간짜리 라디오 방송 중에도 매 시간 청취자들을 어떻게든 웃기지 못하고 방송을 끝낸 날은 자꾸만 찜찜하고 울렁증이 생긴다고 한다.

올 봄 개업을 목표로 현재 매니지먼트 사업을 준비 중이라는 그는 과연 이 고질병(?)을 고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개그맨이 되려면>

전공과 상관없이, 각 방송사별로 실시되는 공채에 응시하거나 간헐적으로 열리는 이벤트성 신인 등용 콘테스트 등에 지원할 수 있다. 공채 합격보다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생존이다. 공채합격 후 10명당 9명꼴로 무명으로 사라지는 비애를 맛본다.

교통방송 <2시가 좋아>를 진행하고 있는 심현섭이 담당 PD와 방송에 앞서 얘기하고 있다.

글, 사진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