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은 치열한 아이디어 전쟁터책 성공 여부에 대한 판단·책임 고스란히 자신의 몫… 엄청난 스트레스로 이직률도 높은 편

“책도 맘껏 읽고 공부도 할 수 있는데다 돈까지 받는 일이더라구요. 게다가 늘 책으로만 접했던 유명한 작가들(저자들)이 제 앞에 막 걸어다니는 거예요! 너무 신기하고 기분 좋았습니다. ”

그랬다. 그는 그 재미에 발목이 잡혔다.

대학원 복학 전에 두어 달만 잠시 사회 경험을 쌓아보겠다고 들어섰던 길이었다. (주)민음사 장은수(39) 대표이사는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 석사 과정을 밟던 중 1993년에 민음사에 입사한 뒤 오늘까지 한길을 걸어왔다. 올해로 경력 15년째. 1997년 자회사인 ‘황금가지’로 옮겼다가 지난해에 다시 민음사로 복귀해 현재 대표직을 맡고 있다.

민음사에 소속된 출판기획자만 약 80명. 자회사까지 합쳐 매년 400여 종의 신간들을 세상에 쏟아낸다. 그중 약 100종이 민음사에서 나온 책들이다.

출판기획자의 출발은 원고의 교정, 교열 작업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오·탈자나 맞춤법, 띄어쓰기를 바로잡거나 문장을 세련되게 다듬는 일 같은 것들이다. 짧으면 6개월, 길면 2~3년 동안 이 일을 반복한다. 시간이 지나다보면 서서히 ‘편집 중독’ 초기 증세가 나타난다.

“이 병에 걸리면 나중에는 신문이든, 거리의 간판이든, 식당 메뉴판이든 뭐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마다 교열을 하려고 듭니다(웃음). 신입들이 거치는 1단계 증세지요. ”

눈은 피곤하지만, 그래도 기획업무에 비하면 차라리 편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교정과 교열에는 정확한 ‘답’이라도 있지만, 끊임없이 새 아이디어를 찾아내야 하는 기획 작업은 ‘답이 없는 일’이다. 책의 성공 여부에 대한 판단과 책임이 오롯이 기획자의 두 어깨에 얹힌다.

이 책을 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한 번 더 책 광고를 내는 것이 득이 될까 손해가 될까, 이전에 판매 결과가 좋지 않았던 저자가 이번에 또 책을 내고 싶어 하는데 다시 기회를 줄까 말까 등 모든 문제가 기획자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중증의 출판 중독자

청탁한 원고를 받기 위해 꾸준히 저자들과 접촉하는 일에서부터 교정과 교열, 마침내 더 이상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 ‘최종 원고’를 완성한 뒤 마케팅과 홍보 전략을 짜는 일, 편집 디자이너와 협의해 책의 모양새를 만들고 최종 인쇄를 마치기까지, 신입들은 선배의 어깨너머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자연스레 익히며 점차 기획자로 성장해간다.

전집류가 출판시장의 주류를 이뤘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단행본에 주력하는 출판사들이 대부분이다. 독서 트렌드에 맞추어 단기간에 치고 빠지는 ‘반짝 특수’를 노린 출판사들이 늘면서 출판 기획자들 간에 아이템 선점 경쟁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온종일 최신 정보와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들에게는 TV나 신문, 잡지 또는 인터넷 등에 떠도는 정보는 이미 늦은 것. 내가 아무리 빨리 트렌드를 읽었다고 하더라도 늘상 더 민첩한 기획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한번은 신문 귀퉁이에 조그맣게 난 모 씨의 기사를 보고 ‘이거다!’ 싶어 곧바로 기획서를 만들었어요. 최대한 서둘러 한나절 만에 내부 결재까지 모두 끝낸 뒤 바로 모 씨에게 전화를 했는데, 이미 그 사이에 다른 출판사가 접촉해 계약이 끝났더라구요. 허탈했죠.”

더 심한 속도전도 있다. 언젠가 밤 11시경 인터넷을 보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른 장 대표.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회의도 초스피드로 마친 뒤 곧장 섭외전화를 걸었는데도, 그 짧은 시간에 이미 8군데의 다른 출판사 기획자들이 전화를 건 거였다.

서서히 기획자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출판 중독 2단계 증세도 함께 찾아든다. 이번엔 교열이 아니라 ‘보이는 모든 것마다 책으로 만들려 드는’ 증세다. 신문을 보다말고 갑자기 기사를 오려내는 버릇도 이 무렵에 생긴다. 중독의 정도로 치자면, 15년차 장 대표도 거의 난치병 수준이다.

“사실은, 조금 전 이 카페에 들어설 때도 저 그림(인터뷰 장소였던 카페의 벽면에 그려져 있던 일러스트)을 보자마자 ‘저걸 표지로 만들수 있을까? 하지만 그림의 느낌이 너무 가벼워서 단행본은 안 되겠고 잡지에는 쓸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웃음). ”

기획자들이 본의 아니게 술꾼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저자와의 유대를 위해서, 또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술자리를 가질 때가 많다. 적게는 1주일에 3~4일, 많을 땐 매일 술을 마셔야 한다. 그나마 자정 전에 술자리가 파하면 다행.

문인들은 십중팔구 새벽까지 자리를 끝내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서도 내내 긴장을 풀 수 없다.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

“원고 계약을 따내는 시간이 주로 새벽3시대입니다. 전날 아침부터 설득을 시작해서 결국 한밤중의 술자리까지 가서야 응낙을 받아내는 경우가 많거든요. 이럴 땐 철칙이 있습니다. 술에 마셔 몸이 안 좋더라도 다음날 아침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필자에게 바로 계약서를 보내야 됩니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서명을 받아야 하는 거죠. ”

번역서의 경우, 오역이나 오자 등 번역가의 실수를 바로 잡는 것도 출판기획자들의 역할 중 하나다. 번역의 오류를 발견할 정도라면 당연히 번역가 못지않은 수준의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애초부터 입사 시험이나 채용 기준이 만만찮은 것도 이 때문이다.

책의 제목을 두고 마라톤 회의가 벌어질 때도 있다. 제목은 책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얼굴. 사실상 독자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요인이다. 제목 한 줄 때문에 잠을 못 이루기도 하는 때가 부지기수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2000년 황금가지 발행)>의 경우, ‘제목이 너무 강하다, 위화감을 조성해 사회적으로 거부감을 살 수 있다’는 등 내부적으로 반대가 많아 회의도 여러 번 했습니다.

결국 제목을 다른 것으로 바꾸고 표지까지 만든 상태에서, 그날 새벽에 자다말고 갑자기 딱 깨면서 ‘이건 욕을 먹더라도 무조건 원래 제목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강하게 들었습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바로 원래 제목대로 바꾸었고, 그렇게 나온 것이 지금의 책이었죠. 약 160만 부가 팔렸습니다.”

기획에서 출간까지 최소 1년 소요

기획자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해 한 권의 책이 만들어져 서점 진열대에 놓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1년을 넘기기 예사다. 책이 발행된 뒤에도 방심할 수가 없다. 그토록 여러 차례에 걸쳐 철저히 교정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실수들이 발견되는 경우가 왕왕 터진다. 대개 마지막 인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단어라면 정정 스티커를 붙이는 정도로 해결되지만, 중요한 용어에서 오자가 생기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배포된 책을 회수하여 폐기하고 다시 인쇄를 해야 한다. 이로 인한 시간 낭비와 금전적인 손해도 크지만 무엇보다 출판사의 신뢰성에 타격을 준다. 이 경우 담당 출판기획자는 시말서를 써야 한다.

“제 경우에도 언젠가 책이 만들어진 다음날 오자를 발견한 일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독자들이 바로 알아챌까봐 얼마나 마음에 걸렸던지 그날 밤 사람들이 몰려와서 우리 회사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꿈까지 꿨어요. ”

그뿐이 아니다. 더 아찔한 실수를 저지른 적도 있다. 민음사에 갓 입사한 새내기 시절, 그는 자신이 교열을 나눠 맡았던 이문열의 <삼국지> 중 한 권에서 같은 내용의 페이지가 두 번이나 중복되어 인쇄된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이미 책이 팔린 지 한 달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그래도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똑같은 페이지가 두 번 나갔기에 망정이지, 반대로 한 페이지를 빠뜨리는 실수를 저질렀다면 더 크게 문제가 됐을 거예요. 왜 그렇게 됐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마지막 필름 작업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실수를 한 번 하고나면 거의 잠을 못 잡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생각만 계속 하게 되죠”

출판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차차 경험이 쌓이고 능력을 인정받게 되면 입사 후 대략 5,6년 단위로 팀장과 부서장을 거쳐 대표 편집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명실상부한 출판기획 전문가로 자리매김하는 단계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이니만큼 내성적인 성격이라면 버티기 힘든 직업이란다. 아이디어에 대한 경쟁과 압박감이 치열해 스트레스가 심하고, 그 때문에 이직률도 높은 편이다. 경력과 비례해 출판기획자들의 머리도 점점 하얗게 뒤덮인다.

“출판 직업의 특징이 ‘45세가 되기 전에 백발이 된다’는 겁니다. 50세에는 아주 확실하구요. 그래서 우리들끼리 ‘백발족’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더러 탈모를 겪는 분도 있습니다. ”

국내 대형 출판사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출판기획 경력 10년차의 연봉 수준은 4,000만~5,000만원선이다. 민음사는 단기간 내 팔리는 책으로 승부하기보다 장기적인 스테디셀러가 전체 발행 도서의 80%를 차지한다. 단기 흥행에 주력하는 출판사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시간싸움의 스트레스가 덜한 편이다.

자신이 기획한 책이 성공을 거두면 ‘기획인세’로 보상을 받는다. 당초 계약 사항에 일정 부수 이상 팔릴 경우 일정 비율을 기획 수당으로 지급받는다는 조건을 정해 둘 수도 있다.

원칙적으로 주5일제 근무지만, 사실 ‘쉬어도 쉬는게’ 아니다. 모처럼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토·일요일에도 내내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게 일과다. 장 대표도 ‘불량 가장’이 된 지 오래다.

“사실상 가족이 포기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휴일이라고 집에 있을 때도 종일 책만 붙잡고 있으니 가족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지적으로 자신을 단련하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기 힘든 직업의 세계입니다. ”

장 대표는 평균 이틀에 한 권씩 책을 읽는 독서광이다. 언제 어디서든 그의 손에 책이 쥐어있지 않은 때가 거의 없다. 거실 소파나 화장실 등 집안 곳곳마다 책을 깔아놓고 산다.

등산이나 쇼핑을 할 때는 물론, 심지어 사우나에 갈 때에도 책을 들고 간다. 요즘은 수십 편의 미공개 원고가 저장된 휴대용 USB 장치까지 갖고 다니며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PC방에 들어가서라도 글을 읽는다.

“책을 설계하고 판매하기까지 그 과정은 힘들지만, 그렇게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책이 완성되어 나온 것을 볼 때의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게다가 지식인들을 상대로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무척 매력을 느끼고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 출판기획자가 되려면 >

출판기획이 전문직으로 떠오르면서 채용 과정 또한 매우 까다롭고 어려워졌다. 민음사의 경우 결원이 생길 때만 공채를 하며 1차 서류전형, 2차 필기시험, 3차 면접 순으로 이어진다.

2차 필기시험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출제된다. 출판 상식 평가, 교열 실기테스트, 한자가 잔뜩 쓰인 1930년대 신문의 한 대목을 현대식 문장으로 고쳐쓰기, 영어로 된 예시문과 엉터리 한글 번역문을 동시에 보여준 뒤 오역을 바로 잡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면접에서는 응시자의 출판 감각과 의욕 등을 집중 질문한다. 출판사에 따라 논술이나 일반상식 시험이 추가되는 곳도 있으며, 민음사는 영어를 포함해 2개 이상의 외국어 실력을 요구한다.


글, 사진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