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에서 개봉된 빅터 살바 감독의 영화 <평화로운 전사(peaceful warrior)>를 감동 깊게 봤다. 야심 많고 전도유망했던 체조선수 댄 밀만(스콧 매크로위즈 역)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한 뒤, 그것에 절망하지 않고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 자신의 새로운 꿈을 향해 재도전하는 내용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휴먼스토리 영화다. 언제나 그렇듯, 관객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는 드라마틱한 인간승리 영화는 힘든 삶에 용기와 카타르시스를 줄 뿐 아니라 평소 잊고 지냈던 자신을 찾게 해주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 영화와 같은 비슷한 극적인 삶을 살았던 한국인을 알게 됐다. 친분이 두터운 건 아니지만 내가 하버드대 건축대학원 GSD에 입학하던 해 졸업반이었던 선배 여성이었는데, 졸업 후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 드라마를 최근에서야 들었다. 아마 그 선배의 삶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면 <평화로운 전사> 이상으로 감동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뉴욕시는 장래성이 유망한 젊은 건축가들을 매년 몇 명 선정해 시상한다. 최근에 발표된 수상자 중 한 명이 바로 GSD출신의 그녀였다. 내가 받은 건 아니었지만 같은 한국인이자 학교 선배가 영광을 안아 가슴이 뿌듯했다. 여기에 그녀의 감동적인 삶은 그 상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그녀의 삶 이야기는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GSD를 졸업한 후, 뉴욕의 유명한 건축회사에 입사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는 집은 9·11 테러가 일어난 세계무역센터와 한 블록 떨어진 아파트였다. 악몽의 시작은 9·11 테러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집은 아수라장이 돼 그녀는 화장실에 갇힌 채 공포에 떨고 있었는데 천만다행으로 옆집 사람들에게 발견돼 간신히 구조되었다.

수많은 먼지를 뒤집어쓴 데다,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으로 갔다. 정밀검진한 결과 뜻밖에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커리어를 눈앞에 두고 있는 여성이 암을 선고받을 때의 심정이란 어땠을까.

더구나 살고 있던 집은 테러 여파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한국에 살고 있는 부모는 멀리 떨어져 있고, 학부에 다닐 때 만나 사귀었던 스위스인 남자친구는 보스턴에서 근무하고 있고….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나 할까, 첩첩의 절망적인 시간을 젊은 여자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들었을 것이다.

암수술을 하루 앞두고 두 연인은 혹시라도 있을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우선 뉴욕시청에서 결혼식부터 올렸다. 물론 신혼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테러 직후의 뉴욕 병원 상황이 어떠했으리란 것은 상상이 갈 것이다.

넘치는 부상자로 인해 병실이 크게 부족해 그녀는 수술 후 링겔을 꽂은 채 두 블록 떨어진 집으로 왔다. 병 치료를 위해서 다니던 회사에도 사표를 냈다. 그 후 뉴욕 생활을 접고 남편이 살고 있는 보스턴으로 이사했다.

보스턴의 유명한 다나 파버(Dana Farber)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재기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국제건축전에 출품하기도 하고, 암센터에 근무하는 의사들 중 집 신축 설계 수요가 없는지 알아보았다. 하지만 투병 중인 젊은 여성건축가가 일을 맡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죽기 전에 단 하나의 건축물이라도 지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겠다고 결심한 후, 캠브리지에서 가장 저렴한 집을 구입해 건축을 시작했다. 재료는 값싸고 구하기 쉬운 것을 직접 골라 남편과 둘이서 집을 지었다.

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집에서 추운 겨울을 작은 히터로 견디면서, 마침내 꿈에 그리던 집을 완성했다. 하지만 싼 재료를 쓴 데다 너무 심플한 디자인 때문에 이웃 주민들은 집이 창고처럼 보인다고 처음엔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조그만 첫 번째 집 덕분에 그녀는 은행에서 융자를 얻을 수 있었고 두 번째 집짓기로 이어졌다. 건강도 많이 회복되어 왕성한 활동이 가능해졌다. 두 명의 친구와 공동으로 소규모 건축사무소를 열었는데, 최근 뉴욕시의 건축상까지 받는 경사가 겹쳤다. 그녀의 인간승리 삶은 2004년에 보스톤 글로브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고 한다.

병마와 역경을 이겨내고 받은 큰 상이라 그녀에게는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녀처럼 외국에서 난관을 극복하고 꿈을 이뤄가는 한국인은 많다. 그들이 있기에 세계 무대에서 코리아 파워가 날로 커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건축 동업자로서, 그녀의 불굴의 의지에 무한한 박수를 보낸다.

서대정 통신원(미국 텍사스주 달라스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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