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고 굴함없는 節義의 청백리… 사후 영의정에 추증

묘비
김상헌 1570년(선조3)-1652년(효종3)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 서간노인(西磵老人), 시호는 문정(文正)

청음은 임진왜란에서 명청(明淸) 교체로 이어지던 동아시아 질서 재편기에 강상(綱常)을 지키고자 온몸으로 맞섰던 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고 심양으로 압송되어서도 일관되게 절의를 지켰다.

그의 처사는 이후 국왕에게는 대로(大老)로, 선비들에게는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천 최명길의 강화론과 대립한 그는 당초에 '이름을 구했다'는 '요명(要名)'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청나라에 압송되어 저들의 요구대로 하지 않아 조선의 자존을 지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맑고 강직한 지조(淸剛之操)가 있다'는 평을 받게 되었다.

청음이 남긴 문집은 40권 16책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특히 시가 많다.

청음집이 여타 문집과 다른 점은, 생전에 저자 자신이 문집을 편차(編次)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가 67세(1636년)에 양주 석실로 물러나 지낸 때 시문을 정리하고 초고 자서까지 적어 두었다.

두 번째는 1645년 심양에서 돌아온 뒤 석실에 우거하면서 심양에 있을 때 저술한 시문들을 정리하고 글들을 다시 손보았다. 청음집은 1654년에 아들과 손자 김수증 등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작고한 2년 뒤의 일이었다. 청음집을 읽다보면 방대한 시문 때문에 그를 문장가나 척화론자로만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실상 그는 도학자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홍재전서에서 정조가 내린 평가가 주목된다.

"청음의 바른 도학과 높은 절의를 우리나라에서 존경할 뿐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도 공경하고 복종하였으니 문장은 나머지일 뿐이다. 내가 그를 말할 때는 고상(故相)이라 하지 않고 선정(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날 치제문에서 '그의 문장은 한유와 증공이요 그의 학문은 염락(濂洛)이다'고 한 것은 도학과 문장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동해의 물과 서산의 고사리/ 잔 들어 제향하니 맑은 모습 이와 같도다'고 한 것은 절의를 말한 것이다"라 하였다.

정조는 청음에 대해 학자로서의 면모를 들추어 말했다. 정조는 청음이 주렴계와 정이천, 정명도 형제의 학문을 이은 이로 보았다. 그래서 학자로서 최고의 존칭인 선정(先正)이라는 용어로 기렸던 것이다. 선정이란 용어는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 문묘에 배향된 몇 분에게만 선별적으로 쓰는 존칭이다.

이러한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청음도 당쟁 때문에 수모를 당한 일도 있었다. 안동에서 청음을 기리는 서원을 지을 때의 일이다.

안동은 퇴계학을 이은 영남 주리론의 고장으로 남인 세력이 주인이었다.

그 중심지에 몇몇 지역 노론계 인사들의 주도로 청음 선생을 기리는 서원을 건립하고자 했다. 사랑방에서 들은 서원 명칭은 '학동서원'이었다. 그런데 서원이 거의 완성될 때쯤 지역 유림들에 의해 여지없이 서원 건물이 헐렸다.

노론계가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청음의 문장과 도덕, 절의는 오랑캐들인 청나라 사람들까지 감복시켰던 차에 영남 선비들에게 이런 모욕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래 안동 지방에 서원을 건립하는 것은 도학과 절의를 숭상하는 본래 목적 외에 정치적인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은 향권(鄕權)의 주도권에 관련된 일이었다.

사료를 보면 당시 지방의 서원 건립은 서원의 남설(濫設)로 인해 억제되는 추세였다. 때문에 학동서원 역시 조정의 윤허가 용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공사가 강행된 감이 없지 않다. 반대론자들을 대변한 이는 소론계의 어사 박문수였다. 당시 그는 병조판서 직에 있었고 서원을 허문 일과 서원의 폐단을 극력 조정에 주달했다.

박문수는 영조14년(1738) 5월 18일에 안택준 등이 사사로이 서원을 영건해 향권을 쥐고서 마음대로 하려고 해서 고을 백성들이 분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안택준은 안도에 사는 순흥 안씨로 양산 고을의 수령을 지낸 이다.

이러한 보고가 들어가자 같은 해 6월 20일 공조판서 박사수의 상소를 보면 이미 그 무렵에 서원을 부순 내용이 보인다. "안동 사람들이 온갖 꾀를 내어 저지하고 방해하여 마침내 목재와 기와, 서까래 등속을 낱낱이 부수는데, 그 기세가 마치 바람 속의 불과 같아서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박사수는, 이미 감사와 수령의 결재를 받아 이미 세운 것을 사민(士民)들이 떼지어 마치 도적들이 약탈하듯 부수어 버린 것에 대해 죄를 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6월 23일의 서원 첩설(疊設) 문제를 다루는 조정 회의는 분위기가 매우 좋지 못했다.

영조는 서원 첩설을 방치한 수령도 잘못이지만 건물을 함부로 훼손한 이들의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의정 송인명과 판중추부사 김재로 등이 동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박문수는 반론을 폈다.

그런 박문수를 송인명은 "박문수는 무식하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습니다"라고 맹공했고, 조현명은 박문수를 추고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김재로는, 서원을 허문 이들을 죄 주는 것으로만 끝낸다면 실제로는 안동 유생들이 이긴 것이 된다는 논리로 서원을 다시 세울 것을 주청했다.

그러자 영조는 방백과 수령들이 나라에서 서원 건립을 금했는데도 허락한 것 또한 국법을 어긴 것이라는 논리로 쌍방 간의 잘못으로 끝을 맺었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양측 간에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8월 9일 호조판서 유척기의 상소에서 다시 그 일을 거론해 주동자를 죄 줄 것을 다시 청했고 이에 대응해 병조판서 박문수가 비호하는 상소를 올린 내용도 보인다.

정조 대까지 이러한 문제는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으나 정조 역시 양비론으로 일관했다. 청음이 은거했던 안동 서미동은 백이숙제의 수양산과도 같은 절의를 온전하게 지켰던 터전으로 인식되었다.

이곳에 서원을 건립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존심상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정조9년 청음이 병자호란 이후 우거했던 학가산(鶴駕山) 아래 안동 풍산현 서미동에다 서간사(西磵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청음을 배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덧붙이고 싶은 역사적 사실은 청음은 임당 정유길(퇴계의 제자)의 외손자로 퇴계를 존경했다는 사실이다. 청음이 동부승지로 있을 때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퇴계를 규탄함에 대해 그 잘못을 준엄하게 논했다. 이 일로 청음은 광해군의 오해를 받아 사직당했다.

청음이 척화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중국 심양으로 압송될 때 심경이 어땠을까. 옛날 교과서에서 읽었던 시조가 생각났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이 시조는 안동 소산(素山)마을의 청음 정자인 청원루(淸遠樓) 뜰에도 빗돌에 새겨져 있다. 계곡 장유가 청음에게 준 시 첫 귀절에는 "일편단심 안고서 대궐을 떠나는 몸(丹心違禁闥)/호호 백발 그 심회가 어떠했을까(白首意如何)?" 라 했다. 당시 청음은 예조판서 직에 있다가 남한산성이 함락된 뒤 안동 서미동에 은거하고 있었다.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된 인조18년(1640)에 청음은 71세의 노인이었다. 심양에서 부인의 상을 당했고, 73세 때 잠시 의주로 방환되었다가 74세 때 다시 심양으로 압송되어 76세 때 비로소 돌아와 석실에 은거했다. 그가 77세 때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32차례나 상소해 벼슬에서 물러난 장면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청음은 생전과 사후에 사림의 추앙을 받았는데, 83세를 일기로 사후에 즉시 영의정에 증직됨과 아울러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석실서원을 세워 김상용과 함께 배향됨을 시작으로 정주에 명봉서원, 효종의 묘정, 제주의 귤림서원, 정평의 망덕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남한산성의 현절사, 상주의 서산서원, 안동의 서간사 등에 널리 제향되었다.

청음의 묘소(경기도 기념물 제100호)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5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김상용의 신도비가 서 있는데 비해 청음의 것은 없다. 이는 자신의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는 청음의 유명에 따른 것이다.

묘전비 옆에는 손자인 김수증이 지은 글이 빗돌에 새겨져 있다. '대의(大義)가 일월(日月)과 천지(天地)에 걸려 있다.'고 적고 있다.

종가 답사 이후 안동 소산파 출신 김모현 씨의 서울 옥수동 집에서 최고의 석각 인장이 찍힌 청음 선생의 편지 한 장을 보는 호사를 누렸다. 청음은 자신의 인장을 손수 전각하였는데, 평생 100과 이상의 인장을 소유했으며 인장 모관을 위해 누각을 별도로 건립했다 한다. 서법으로도 일가를 이룬 선생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안동 김씨 장동파의 '장동(壯洞)'의 유래

청음의 증조부 대에 문과에 급제한 김영, 김번 형제는 고향인 안동 소산을 떠나 서울 생활을 하면서 김영은 청풍계, 김번은 장의동(壯義洞, 한성부 북부 명통방)에 터전을 마련했다.

후에 김영의 손자 김기보가 안동 소산으로 낙향했고 김영의 종증손자인 선원 김상용이 이 집을 인수해 거주하면서 청풍계와 장의동 일대는 김번 후손들의 터전이 되었다.

장의동은 후대에 점차 장동으로 약칭되었다. 다른 설은, 원래 장동은 창의문(일명 자하문) 아래에 있었는데, 자하동(紫霞洞)으로 불렸다. 이를 축약해 '자동(紫洞)'으로 불리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장동이라 한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다음 호엔 청주 한씨(淸州 韓氏)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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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친필 편지(김모현 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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